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 인기 있는 시대가 있다. 실제 인물이 펼친 실제 사건이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이 드라마틱해 스토리텔러에게 무한한 영감을 제공하는 그런 시대. 한국에서라면 조선 시대 임금을 중심으로 한 스캔들 한복판에 있었던 장희빈 이야기 같은 것이 되겠고, 일본이라면 오다 노부나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전국시대 정도 겠다. 중국이라면 삼국지연의의 배경이었던 위진남북조 초창기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은? 요새 추세는 단연 튜더 왕조다.
영국 사람들에게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원래 인기가 많은 군주기는 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가진 제왕의 호감처럼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군주였다. 그래서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엘리자베스 1세를 다룬 작품이 많았고, 깜짝 출연으로 나서는 일도 많았다.
압도적 인기를 가진 군주
단 몇 분의 출연이라 할지라도 엘리자베스 1세 정도 되는 배역을 아무에게나 맡길 리 없다. 위엄과 연기력에서 당대에 인정 받는 영국 배우가 주로 맡는 배역이었고 출연 분량과 상관없이 주목 받는 역할이었다.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가졌을 지도 모르는 가공의 연애담을 영화로 꾸민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 역시 당시 국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 이리저리 꼬인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는 역할로 극 마지막에 등장한 엘리자베스 1세는 국왕의 위엄으로 셰익스피어의 사랑을 인정해준다. 마치 〈로빈 훗〉 이야기의 마지막에 나타나 위기에 빠진 로빈 훗 커플을 구원하는 사자왕 리처드처럼, 엘리자베스 1세는 위엄 있는 몇 마디로 차칫 사회적으로 매장될 뻔한 셰익스피어 커플을 구원한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맡은 배우는 기사 작위를 받은 영국 여배우 주디 덴치. 우리에게는 본드무비의 상관 M으로 익숙한 배우다. 전통적으로 위엄과 강한 존재감을 갖춘 여배우가 맡던 엘리자베스 1세에 부족함이 없는 명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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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배우들이 중년의 엘리자베스 1세를 맡았지만, 두 편 이상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역할을 맡은 배우는 특별히 관객들에게 위엄과 품격을 느끼게 하는 능력자라 보아도 될 듯 하다. 영국 BBC의 사실적인 TV 시리즈 〈엘리자베스 R〉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맡은 글렌다 잭슨은 이듬해 영화 〈메리, 스코틀랜드의 여왕〉에서도 엘리자베스 1세를 맡는다. 강인하게 영국을 이끈 철의 정치인으로 여왕을 바라본 〈엘리자베스 R〉과, 왕권을 위해 자신의 친척 뻘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제거해야 했던 〈메리, 스코틀랜드의 여왕〉에서의 역할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인지 글렌다 잭슨은 자신이 지닌 외모상의 강인함을 영화에 적극 활용한다.
에스파냐와 해상의 패권을 놓고 격돌할 상황에 이른 일촉측발 시기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로맨스를 펼친 1937년 영국 영화 〈Fire over England〉는, 올드팬에게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 커플을 탄생시킨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걸출한 여배우 플로라 롭슨이 엘리자베스 1세를 맡은 작품으로도 볼 만 하다. 제위 기간 중 가장 결정적인 시국에서 강인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철의 여왕으로 플로라 롭슨은 부족함이 없다. 비슷한 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영국 사략선 선장인 해적 제프리(에롤 플린)를 주인공으로 한 액션 활극 〈씨호크〉에서도 플로라 롭슨이 엘리자베스 1세로 출연하는 것을 보노라면, 분위기가 매우 다른 두 작품이 마치 시리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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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두 편의 영화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맡은 베티 데이비스는 매우 특별한 경우. 더구나 다른 경우와는 다르게 베티 데이비스가 맡은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영화는 모두 전기 영화로, 베티 데이비스는 타이틀롤로 명연을 펼치며 당대 최고의 엘리자베스 1세 배우라는 명성을 얻었다. 먼저 소개한 〈씨호크〉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엘리자베스와 에섹스의 사생활〉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중년 시절 연인으로 유명한 에섹스 공 로버트 디버럭스 사이의 애정 관계에 집중한 영화. 비슷한 시기 여왕의 총애를 얻었던 탐험가 월터 라일리 경을 등장 시켜 극적인 효과를 더 한다. 로버트 디버럭스 역은 이듬해 〈씨호크〉에서 로맨틱한 해적 제프리를 맡은 당대 섹시 가이 에롤 플린이 맡고 있고, 라이벌 격인 월터 라일리 역은 훗날 50년대와 60년대 공포영화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빈센트 프라이스에게 돌아갔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후, 베티 데이비스는 또 다시 엘리자베스 1세로 영화 〈버진 퀸〉의 타이틀롤을 맡으며 빼어난 연기를 선 보인다.
