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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학으로 날아오른 그녀, <천년학> 오정해!
여자로서, 배우로서, 소리꾼으로서 다시 한번 깨우침을 얻었어요. | 2007년 4월 14일 토요일 | 민용준 기자 이메일

<천년학>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거 같아요. 솔직히 첨에는 못 알아봤어요. (웃음)
그러게! 그래서 너무 억울해요! (웃음)

영화 때문에 일부로 다이어트도 했다던데.
초반에만. 영화 들어가기 전까지 오랫동안 쉬다 보니 살들이 편해졌는지 살이 많이 쪘었죠. 아줌마같이 마냥 늘어지게 살았더니. 그러다 영화 들어가면서 나름대로 준비를 한 셈이죠.

일단은 정말 오랜만의 출연작이잖아요. 제가 <서편제>를 봤던 게 굉장히 어릴 때였는데.
몇 살 때였죠?

진짜 어릴 때였어요.
몇 살 때였는데요~? (웃음)

너무 어려서 말하기 민망한데 집요하시긴! (웃음) 그때가 93년도니까 아마 11살이었던 듯.
어머나! 정말 어릴 때네. (웃음)

그 어린 녀석이 뭘 알고 봤겠어요. 그런데 <천년학>을 보니 그 당시 생각이 났어요. 좀 묘했죠. 그런데 소리가 전공인데 어떻게 연기를 하셨네요?
사실 어린 시절 꿈이 연기자였어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집에서 연기 흉내를 곧잘 내니까 어머니께서 무언가를 가르쳐보고 싶었나 봐요. 그런데 내가 태어나 살던 전라도 목포에 그 당시 연기 학원은 전무했었죠. 대신 쉽게 찾을 수 있는 무용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때가 6살 때였죠.

고전무용? 소리가 아니라?
예. 그런데 갑자기 무용학원 선생님이 이혼을 하셔서 학원이 없어졌어요. 황당하죠? (웃음) 그래서 다른 곳을 찾다 목포 시립 국악원을 알게 됐는데 그곳은 판소리, 가야금, 무용을 다 가르쳤어요. 그래서 그곳을 다니면서 세 가지를 다 배우게 됐죠.

전화위복이랄까. 종합예술인이 된 셈이네요! (웃음)
그렇죠. 어쨌든 그렇게 우연히 소리를 배워서 대회도 나가고, 결국 만전 김소희 선생님의 문하로 들어가서 소리가 전공이 돼버린 거죠. 어쨌든 모든 게 연기자의 꿈에서 출발했죠.

그럼 <서편제>는 꿈을 이룬 셈이네요. 그런데 어떻게 <서편제>에 출연을?
92년도에 미스 춘향 선발대회에 나갔는데 임 감독님께서 우연히 TV를 켰다가 날 보셨죠. 지금의 처제가 그 당시 내 친구였는데 자기 형부가 1인2역을 필요로 하는 연극이 있으니 해보라 해서 춘향 선발대회가 끝나고 그 연극에 출연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날 찾아서 연극을 보러 오셨고 그렇게 뵙게 되서 영화를 하게 됐죠. 그런데 사실 그때 임 감독님께선 <서편제>의 송화가 아니라 <태백산맥>의 소화를 찾고 있었어요.

<태백산맥>의 소화? <서편제>의 송화가 아니라?
원래 <태백산맥>의 소화로 날 염두에 두고 계셨는데 연극을 보시다가 제 소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 한 칸에 있던 <서편제>를 떠올리게 되셨죠. 그리고 그 때 나라에서 <태백산맥>의 제작을 막았어요. 그래서 <서편제>가 먼저 들어가게 됐고 난 송화가 됐죠.

<서편제>나 <천년학>은 임 감독님께서 만드신 거지만 한편으론 오정해씨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작품이에요. 마치 판소리로 치자면 오정해의 소리에 임 감독님께서 장단을 넣으셨다고 할까. 만약 <천년학>에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출연했다면 어땠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아닌 다른 소리꾼 후배가 해도 <천년학>은 충분히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국악도 중엔 소리 잘하고 얼굴도 예쁜 후배들이 많기도 하고. 내가 <서편제>에 출연했던 시대보다 요즘은 소리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단, 이게 단순히 소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죠. 바로 송화이기 때문에 내가 해야 했던 것 같아요. <천년학>의 송화에겐 성숙된 세월이 필요했어요. 사랑을 알아야하고 희생을 배워야 하고. 내가 아닌 남을 먼저 배려해 줄 수 있는 자기 자제. 이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분명 삶속에서 그런 과정을 겪어본 사람이 해야 되는 거죠.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셈이랄까. 그래서 아무래도 <서편제>의 송화였던 내가 <천년학>의 송화도 돼야 한다고 감독님께서 생각하셨나 봐요. 하지만 제 솔직한 마음은 임 감독님이 연출했기 때문에 제가 아니었다 해도 충분히 <천년학>은 가능했을 꺼라 생각해요.

처음 <서편제> 당시 연기에 대해 기본적으로 배운 건 없었잖아요. 물론 아까 말한 다른 분야의 공부가 연기에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카메라 앞에 선 연기자의 입장으로서의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일단 소리를 해서 복식 호흡이 되니까 대사하는 건 별로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송화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는 내 소리 공부과정을 많이 응용하니 어렵지 않았고. 한 가지 제일 어려웠던 건 카메라 앞에 섰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임 감독님덕분에 내가 카메라 앞에 섰다는 걸 인식 못하게 됐어요. 내가 카메라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 못하고, 그저 가방 들고 떠돌아다니는 송화로 생각하게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오정해라는 걸 잊어버렸었죠. 어느 순간, 촬영이 다 끝나고 생각하니까 내가 연기를 했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연기를 했다고 생각이 안 들게끔 최면에 걸린 것만 같았어요. 아무래도 그게 임 감독님의 힘인 것 같아. 만약 내가 카메라를 의식했다면 얼마나 어색하고 떨었겠어요. 신인연기자가 자기의 그 역량을 발휘한다는 건 힘들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잘 유도해주세요.

