세 사람이 신나게 치킨을 뜯고 있고 카메라는 경쟁이라도 하듯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가며 보여준다. 음향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먹는 소리를 강조한다. 약간 거슬린다 싶을 정도다. 도대체 왜 이 장면을 이렇게 리얼하게 보여주나 싶었다. 뒤늦게 이 장면이야 말로 <굿바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참 쉽게 표현했다는 걸 알았다.
세 사람은 죽은 시체의 몸을 단장하는 염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전화를 받는 경리는 좀 거리가 있지만 사장하고 막 이 일에 뛰어든 다이고는 방금 시체를 염하고 왔을 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터부시하는 염을 시작했다는 걸 안 다이고의 아내는 짐 싸들고 친정으로 도망쳤다. 시체를 만지는 그의 손이 불결하다며 이 일을 그만 둘 때까지 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과연 죽은 것은 그렇게 불결한가. 이 장면이 필요했던 이유다. 우리는 살기위해 죽은 것들을 먹는다. 이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닭다리와 날개 역시 죽은 고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맛있게 먹는 고기는 인간으로 따지면 시체이다. 동물들의 죽은 몸은 손으로 요리하고 입으로 먹으면서 왜 죽은 사람의 몸은 불결하다는 것이냐고 묻는 듯하다.
<음양사>와 <비밀>을 연출했던 다키다 요지로 감독의 <굿바이>는 죽음이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라고 말한다. 닭의 죽음은 곧 인간의 영양분이 되기도 한다. 죽음을 통해 인간의 세계로 옮겨 온 것인지 모른다. 때문에 염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데 있어 최대한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이다. 염을 한 아내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한 가장의 대사는 영화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말하고 싶었던 핵심이다.
영화는 <으랏차차 스모부>나 <워터보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작된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초반 웃음을 유발하며 관심을 끌게 한다. 하지만 차츰 이야기가 진전될수록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가장 확실하면서도 불확실한 시간이 곧 죽음이라는 말이 있다. 언젠가 한 번씩은 거쳐야 하는 관문이지만 사람에 따라 그 시기가 다르다. 때문에 영화는 다양한 연령의 죽음을 펼쳐놓는다. 죽음을 터부시하지만 곳 누구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미움과 반목을 털어낸다.
죽음은 곧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리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하고 깨끗하다. 마지막 배웅의 길이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완전한 깨끗함에 도달하는 건 아닐까?
일본영화인 <굿바이>는 다양한 생각 거리를 제공한다. 과연 직업에 귀천이 있느냐? 나를 버린 부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등등. 하지만 이제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비등해 보이는 필자는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죽음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게 아닐까?
2008년 10월 29일 수요일 | 글_김용필 객원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