돌아온 여왕
한 쪽은 전사이자 절대 군주이며, 다른 한 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여인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1세 역할은 욕심이 가는 만큼 힘들기도 하다.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그려내기가 까다로운 까닭이다. 빼어나게 두 성격을 모두 표현한 베티 데이비스만 해도 미인형은 아니었던 까닭에 비슷한 해 〈영 베스〉로 여왕이 되기 전 순수한 소녀 엘리자베스를 표현한 진 시몬스같은 경우와는 접근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친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참수 당하고 왕권을 노리는 정적들에게 계속해서 위협을 당하는 한 여인의 삶과 절대군주로 노련하게 위기의 영국을 경영한 정치가를 한 번에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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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1998년에 셰카르 카푸르가 감독한 〈엘리자베스〉는 까다로운 조건을 얼마만큼은 만족시켰다. 연인 로버트 더들리와 평생을 하고 싶은 감정을 지닌 여인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아버지인 헨리 8세에게 어린 시절에 참수 당했고 그 아버지마저 죽은 상황. 현재 군주인 블러디 메리 1세는 배다른 언니지만 카톨릭 교도이며, 같은 종교를 믿는 주변 인물들은 국교회 신자인 것이 들통나는 즉시 위협적인 왕위 계승권자인 엘리자베스를 제거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영화는 이런 상황에 놓인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계승하고 ‘처녀 여왕’을 선언하며 절대군주로 변하는 과정을 연대순으로 그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섬세하고 유장하게 그리는 영화 〈엘리자베스〉는 사실, 실제 역사를 무시한 시나리오로 악명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이 많은 부분 과격하게 각색되었으며 몇몇 인물은 지나치게 단순화 되었고, 사건은 과감하다 못해 황당할 만큼 압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비극적 운명을 통해 여왕으로 성장하는 엘리자베스를 절묘하게 표현한 공은 대부분 훌륭한 배우들에게 있다. 특히 타이틀롤을 맡은 케이트 블랑쳇은 마치 이 역할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훌륭하게 소녀와 절대군주 사이의 엘리자베스를 연기한다. 그 뒤를 받치고 있는 프랜시스 월싱험 역의 제프리 러시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권력을 뒤에서 보좌한 음험한 참모 역할을 묘사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처음부터 준비한 것인지, 개봉을 앞두고 있는 〈엘리자베스: 골든 에이지〉는 여왕이 된 이후의 엘리자베스 1세를 그린다. 전작에서 훌륭하게 여왕을 연기한 케이트 블랑쳇이 9년이 지나 일생일대의 위기를 헤쳐가는 엘리자베스 1세를 맡는다는 소식에 기대한 팬이 한 둘이 아닐 듯. 역시 전작에서 수완 좋은 모사꾼 프랜시스 월싱험을 연기한 제프리 러시가 〈골든 에이지〉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는다. 영화의 무대는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와 일전을 거두어야 하는 위기가 외적으로 여왕을 압박하고, 카톨릭 교도인 메리 스튜어트 반대파의 왕위 계승권자로 등장하는 내적인 문제가 등장한 시기로 〈메리, 스코틀랜드의 여왕〉에서 글렌다 잭슨, 〈씨호크〉〈Fire over England〉에서 플로라 롭슨, 〈버진 퀸〉에서 베티 데이비스 같은 선배들이 엘리자베스 1세를 맡았던 넓은 시기를 아우른다. 전작을 맡은 셰카르 카푸르가 여전히 감독으로 참여하고 실제로는 많은 나이차가 있었던 월러 라일리 경을 클라이브 오웬에게 맡긴 캐스팅을 감안할 때, 영화의 고증은 전작 〈엘리자베스〉만큼이나 막 나갈 가능성이 높은 상황.
그러나 우리 시대 최고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배우일 케이트 블랑쳇이 다시 여왕을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고증을 떠나 전작 〈엘리자베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골든 에이지〉에서도 탁월한 엘리자베스 여왕을 은막 위에 펼쳐주기를.
2007년 11월 23일 금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