<서편제> 이후, <태백산맥>과 <축제>에도 출연했어요. 그런데 <천년학>까지의 공백이 길잖아요.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도 많고요.
많이 달라졌죠. 일단 영화 현장의 시스템들이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서편제> 땐 모니터라는 것도 없었고, 감독님 눈이 모니터였죠. 그런데 오랜만에 나오니까 모든 시스템들이 배우들에게 너무 너무 좋아진 시대가 됐더라고요.

요즘은 자신이 연기한 것도 바로바로 체크할 수 있죠.
네! 너~무 너~무 좋아졌어요. 현장에서 배우에 대한 대접도 예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에요. 물론 그 때도 많이 좋아졌다고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더 좋아졌어요. 일단 인터뷰하는 느낌들도 많이 틀려졌고. 사실 처음에는 많이 바뀌어서 낯설었죠. 우리 마지막 씬 찍는 날 현장 공개를 했잔하요. 그 날 많은 분들이 오셨고, 우리 홍보팀에서도 그런 사실을 미리 알려줬어요. 그런데 전 그냥 현장 스케치만 하는 줄 알고 복장도 별로 신경 안 썼죠. 저는 항상 튀지 않는 걸 좋아해서 우리 스텝들이 현장에서 입는 파카 같은 옷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전 그냥 그렇게 갔는데 그 자리에서 기자회견까지 할 줄 몰랐죠. 그 때 옷이 너무 초라해서 부끄러웠어요. 그런 것이 너무 낯설기도 했고. 또 맨 처음에 제작발표회할 때 웃지도 못했어요. 내 앞에 있는 저분들 눈에 내가 10년 전의 그 송화로 보일까 싶어서. 너무 편안해진 아줌마가 돼서 아직도 내가 배우로 보일까란 생각들 때문에 많이 부담스러웠죠.

연기는 어땠어요? 너무 오랜만이라 생소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맨 처음 <서편제>할 땐 아무 것도 모르니까 오히려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겁이 없기도 했고. 그리고 감독님이 유도한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도 있었죠. 하지만 <천년학>은 4번째 작품이라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오랜만에 해서 그런 것도 있고. 사실 그 가운데 마냥 쉬진 않고 나름대로 연기 활동을 했거든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혹시 뮤지컬 말인가요?
네. 뮤지컬과 무대를 통해서 나름대로 연기경험을 조금씩 많이 쌓았는데 오히려 그걸 버리는 게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임 감독님 영화는 배우가 연기에 대한 컨셉을 정해놓고 오면 힘들어져요. 마치 연기자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을 그대로 화면에 넣은 것 같은 자연스러움을 원하시기 때문에 인위적인 느낌은 절대로 안 되거든요.

임 감독님 영화는 가끔 영화적인 연출이 자제가 돼서 그게 너무나 현실적이라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워 보여요.
맞아요. 내츄럴하죠. 그래서 임 감독님 영화엔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 힘들어요. 그래서 오히려 신인은 풋풋하기 때문에 자연스런 감독님의 연출 컨셉에 더 맞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하니 힘든 건 공백 기간 동안 어설프게 쌓은 연기 경험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넘치는 거죠. 오버하고 있는 모습이 있었어요. 맨 첨에. 그걸 빼는 게 힘들었죠.

임 감독님 영화에 워낙 익숙하니까 그런 사실이 더 와닿았겠네요.
연기자들은 자기 역할에 대해 다양하게 연구하고 컨셉 정하고 이러잖아요. 그런데 그게 임 감독님 영화에선 오히려 해가 되요. 그냥 송화란 인물이 되기만 하면 돼요. 그래서 그 인물로 현장에 와서 감독님이 원하는 씬에 맞게끔 적절하게, 넘치지도 모자라지 않게 들어가고 나오면 되는 거죠. 그런데 너무 많이 준비를 해가지고 오면 그게 인위적으로 되요. 감독님 영화엔.
거기에 매달리게 되니까.
네. 그래서 저도 초반엔 ‘너, 대사가 아냐. 내추럴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많이 지적을 당했죠. 그리고 나중에 그걸 빼내고 나니 편해지고. 그래서 알겠더라고요. 연기 잘 하시는 분들이 감독님 영화에 오면 왜 힘들지. 어설프게 익힌 나도 힘든데 그분들은 아주 많이 힘들겠죠. 자기 걸 깨지 못하니까. 그런데 조재현씨 같은 경우는 첫 영화인데도 감독님의 그걸 너무 잘 따라가더라고요.

조재현 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일단 조재현씨는 국악인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북채를 잡았어요. 전문인이 보기에 어땠어요?
일단은 노력을 굉장히 많이 하시죠. 하지만 이론적으론 알아도 실전경험이 짧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잘 못하는 게 정답일 텐데, 이분은 집중력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에요. 시작 전까진 막 “내가 어떻게 해, 어떻게 해” 하면서 투덜거리다가 슛만 들어가면 그걸 마치 오랫동안 한 고수처럼 자세를 잡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너무 놀랐어요. 가르쳐주신 선생님이나 감독님도. 참 대단한 배우죠. 저런 면이 있으니까 조재현이란 이름을 갖는 거라 생각했고.

어떻게 보면 조재현 씨가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 어울려 보이는데 뒤늦게 출연한 감도 있어요.
우리 임 감독님은 “저 사람하곤 언젠가 해봐야지.” 하면서도 작품하고 맞지 않으면 안 하세요. 이미지가 좋은 사람을 알고 있어도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안 쓰시는 거죠. 그런데 이번에 감독님께서 조재현 씨가 어떤 것도 소화해내시는 모습에 반하신 거 같아요. 감독님께서 “다음에 또 한 번 하자”고 말씀하시는 것 보면.

