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웅담은 시작이 있고, 대개는 숨가쁘다. 세계를 지키는 역할을 하기까지 범상치 않은 인생을 거쳐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인생을 그럴 듯 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족히 영화 한 편은 나오기 마련이다. 명색이 수퍼히어로 영화인데 중량감 있는 악당과 싸우는 장면으로 끝내지 않을 수 없으니, 비장한 영웅의 시작을 알리랴 악당을 중량감 있게 소개하랴 바쁠 수 밖에.
보통은 수퍼히어로 영화의 마지막 악당과 수퍼히어로의 탄생을 함께 묶는 방법을 쓴다. 한 쪽을 설명하다보면 다른 한 쪽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덕분에 양쪽 모두 비중있게 다루는데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하다. 올해 히트작 <다크나이트>도 배트맨의 탄생을 그린 전작 <배트맨 비긴즈> 때 스승과 제자 관계인 악당과 배트맨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영웅을 그려냈다. 묵직하기 이를 때 없는 영화판 <배트맨> 시리즈의 원조 1989년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은 지금 작품에 비하면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시피 하다. 어느 밤 갑자기 배트맨이 갑자기 나타났고, 영웅은 고담시 거물 범죄자 조커와 악연이 깊다고 소개할 뿐이다.
괴승 라스푸틴, 지옥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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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에 거짓말 같은 일화를 남기고 죽은 승려 라스푸틴. 출신을 알 수 없이 어느날 나타나 왕자의 병을 신비한 방법으로 고친 후 귀부인과 왕비의 마음에 들어 궁중에 출입하고, 나중에는 정치에까지 압력을 넣다가 독살 당해 죽을 때까지 실제 살았을 사람같지 않은 온갖 소문을 낳았다. 신비주의자나 음모이론가들이 얼마나 이 인물을 좋아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그 중에는 역사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꾸미길 좋아하는 게임 디자이너나 만화가도 포함되어 있다. 그 결과, 수많은 영화와 소설 및 만화에서 사술을 쓰는 수상쩍은 악당으로 등장하기를 여러 번 그 중에는 2003년 작 〈라스푸틴 제거〉나 1981년 〈만능의 라스푸틴〉 같이 타이틀롤을 맡은 경우도 적지 않았고 1997년 애니메이션 〈아나스타샤〉에서처럼 비중있는 악당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역할의 특성 상 주역으로 나섰다하면 크리스토퍼 리(1966년)나 앨런 릭먼(1996년) 정도 포스가 아니면 주연을 맡기 힘들었고 격투 게임에 등장해도 해괴한 기술로 맞상대하기 힘들었던 기괴한 기술로 장년의 파워를 한껏 자랑했다.
이 정도 되는 남자가 지옥에서 직접 악마를 호출하려는 야심 한 번쯤 안가져봤으면 그 쪽이 지난 100년간 스토리텔러들의 상상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상황, 역사적으로는 1916년에 죽었지만 극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아 (역시 오컬트적인 괴소문이 파다한 실존인물인) 히틀러를 배경으로 악마 호출을 시도한다. 결과는 이미 알고있다시피 자신의 뿔을 자르고 정의의 편에 선 헬보이의 등장. 영화 첫번째 편이 라스푸틴과 헬보이의 대결로 이야기를 몰아간 것 역시 수퍼히어로 물 첫번째 편의 전형적인 구도다.
인간 사이에서 자라난 악마, 틴에이저의 마음을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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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히어로 탄생기라고만 하기엔 〈헬보이〉는 독특한 구석이 많은 영화다. 투박한 얼굴에 큰 덩치, 자른 자국이 선명한 뿔에 빨간 피부, 외모의 조합부터 선량한 구석이 없는 데다가 성격이 좋아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프랭크 밀러와 앨런 무어 같은 만화 작가들의 성공과 팀 버튼의 〈배트맨〉 이후 선량하지 않은 영웅이 더 쏠쏠한 주인공이 되는 것이야 익숙한 일이고, 원작만화가 비주류에서 큰 인기를 모은 작품임을 감안하면 이상하지도 않은 상황. 거기에서 〈헬보이〉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이 떡대 우람한 악마 소년이 사실 함께 일 하는 미녀 리즈(셀마 블레어)를 좋아하고 있고 표현방법이 매우 소년스럽다는 것. 여기에서 제목 헬보이의 비밀이 밝혀진다. 지옥에서 온 악마 소년은 ‘악마’라고 부를만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해 ‘소년’이지만 동시에 〈헬보이〉는 틴에이저 소년의 첫 사랑 이야기이도 하다. 영화는 틴에이저 로맨스 영화처럼 헬보이의 연애를 이끌어 간다. 다만 주인공 두 남녀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급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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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아름답고 어린 소녀와 추하게 생겼지만 능력과 인간성은 좋은(?) 괴물의 사랑. 묘하게도 주연배우를 맡은 론 펄먼과 겹친다.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장편 데뷔작 <크로노스>에서 함께 작업한 계기로 <블레이드2>와 <헬보이>를 함께 작업했지만 특히 <헬보이>의 주역을 맡은 것은 꽤 많은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TV 시리즈에서 고정 배역을 맡은 론 펄먼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1987년부터 3개 시즌 동안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 시리즈 <미녀와 야수>를 생각나게 한다. 고전 동화 <미녀와 야수>를 현대 느와르로 각색한 이 드라마 시리즈는 동일한 제목으로 국내에도 소개되어 인기가 좋았던 작품. 우리나라에는 <터미네이> 시리즈의 사라 코너로 유명한 린다 해밀턴이 악당들에게 린치를 당한 후 지하세계 사람들에게 구조되는 미녀 변호사 캐서린 챈들러 역을 맡았고, 지하세계에서 살고 있는 야수 빈센트 역으로 등장하는 배우가 바로 론 펄먼. 올드팬이라면 20년이 지나 틴에이저 괴물로 돌아온 론 펄먼에게 독특한 매력을 느낄 만 하겠다.
성장한 소년 앞에 선, 대규모 악당들
전편에서 소녀의 뜨거운 불길을 견디며 사랑을 확인한 헬보이와 리즈. 사춘기 사랑도 이루어지고 다소 복잡한 주인공 소개도 끝낸 〈헬보이〉속편에서 〈헬보이〉에게 닥치는 사건은 무엇일까? 간편하게 적 묘사에 집중해도 되는 〈헬보이2: 골든아미〉는 주인공과 주변 관계를 소개하느라 조금은 격이 떨어졌던 적을 집중적으로 키울 심산이다. 역사적 위치에 비해 단순한 악당이었던 라스푸틴보다 훨씬 말랑한 외모와 주인공급 액션을 갖춘 누아다 왕자를 등장시켰고, 제목처럼 ‘황금 군대’를 이끌고 헬보이와 한바탕 싸움을 펼치는 스펙터클을 준비했다. 물론 대거 확충한 누아다 왕자와 ‘황금 군대’에 <악마의 등> <판의 미로>에서 인상적으로 선보였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취향이 디자인에 듬뿍 투영되리라는 건 예고편만 보아도 알 일이다.
독특한 수퍼히어로 '헬보이'가 거대한 적과 맞서는 <헬보이2: 골든아미>에서 지옥과 현실 중간에 선 갓자란 빨간 소년의 활약을 확인할 차례다.
2008년 9월 22일 월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