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이후 14년, 임권택 감독이 걸어왔던 필모그래피의 정점에 선 듯한 <천년학>은 그의 100번째 영화라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하지만 그 기념비를 굳이 전면에 세우지 않아도 <천년학>은 분명 주목받을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그것이 임권택 감독의 것이기 이전에 디지털 화질과 CG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오늘날의 영화들과 다른 옷매무새를 지닌 덕분이다.
<천년학>은 분명 어째서 임권택이 한국 영화에서 중심에 두고 회자되어야 하는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서편제>와 하나의 뿌리로 출발한 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천년학>은 <서편제>와 마찬가지로 이청준의 원작소설을 어미로 둔 새끼들이다. 하지만 93년에 생일을 맞이한 <서편제>와 달리 <천년학>이 늦둥이가 된 사연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학동 나그네’의 물이 마른 포구에 물이 차며 날아오르는 비상학을 스크린에 재현할만한 영상의 기술력의 발전을 기다렸음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서편제>가 한국의 민족적 정서, ‘한’을 끓어오르는 내지름으로 뿜어냈다면, <천년학>은 그 ‘한’을 내면의 깊이 안에 침전시키고 숙성시킨다. <서편제>가 <천년학>으로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그리고 그 긴 세월동안 때를 기다려 온 <천년학>은 아름답게 비상한다. 이것은 <서편제>를 위한 배우였던 오정해가 오랜 시간의 공백 끝에 다시 <천년학>의 페르소나로 돌아온 것과도 맥락이 비슷하다. <서편제>가 오정해라는 배우를 발굴했다면, <천년학>은 오정해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천년학>은 오래 묵은 것의 공력을 더없이 보여준다. ‘판소리’라는 전통적 산물이 단순히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케케묵은 이유로 보존해야 하는 박제 이상의 빛을 발하는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깊이의 내공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임권택 감독이라는 존재가 지닌 장인적 기질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영화의 절경이다. ‘우리의 것이 천대받는 시대’안에서도 소리를 유지하는 <천년학> 속의 인물들은 그들이 소리에 대한 의무감을 지니고 있기보단 그것을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는 내면의 정서 탓이다. 눈이 먼 송화(오정해)는 <서편제>의 그 송화이면서도 다른 송화다. 득음이라는 경지는 두 명의 소화가 지닌 공통의 이상향이지만 <서편제>의 송화와 <천년학>의 송화에게 그 의미는 다르다. <서편제>는 득음이라는 결과를 위해 ‘한(恨)’의 과정을 처절하게 끌어내지만 <천년학>은 득음을 달성이 아닌 방편으로 응시한다. 결국 <천년학>이 짊어지는 득음의 경지는 단지 소리의 문제가 아닌 인생이라는 전반적인 시야의 숙성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천년학>은 소리꾼의 이야기가 아닌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한 여성이 명창으로 빚어지는 처절하고 숭고한 과정에 대한 목도가 아닌 인간이라는 하나의 완성체가 숙성되는 과정에 대한 숙연한 고찰이다. 그리고 그 숙성을 돕는 효모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랑이다. 또한 <천년학>이 부르는 사랑가는 행위가 아닌 본질에 있다. 관계의 맺음 혹은 엇갈림이란 결과 대신 관계의 형성과 감정의 발현과 지속이 그 중심에 선다. 동호(조재현)와 송화가 감정을 확인하며 하나의 관계를 형성하는 결과적인 형태를 염두에 두기 보다는 그들의 감정이 어디서 출발해서 세월의 고개를 구비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도 어떻게 생존해 가는가를 주목한다.
<천년학>은 현실에서 한 차원 상승한 관념의 세계이며 무아의 경지다. ‘선학동 나그네’에서 여자의 소리에 말라붙은 포구에 물이 차고 비상학을 보게 되는 사내의 체험처럼 <천년학>은 무(無)의 경지에서 유(有)의 정서를 형성하고 초월의 신세계를 그려낸다. 한국적인 정서라는 점을 빌리지 않더라도 <천년학>은 오늘날의 세태 안에서 홀로 유일하다. 한국의 절경을 담아낸 카메라의 탁월한 포착과 선이 고운 이 토지에 대한 애정을 간과하더라도 <천년학>이 지니고 있는 선이 고운 심성을 폄하할 수는 없다. 거장이 빚은 거장다운 영화. <천년학>은 걸출한 재능의 기질만으로 결코 날아오를 수 없는, 세월의 연륜이 깊게 베어든 노장의 위대한 날갯짓이며 감정의 희노애락을 초월한 영혼의 울림이 담긴 선경(仙景) 그 자체다.
2007년 4월 10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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