임 감독님 영화만 4편에 출연했어요. 반면에 다른 감독의 영화에는 출연한 적이 없네요.
그러게요. 의도한 건 아니고, 처음에 <태백산맥>과 <서편제>는 감독님의 염두에 있었고. <축제>는 솔직히 의외였죠. <축제>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도 충분히 어울리는데 감독님께서 앞의 두 작품을 통해 저의 내면을 보신 것 같아요. 속마음을 들켰다고 할까. 제 바깥쪽의 한복 이미지, 한국적인 선에 가려진 배우로서의 욕심이. 어쨌든 <축제>에 출연했고 한참을 쉬었죠. 그동안 뮤지컬도 하고 결혼하고 아이엄마까지 되고 이런 저런 일하고. 사실 <천년학>은 임 감독님 스스로도 하시게 될 줄 몰랐던 영화잖아요. 그러니까 이 네 작품에 제가 출연하게 된 건 사실 저 자신도 알 수 없었던 일이었죠. 그런데 다른 분들이 감독님 외에는 영화를 하자고 안했느냐고 자주 물어요. 물론 있었죠. 하지만 그 역할들이 나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안 했던 거뿐이죠. 딱 보니 ‘이건 내 것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제가 아무리 영화가 하고 싶어도 제 것이 아닌 걸 하고 싶진 않아요. 물론 그게 한국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변신도 하고 싶죠. 또 연기자는 어떤 역할이든 매력을 느낀다면 미치광이가 되도 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근데 그냥 제 것이 아닌 거 같더라고요. 사실 이번에 외국 감독님한테 섭외가 들어오기도 했었는데.
외국 감독님이요?
네. 그런데 그게 참 맘에 들었었거든요.

어떤 감독님이신지 물어도 될까요?
음..알아도 모른다고 할래요. (웃음) 어쨌든 그게 공교롭게 <천년학>과 같은 시기였던 거죠. 그런데 전 당연히 <천년학>을 했죠. 우리 임 감독님이 제겐 더 중요하니까!

본인한테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럼요. 요즘은 배우들이 여러 가지 일을 함께 많이 하기도 하는데 저는 능력이 안 돼서 한가지씩밖에 못 해요.

그만큼 집중을 하는 거겠죠.
맞아요. 저는 하나에 빠지면 그 하나 밖에 몰라요.

<서편제>는 <서편제>를 위한 오정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천년학>은 오정해라서 <천년학>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임 감독님께서 <천년학>을 결정하시곤 분명 오정해 씨한테 하자고 연락 주셨겠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땠어요?
감독님께 그 말을 듣고 처음엔 일단 깜짝 놀랐고, 둘째론 “내가 괜히 해서 영화 망치면 어떡하나” 싶었어요. 그리고 임 감독님은 영화를 ‘하자, 안하자’가 아니에요. 일단 “천년학을 한다. 이번에. (네가 출연한) 첫 번째 이야기들(<서편제>) 가운데서 할 거니까 살 좀 빼라.’ (웃음) 이게 섭외였어요. ‘지금 상태로는 안 된다.’ 하셔서 그냥 바로 ‘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이었군요. (웃음)
감독님은 항상 저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세요. ‘할래? 안할래?’가 아니라, ‘해라!’ 이렇게. 왜냐면 감독님도 저를 잘 알고, 저도 감독님이 아버지 같기 때문에, 뭐 그런 건 전혀 안 이상해요.

<축제>이후에도 임권택 감독님과는 꾸준히 연락하셨겠죠?
그럼요. 그건 당연하죠. 감독님께서 좋은 상 받으시면 가서 축하해드리고, 영화 현장에 아이도 데려가 구경시켜주고 감독님 뵙고 오고. 저한텐 아버지 같은 존재니까. 물론 감독님께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솔직히 제가 잘 보여서 뭐하겠어요. 세 작품이나 했는데~. 그리고 임 감독님 영화에 또 나오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 했고. 그냥 저한텐 소중한 인연이니까요.

<서편제>와 <천년학>은 형제 같은 작품이잖아요. 그리고 <서편제>나 <천년학>은 임권택이란 영화계의 장인이 빚어낸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판소리로 치자면 소리꾼이 절창할 수 있는 장기 같은 곡이랄까. <천년학>에서 송만석 선생님의 ‘적벽가’처럼. 그런데 오정해 씨는 두 영화에 모두 출연했죠. <천년학>은 임권택 감독님의 100번째 영화이기도 했고. 마치 임 감독님과 오정해 씨는 송화와 동호처럼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까요?
그냥 평범한 인연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감독님이 사적으로 제가 예뻐서 저를 쓰신 건 아니고, 그 작품에 어울리는 여배우가 저라고 생각하셨겠죠. 사실 제가 맨 처음 감독님을 뵐 때 ‘거장 임권택’ 이런 느낌으로 접근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너무 평범하고 평탄하고, 그냥 뭐랄까. 아주 편안한 아저씨. 그 땐 아저씨였었어요. 지금은 할아버지지만. (웃음) 그런 느낌이었어요. 저는 영화를 했던 사람이 아니니까. 일반 관객들처럼 ‘임권택 감독님은 영화를 제일 잘 찍으시는 분’, 이 정도 상식밖에 모르고 봬서 그런지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죠. 현장에서도 감독님께선 ‘정해야, 이번에는 뭐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하시면 ‘예!’하고 대답하고, 이런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14년 이상이 지나니까 감독님은 저를 딸 같다고 하시고, 저도 임 감독님이 아버지 같다고 해요.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친근한 사이를 떠나서 감독님으로써 현장에선 뵙는 느낌은 또 다를 법한데요?
‘카리스마’란 말은 아무데나 붙이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현장에서 몰입하시는 모습을 보면 연세를 가늠할 수가 없어요. 정말 ‘카리스마’가 넘치시죠. 또 하나는 배우에 대한 판단이 빠르세요. 스텝들에 대한 판단도 빠르지만, 이 배우의 한계가 보일 땐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으세요. 예를 들어 감독님의 기대만큼 배우가 못 따라갈 때, 그걸 억지로 막 밀어붙이면 배우한테도 무리가 가고 현장 자체의 분위기에 금이 가죠. 그래서 그 배우의 역량에 맞게 바꿔서 현장 콘티를 만드시죠. 배우들도 무리 없고, 씬에도 무리 없게. 그렇게 현장 콘티가 탄생하죠. 선장 혹은 지휘자처럼 임 감독님께서는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눈에 띠는 부담으로 조율하는 게 아니라 현장의 느낌을, 스텝 한 명까지도 다 유심히 파악을 하세요. 그래서 그 날 컨디션이 아니다 싶으면 무리하게 진행을 절대로 안하시죠. 그리고 괜찮은 날은 최대한 밀고 나가고. 그 역할을 정확하게 하시는 분이세요.

