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쉽게 말하자면 <눈부신 날에>는 어리다는 순수한 감수성에서 출발한 또 하나의 클리셰 덩어리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언급하자면 나쁘지 않은 수준의 동어반복은 볼만한 재방송감이라는 것. <눈부신 날에>는 닳고 닳은 소재와 감동을 추구하면서도 먹힐만한 물건이다. 준(서신애)이 토사물을 뱉어내고 땡볕아래 힘겹게 쓰러질 때, 결국 아이의 운명이 <눈부신 날에>의 약점이자 동시에 무기가 되리란 것은 극명하다. <눈부신 날에>의 부녀관계는 <파송송 계란탁>의 부자관계와도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약점이 무기가 되는 건 우종대와 준의 관계가 계약동거에서 부녀유친(父女有親)으로 발전되는 과정에 있다. 노골적인 목적을 품고 있어도 감성적으로 순수한 본질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덕분이다. 이는 전적으로 어린 아이의 순수한 기질이 관객의 소비를 부르는데 적합하며 서신애라는 어린 배우의 영특한 기질이 만들어내는 그릇의 크기 덕분이기도 하다. 또한 우종대라는 인물의 주변에 산재된 비루하고 참담한 인생사가 동정을 부르고 비극성을 심화시키며 동시에 부녀관계의 희극적 갈망을 대비시킨다.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 5천만 인구가 환호했으리라 믿었던 그 순간에 발견되는 타인의 비극을 통해서 희극적 분위기 안에서 심화되는 비극의 효과를 두드러지는 효과를 재확인시킨다. 또한 제목 그대로 우종대의 ‘눈부신 날에’를 완성시키는 아이의 희생은 닳고 닳은 죽음이란 클리셰에 일말의 참신함을 얹는다.
한편, <눈부신 날에>는 부녀관계의 긴밀한 발전만큼이나 받아들여지기 힘든 남녀의 감정적 발로를 보이기도 한다. 우종대에게 급작스럽게 나타나 준을 강요하는 하선영(예지원)의 모양새가 그렇다. 시종일관 우종대에게 근거모를 부성애를 강요하는 그녀의 존재는 부녀관계의 자연스러운 유대감을 강압하듯 관객에게 불편한 심기 그 자체가 된다. 또한 결과적으로 부녀의 연대가 한 여자의 오해 탓임을 드러나는 과정도 이야기적 반전을 위한 정서적 무시로 느껴진다. 또한 후반부 종대의 월드컵 응원씬도 어색함이 묻어나는 지점이다.
하지만 <눈부신 날에>는 크게 새로운 그릇이 아닐 바에야 지니고 있는 그릇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가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눈부신 날에>가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순수한 동심과의 연대다. 아이의 웃음이 기쁨을, 아이의 눈물이 슬픔을 이끌어내는 공식의 효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작품적인 성과는 아니라도 관객의 마음을 파고들 여지는 충분해보인다.
2007년 4월 16일 월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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