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 이댁은>은 제목에서처럼 관객을 희롱하려는 의도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장르적 오해를 소환하는 제목 자체가 맥거핀이다. 마치 가벼운 농담 따먹기일 것 같은 영화로 <이대근, 이댁은>을 오해한다면 그건 제목이 지닌 뉘앙스 탓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대근, 이댁은>은 코미디라는 감흥보단 드라마라는 감성에 매달린다. 그리고 그 드라마를 부여잡는 건 가족애이며 단도직입적으론 부성애다.
이대근이 홀애비가 된 사연을 간단히 짚어주며 출발하는 영화는 노인의 쓸쓸한 삶을 통해 가족이라는 단란한 울타리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도장 파는 일을 하며 수발들어주는 자식하나 없이 이 노인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이대근의 사연을 관객은 단서를 짚어가며 추측해내야만 한다. 사실 <이대근, 이댁은>은 반전이라는 희롱을 위해 드라마를 미끼로 끌어내린다. <이대근, 이댁은>은 반전을 거듭한다. 첫 번째 반전은 플롯을 이용한 영화적 유희로 활용되고, 그로 인해 풀린 서사의 눈가림을 통해 도모되는 두 번째 반전은 정서를 자극해서 페이소스의 극대화로 연결된다.
<이대근, 이댁은>은 신통치는 않지만 가볍게 나풀거리지도 않는다. 다소 산만한 정서는 문맥의 아귀가 들어맞는지에 대한 판단조차 흐리는 빈약한 내러티브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다소 가벼운 내러티브를 지탱하는 건 이대근의 선 굵은 연기다. 이대근의 절절한 연기는 이야기가 놓치고 간 원숙함을 다시 집어 들게 한다. 다만 모호했던 가족의 정체가 반전을 도모하며 베일을 벗는 순간, <이대근, 이댁은>이 지니고 있던 비장의 카드가 판을 뒤집기엔 역부족이란 사실만이 확인될 뿐이다. 다만 한번의 식상한 이야기적 반전이 상을 엎고 난 뒤 따라붙는 잿빛 정서의 에필로그는 심금을 울릴만하다. 그로 인해 확인되는 건 삼류를 지향하는 제목이 지향하는 의도가 장르에 대한 오해를 부르는 가장 큰 맥거핀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위선에 대한 배신감이 될지, 의외로 건진 수확이 될지는 관객의 성향에 의해 판가름 나겠다. 다만 엔딩에서 만나게 되는 이대근의 미소는 부성애의 체온을 되짚어보고 싶은 온화함 그 자체다.
2007년 4월 28일 토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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