일단 <서편제>에서도 그렇고 <천년학>에서도 맹인연기를 하셨어요. 맹인 연기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처음, <서편제> 때는 잘 몰랐어요. 힘든 건지도. 연기라는 걸 전혀 몰랐으니까. 그런데 이번 <천년학>에서 느낀 건, 배우에게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니까 안타까웠죠. 부자연스럽고 많이 불편하고, 한계가 있잖아요. 또 사랑하는 마음을 은연중에 표현해내야 하는 역할이잖아요. 거기다 또 소리도 해야 되고. 그나마 이제 연기를 조금 알았다고 <서편제> 때보단 욕심은 더 나니까 이게 한계에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어요. 보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사실 하는 입장은 아주 많이 힘들죠. 무엇보다 조재현 씨처럼 눈빛을 활용한 그런 연기가 부럽고 그랬어요. 연기에 대한 욕심이 생기니까 나도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서편제>도 그랬지만 <천년학>에서도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나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들이 많이 등장하죠. 그런데 관객들의 눈엔 마냥 아름다워도 만드는 당사자들의 노고는 상당했겠죠? 이동도 많았을 것 같고. 본인은 어땠어요?
힘들지 않았어요. 본인도 기자분이 느끼시는 것과 똑같은 걸 느꼈어요. 촬영을 위해 그곳에 머물며 늘 보다가도 세팅을 하고 촬영을 한 뒤 모니터할 때, ‘아, 여기가 이랬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풍경이 그려져요. 그런데 실제로 그곳들을 찾아가보면 실망하실 지도 몰라요. 영화는 정말 빛의 예술인 것 같아요. 빛에 따라 카메라에 빚어지는 앵글이 정말 틀려지거든요. 그니까 영화 속 현장을 실제로 찾아가서 그 영화의 느낌을 찾으시면 대부분 실망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극 중 산자락에서 ‘갈까부다’란 노래하는 장면 기억나세요?

물론이죠. 동호를 옆에 두고 부르는 장면.
거기가 임 감독님께서 그 근처에서 촬영을 하며 여러 번 지나다니던 길이었는데 사실 감독님께선 그 장소를 염두에 두시지도 않았었거든요. 그러다 그곳에 딱 빛이 떨어지는 순간에 거길 보는데 원하시던 영화의 느낌이 오셨나봐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내려서 세팅을 하고 부랴부랴 준비를 해서 찍은 거였어요.

장소 선택은 역시 감독님께서 하시겠죠?
예. 감독님께서 하세요. 직접.

혹시 여행 좋아하세요?
그럼요. 아주 좋아해요.

여행 다니는 듯 해서 좋았겠어요. 영화 찍으면서.
저는 여행을 했어요. 영화를 통해서. 주부가 여행을 하긴 참 어려워요. 더군다나 여자라는 특성상 한계도 있잖아요. 그런데 영화를 핑계 삼아서 안전하게 했죠. 다른 기자 분들이 아이를 떼어놓고 가족을 떠나서 힘들지 않았냐고 많이 물으시는데 사실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너무 즐거웠어요. 짐을 싸고 떠난다는 기분부터가. 그리고 현장에서 우리 스텝들하고 어울리는 그 시간들도 너무 좋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그 느낌도 좋았고, 무엇보다 영화를 찍는 동안 지방에서 혼자 방을 쓰니까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너무 좋았죠. 물론 아이가 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굉장히 즐거운 여행이었어요.

<천년학>은 오정해 씨 자신 스스로를 찾는 계기이자 시간이었군요.
맞아요. 그동안 너무 편해서 게으르게 안주하고 있다가 정신이 딱 드는 거 있잖아요. 내가 아직 한 게 없는데 너무 안주하고 있었다는 생각. 그냥 ‘나는 애 엄마니까’ 이런 생각이 저를 너무 편안하게 만든 거죠. 그런데 영화를 위해 준비하며 나를 다시 가꾸는 과정에서 ‘맞아, 나도 여자였지.’이랬어요. 보통 아줌마들은 여자란 생각을 잊고 살잖아요.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저도 그랬던 거죠. 그런데 ‘아니야, 나도 여잔데. 내가 잊고 있었구나.’싶은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천년학>은 제게 여자로써도, 배우로써도, 소리꾼으로써도 다시 한 번 깨우침을 준 작품이에요.

임 감독님만큼이나 오정해 씨한테도 큰 의미가 되었네요. 감독님한테 감사드려야 겠는걸요.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감사드린다하면 혼나요. “내가 널 위해서 만든 줄 아니!” 이렇게. (웃음)

일단은 극에서 송화가 눈이 멀게 되는 사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잖아요. 영화 속 풍문처럼 송화를 명창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버지가 일부로 눈멀게 하는 약을 탔다는 의견도 있고 실수로 우연히 그렇게 된 거라고도 하잖아요. <천년학>은 그것이 명확히 어느 쪽이다고 말해주진 않아요. 본인 생각은 어때요?
눈을 멀게 한 것이 인위적이란 생각을 <천년학>에서는 안 했어요. <서편제>에서는 그런 암시를 강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이번 <천년학>에선 아비의 마음을 드러내는 대사도 있잖아요. ‘어느 아비가 그랬겠냐고’ 전 그 말을 믿고 싶어요.

그 국밥집 씬.
예. 맞아요.

소리꾼으로서 득음을 한다는 건 단순히 기술적 발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의 경지라고 생각해요. 그럼 그런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그만큼의 계기가 필요할 수 있겠죠. <서편제>나 <천년학>에서 시력을 잃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그리고 전승자로서 계승의 욕심을 위해 그런 계기를 위해 고의로 눈을 멀게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관계에 대한 이해 구조가 달라질 것 같은데, 딸과 아버지의 관계와 전승자와 계승자에 대한 관계로. 어쨌든 그런 전통문화라는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버지가 아닌 전승자로서 유봉의 입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람이 어떤 일에 미치면 광기가 난다고 하죠. 서양의 어느 화가처럼 귀를 자를 정도로. 그렇게 한 분야에 미치면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까 내가 이렇게 힘들게 공부한 과정을 아이에게 반복시키고 싶진 않더라고요. 부모의 진짜 마음은 그래요. 자기 자식이 아버지나 어머니 가는 길을 간다고 하면 반대하고 싶은 게 부모마음이랄까. 저희 만전 김소희 선생님께서도 따님이 소리하는 걸 반대하셨어요. 반대라기 보단 모른 척하셨죠. 왜냐면 힘들단 걸아니까. 그 과정이. 그런데 그것이 좋아서 그것에 미쳐서 평생을 가는 사람이니까 아까워서라도 이 맥을 이어주는 게 내 자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어느 하나에 미친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선생님이 제자한테 갖는 광기는 분명 있어요. 제 스승님은 자식보다도 제자를 사랑하셨어요. 왜냐면 자기가 이 소리를 너무 좋아하셨고, 좋아하는 소리의 맥을 이을 당신의 제자가 소리를 제대로 이어갈 수 있도록 완벽하게 가르치고 싶으셔서 그 제자를 놓지 않고 있는 모습이 광기 자체죠. 그러다보니 오히려 자식을 챙겨줄, 간섭조차 할 시간이 없었어요. 제자한테 그렇게 쏟는 사람이라. 그래서 오죽하면 자식이 ‘엄마는 자식보다 제자를 더 사랑한다고.’ 할 정도로. 그런 광기, 그런 모습을 제가 봤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충분히 이해가 되요. 내가 이렇게 다른 아이들을 레슨을 시켜보니까 가르치는 마음이 자식이상이에요. 그 애정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 소리는 가르칠 수가 없어요. 악보를 놓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가르치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제자의 행동거지가 맘에 안 들면 소리를 가르치기 이전에 인간을 만들어놔야 해요. 그 과정에서 내 자식처럼 잘못한 거 야단치고 잘한 건 칭찬도 해줘야 되고, 그리고 그런 후, 그 안에 소리를 심어주는 거에요.

마치 그릇을 만드는 것 같네요.
일반 서양 음악 레슨과는 과정이 많이 달라요. 그런데 받는 제자의 입장에서는 그게 얼마나 혹독하겠어요. 그게 한이 되는 거죠.

<천년학>에서도 등장하는 말처럼 우리 것이 천대받는 시대에요. 물론 천대까진 아니라 해도 우리 것이 많이 간과되고 잊히고 있어요. 그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분으로서 후대에 대한 강압을 해선 안 되지만 그것이 끊겨갈 위기라 생각하면 안타까울 것 같아요.
이젠 대중이나 청중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가야 되요. 그런데 전통의 소리를 젊은 층에게 권하기엔, 젊은 세대가 서양 문물에 젖어있는 정도가 심하기 때문에 그건 강요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마치 숙제처럼.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 음악이 당시 유행하던 유행가란 말이에요. 인기가 있던. 물론 그걸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전통을 뜯어 고치자는 것은 아니에요. 전통은 전통대로 고수하는 분이 계셔야죠. 그리고 그걸 제대로 익힌 다음에 퓨전이나 크로스오버적인 작업을 통해 대중들한테 가까이 가는 거예요. 그렇게 관심을 유발시킨 다음에 그 청중들을 다시 전통으로 안내하는 거죠. 그럼 전통도 고수하면서 동시에 관객들의 외면을 관심으로 돌릴 수 있고. 그런 역할에 <서편제>나 <천년학>같은 영화 이상이 없죠. 과거 <서편제>를 통해서 우리 국악이 한번 부흥을 하기도 했었고요.


저도 솔직히 요즘 사람이다 보니 우리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적도 별로 없고 관심 가져본 적도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천년학>을 보니까 우리 음악이 꽤 맛있더라고요. 그 구성진 가락부터 구슬픈 음율까지. ‘아, 이런 맛이 있구나!’ 싶었죠. 물론 그래서 한편으론 ‘내가 많이 늙었나?’ 생각을 하기도. (웃음)
늙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닐걸요? (웃음) 그런 느낌은 젊은 마니아 분들도 많이 느껴요. 그런데 단지 그렇게 소리에 머무를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을 뿐이죠. 우리 소리나, 우리 <천년학>도 같은 느낌이에요. 이 소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만 준다면, 이렇게 들을 수 있게끔 여유만 준다면 충분히 우리 소리를 좋아할 수 있고 <천년학>에 빠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바삐 바삐 가고 신나거나 달콤한, 감각적인 것에 길들여진 요즘 세대가 일부로 그 늦은 장단을 찾아서 들을 리는 없잖아요. 근데 영화란 매체를 통해 소리를 전달받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죠. <천년학>을 보고 ‘어머, 이것이 소리였던가?’ 하시는 분도 계시고요.

이렇게 우리 것이 소외받고 서양의 것이 주류가 된 시점에서 우리 것이 낯설다보니 오히려 보편화된 서양의 것에 비해 우리의 것이 새로운 신선함이 될 수도 있어요. 마치 틈새시장을 공략하듯. <천년학>은 충분히 그런 역할이 될 법하고. 그런 면에서 <천년학>같은 영화는 전통 문화를 고수하시는 분들에게 힘이 될 만한 사례 아닐까요?
맞아요. 저희가 바라는 게 두 가지에요. 항상. 이 영화가 잘 된다면 우리 소리도 잘되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그니까 소리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두 가지를 다 함께 기대해요.

그럼 주변에 교류하시는 소리인들의 반응이 의식되진 않으세요?
사실 이번 <천년학>에서 소리가 참 많은데 그리 많다고 안 느껴지실 거예요. 그것은 소리가 씬과 씬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죠. 백미가 될 만한 좋은 소리들만 골라서 느닷없이 끼워 넣은 게 아니라 그 씬에 필요한 가사나 내용이 있는 노래로 다리를 살짝 살짝 얹어가서 소리는 굉장히 많은데 그렇게 막 부담스럽지는 않단 말이죠. 다행히 <천년학>의 송화는 소리를 아주 절창(絶唱)하는 입장이 아니기도 하고요. <서편제>에선 그게 아니었잖아요. 맨 마지막에 득음의 소리를 들려줘야 했기 때문에 제 능력 밖의 일이라 안숙선 명창소리를 립씽크해야 했지만 이번엔 송화의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소리였잖아요. 그게 뭐 제가 소리가 많이 늘고 높은 경지에 올라서 그랬다는 게 아니라, <서편제>와 달리 <천년학>은 소리의 득음이 아닌 사랑의 이야기니까. 그리고 제가 아닌 다른 사람소리를 쓰면 어색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국악하시는 분들 중, ‘아이구, 저보다 더 소리를 잘했으면.’하시는 마니아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런데 신영희 선생님께서 <천년학>을 보셨어요. 그래서 ‘선생님 괜찮겠어요. 제 소리로도.’하고 여쭈니까 “충분히 괜찮다. 네 역할과 그 영화의 이미지에 맞게끔 소리를 적절히 냈기 때문에 소리의 감이 좋다.”고 격려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다소 안심을 했죠. 사실 우리 음악하시는 분들이 욕심이 생길 거라 그 부분이 걱정스러웠죠. 영화를 통해 안숙선 명창이나 신명희 명창같은 분들의 절창한 소리를 들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까봐. 그런데 그런 대가가 오셔서 격려를 해주시니 마음이 놓였어요.

영화를 단순히 느낌으로 표현해보자면, <서편제>는 마치 피를 토하는 심정, 날이 선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천년학>은 무언가를 끌어안고 품고, 몸이 상승해 오르는 둥근 느낌이었거든요.
그 당시에 CG가 발달이 돼서 <서편제>가 ‘선학동 나그네’, 즉 <천년학>까지 품었다면 그 당시 관객들에겐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영화가 시대에 너무 앞서가도 관객에게 외면당하고 그 시대에 맞게 같이 잘 걸어가야 되는 거 같아요. 일단 작품성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성을 살려줄 흥행성을 살핀다면. 임 감독님께서 지금에 와서 <천년학>을 말씀하시는 게 너무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감독님의 100번째라는 작품이라는 점에도 너무나 걸맞은 수준 높은 작품이고. <천년학>은 정말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영화기 때문에, 출연한 배우인데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느낌이 매번 달라지는 것 같아요. 느낌이 단순히 이거다고 할 수가 없어요. 오히려 <서편제>는 아까 말씀하신대로 날이 서 있어서 어느 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천년학>은 제가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이야기할 때마다 영화를 생각하면 또 틀려요. 어느 한 방향으로 이야기할 수 없게 통틀어서 어우러진 이야기가 되요. 이 시대에 나와야 할, 감독님의 연세나 작품 수나, 너무나 딱 맞는 작품인거 같아요. 100번째에 걸맞은 작품.

뮤지컬에도 출연하시고 강단에도 섰지만 그 이전에 가정주부의 삶에 충실했죠. 그런데 다시 영화에 출연한다하면 집안의 도움도 컸겠죠? 남편분의 이해도 필요했을 테고.
그렇죠. 절대적이었죠. 그게 없다면 제가 할 수 없었죠. 시어머님께선 항상 ‘네가 할 수 있을 때 안하는 건 죄다. 네가 그렇게 열심히 익혀놓고 그걸 써먹거나 풀지 않고 갖고만 있는 것도 죄다. 네 모든 걸 활용해서 알리고 그걸 사람들한테 사랑받게 하는 건 얼마든지 좋은 일이니까.’ 라고 하셨거든요. 애 아빠도 반대할 때 이유는 하나에요. 내가 힘들어하는 건 하지 말라고. “당신이 해서 즐거움 찾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해라. 그럼 언제든지 뭘 하든지 이해해주겠다.” 제가 이렇게 영화를 다시 할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죠. 그리고 우리 시댁 식구들. 제일 먼저 영화 시사도 해주시고, 우리 어머님이 직접 오시면 부담스러울 까봐 스텝들 회식이라도 시켜주라고 용돈을 주시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시집은 잘 갔죠? (웃음)

그런 것 같아요. 아드님이 올해 몇 살이죠?
11살.

아! 제가 딱 <서편제> 본 나이네요. (웃음)
네. 그래서 아까 11살이랄 때 깜짝 놀랐어요.

아~, 그랬군요. 혹시 아이가 혹시 노래 쪽에 흥미가 있다거나.
아주 많아요. <천년학>에서 그 ‘꿈이로다’라는 노래 있잖아요. 꿈타령.

아. 그 노래 기억나요.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라 노래까지 또렷이 기억나네요.
엊그제 밤에 잠자면서 그 노래를 가르쳐줬어요. 영화보고 와서 하도 흉내를 내기에 이왕 흉내 낼 거면 제대로 배우라고. 그런데 그게 굉장히 어려운 노래에요. 그런데 밤 12시에 잠자면서 드러누워서 영화 속 장면처럼 가르쳤어요. (웃음) 그런데 웬걸! 금방 따라하지 않겠어요. 원래 애들이 모방을 잘해서 빨리 배우긴 해요. 그런데 음악적인 감각이 있긴 해요. 피아노도 잘 치고.

그럼 욕심이 좀 나실 법도 한데요?
전 안 내려고요. 아까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부모의 마음이니까. 그리고 음악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예민할 수밖에 없어요. 전 남자아이가 그렇게 크는 게 싫어요. 그냥 털털하고 편안한 게 좋은데 음악을 하면 자꾸 예민해지니까요. 안 했으면 좋겠다는 게 진짜 제 마음이죠. 그런데 애 아빠는 막 그런 반응이 있을 때마다 너무 좋아해요. 소질 있는 거 자꾸 개발시키려 그러고 저는 막 묻어두려고 하고. (웃음) 뭐 어쩔 수 없는 것 같더라고요. 피는.

혹시 아이가 원한다면.
뭐 원한다면 반대 안 해요. 자기 인생이니까. 철저하게. 저는 아이가 원하는 건 반대 안 해요. 그러니까 강요도 절대 안 해요.

적극적이진 않더라도 지원해주실 의향은 있겠죠?
글쎄요. 크게 지원할 생각도 없어요. 스스로 알아서 해야죠. 왜냐면 어렵게 얻어야 그걸 안 놓죠. 부모가 쉽게 제 손에 쥐어주면 쉽게 놔버리는 법이에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으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하겠다는 그 마음이 변치 않아야 끝까지 가거든요. 고생 없이 편하게 쥐어주면 절대로 안 돼요. 저부터도 쉽지 않게 배웠기 때문에 권하지 않아요. 스스로 필요하면 자기가 알아서 찾아가겠죠.

아이는 <천년학>을 재미있게 보던가요?
보고 와서 ‘넌 이해가 되니?’ 했더니 이해가 안 된다 하더라고요. 그리고 영화 속의 송화가 엄마로 보이니 탓도 있을 테고. 그래서 아까 11살 때 (<서편제>를) 보셨는데도 그런 느낌을 기억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우리 아이도 11살인데.

아. 기억한다기 보단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말하지만 그 어린 것이 뭘 알고 봤겠어요. (웃음)
어쨌든 제가 ‘어떻던? 이해가 되니?’ 하고 물으니까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하더라고요. 사실 아이가 영화를 좋아해요. 굉장히. 요즘은 엄마보다도 영화를 많이 봐요. 그래서 저는 솔직히 기대를 많이 했죠. 어떻게 반응을 할까싶어서. 그런데 우리 영화가 주는 중요 장면들은 거의 다 기억을 해요. 그건 인상에 남았던 거죠. 그런데 전체 스토리를 이해하기에 11살은 너무 버거웠나 봐요.

양방언 씨는 만났죠?
네. 봤죠. <천년학> 시사회때.

일단 장르가 다르지만 음악이라는 공통적인 뿌리로 본다면 통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또 양방언 씨의 음악이 동양적, 특히 한국적인 느낌이 담겨 있잖아요. 이번 <천년학>의 영화 음악을 들어봐도 그렇고.
제가 양방언 씨를 처음 안 건 2000년도에요. 제가 진행하던 라디오 ‘FM 풍류’의 시그널 음악이 양방언 씨의 ‘prince of cheju’, 제주의 왕자라는 곡이었거든요. 이분의 아버지가 제주도 사람이고 어머니가 신해주 사람인데 본인은 일본에서 태어났어요. 그 음악이 너무 좋더라고요. 근데 마침 음반 홍보차 방한해서 우리 프로에 출연했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앨범을 제대로 들어보니까 음악이 너무 좋았어요. 사실 국악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음악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우리 악기의 특성상 조심스런 부분도 많고. 그런데 이분은 그걸 잘 모르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들리는 대로 음악을 편하게 만들어서 너무 좋았어요. 감독님도 저랑 같은 느낌으로 양방언씨를 선택했죠. 우리 악기와 서양악기의 협연을 했는데 부담스러움이 전혀 없어요. 너무 매끄럽게 음을 진열하는 거예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6년간 라디오 진행하면서 많은 국악 작곡가들의 퓨전 된, 크로스 오버된 곡을 접했는데 이분 곡처럼 자연스런 곡은 처음 봤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 음악의 팬이 되었고 임 감독님께 자연스럽게 소개해 드릴 수 있었죠.

아, 오정해 씨가 임 감독님께 양방언 씨를 소개해 주셨군요.
예. 소개는 제가 해드렸죠. 왜냐면 양방언 씨라는 존재를 임 감독님은 모르셨고. 그런데 사실 처음 임 감독님께 소개해 드렸을 땐 <천년학> 때가 아니라 <취화선> 때였어요. 예전에 임 감독님께서 “국악 작곡가 중, 좋은 사람 없냐?”고 물으셔서 다른 작곡가들과 함께 양방언 씨를 추천했죠. 저는 그때 양방언 씨의 음악에 심취돼 있었고. 그렇게 소개해드렸는데 감독님께선 ‘누구? 재일교포? 내 영화에 무슨 재일교포야.’이러시면서 아예 거부하시더라고요. 그러다가 제 차에 양방언 씨 음반이 있어서 임 감독님을 차에 태워드릴 때마다 주로 들려드렸죠. 음악을 들어보시더니 누구냐고 막 물어보시길래 ‘아니, 잘 모르겠는데. 더 들어보세요.’ 막 이러면서. (웃음) 그렇게 들어보시게 하고 “음악 좋지 않으세요?” 하고 여쭈니까 “좋다. 누구냐?”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감독님께서 그때 거부하셨던 재일교포 양방언 씨입니다.”라고 하니 깜짝 놀라시는 거에요. 그래서 “이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 있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하고 또 여쭈었고 가셨죠. 근데 공연을 보고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공연 후, 감독님이 직접 양방언 씨에게 가서 영화 음악을 부탁하셨죠. 그렇게 된 거 에요.

양방언씨는 이 사실을 아나요?
그럼요. 다 알죠. 임권택 감독님을 개인적으로 많이 좋아하셨어요. 근데 영화음악을 하면서 현장에 그렇게 많이 온 음악감독도 없을 거예요. 진짜 많이 왔어요. 와서 며칠 동안 보고가고. 왜냐하면 <천년학>이라는 작품도 모르겠고,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아야겠다 싶어서 그랬다 하더라고요. 현장에서 분위기 보고 가고, 자기가 스텝인양 도와주기도 하고, 제주도에서 촬영할 땐 한국식으로 떡도 싸와서 스텝들한테 나눠주기도 하고. 그래서 금방 스텝들이랑 어울렸죠. 감독님한테도 끊임없이 여쭤보고. 그렇게 해서 만든 음악이라선지 심연으로 충분히 와 닿죠. 너무너무 감독님도 흡족해하시고.

잘은 모르지만 우리의 정서가 느껴졌어요. 웅장하지만 소박한, <천년학>의 너그러운 느낌이 많이 묻어났어요. 저도 좋았어요.
예. 맞아요. 정말 좋죠? 정말 너무 음악이 좋아요.

아마 <천년학> 때문에 외국도 좀 나가실 것 같아요. 좀 앞으로 바빠지실 텐데, 아마 아드님도 보고 싶어지겠어요. 하지만 이젠 진짜 해외로 여행가시겠네요. (웃음)
물론 공과 사는 철저하게 분리해야 하니까 상관없는데 바람이 있다면 <천년학>이 외국에서 큰 상을 받지 않아도, 물론 받으면 좋겠지만 그것보단 이 영화가 세계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왜냐면 우리나라를 알리는데 너무 좋은 영화잖아요.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던가, 우리 옷도, 소리도 있고, 그래서 우리나라를 알리는데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이 없잖아요. 단기간에 어떤 사람 일부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 그리고 제가 그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어디든 가고 싶어요. 욕심 같아선 돈 안 받고도 막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제작사가 싫어하겠지만. (웃음)


<천년학>은 <서편제>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큰 선물이 될 거에요.
한편으로 어쩌면 <서편제>의 찡한 느낌을 미리 품고 오시는 분들에겐 실망스러울 수도 있어요. <서편제>의 남매가 밤샘을 하며 서로 울고불고 했던 그런 아픔을 간직하고 또 그걸 바라신다면 ‘왜 그런 장면이 없지?’하고 그럴수 있잖아요. 어르신들은. <천년학>은 머무는 영화가 아니라 훌훌 털어내고 정화시키고 승화되는 이야기에요. 단순하게 <서편제>가 좋았다면 그걸 만드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란 것만 알고 그렇게 오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하나하나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영화가 안내하는 길로만 쭉 따라가시다 보면 수준 높은 감동을 만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동시에 <천년학>같은 영화는 요즘 젊은 관객들에게 생소할 수도 있어요. 그런 젊은 관객들이 <천년학>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은?
<서편제>도 그랬어요. <서편제>도 ‘과연 이 영화를 젊은 관객이 좋아할까?’ 했죠. 근데 결국은 그 당시, 우리나라의 대부분이 이 영화를 봤어요. 물론 그 이유가 마치 이 영화를 안 봐서는 안 될 것처럼 애국심을 발휘하게 만드는 점도 있었죠. 하지만 한편으론 내 부모님을 보여드리기 위해 젊은 사람이 부모님들 손을 잡고 같이 보게 되다가 <천년학>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 수도 있겠죠. 저도 <서편제> 당시 젊었는데 그 영화가 너무 좋았었고. <천년학>도 그러지 않을까요. 나이를 떠나서, 지극히 한국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내 가슴에, 내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래 우리 거잖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젊은 사람도 부모님의 눈빛을 대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서편제>때와 비슷한 말인데 영화관에 올 때까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영화가 좋으니까 극장에 와서 볼 수만 있다면 좋은데. <서편제>때도 그랬어요. 극장에 앉아서 보기만 하면 사람들이 분명 나쁘다고 욕할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기까지가 힘들 수 있겠다는. 그때랑 많이 비슷해요. 10년이 넘었는데도.

오랜만에 연기를 다시 하셨지만, 잘 모르겠어요. <천년학> 때문에 나오시긴 했지만 다시 연기를 활발히 할 의사가 있는지는. 물론 임권택 감독님이 부르신다면 또 하실 것 같아요. (웃음)
제가 연기적 특성상 다른 배우들과 차별되는 면은 있죠. 순수 연기인도 아니고. 만약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역할이라면 얼마든지 임권택 감독님이 아니라도 출연할 의사는 있어요. 어쩌면 이젠 임권택 감독님과 멀리 떨어져야 할 것 같아요. 자꾸 저를 통해 감독님이 언급되니까 감독님한테 불편 끼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부로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제가 할만한 역을 준다면 그게 누구 감독님이라도 할 거고. 만약 정말 또 임 감독님과 하게 된다면 그것도 제가 할만한 역일 테니 하겠죠. 그런데 솔직히 그럴 일은 없겠죠. 설마~! 네 번이나 했는데? (웃음)

대가의 경지에 오른 소리꾼들을 많이 보셨잖아요. 스승님이신 만전 김소희 선생님부터가 그러셨고. 그런데 제가 봤을 때 영화에서 득음을 했다는 경지의 사람을 꼽으라면 임권택 감독님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처음부터 계속 하고 있어. 깜짝 깜짝 놀라게!(웃음) 맞아요! 그 경지에요. 그걸 제가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솔직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걸요? 임권택 감독님께서 100번째 작품을 만드셨지만 이제 또 101번째, 102번째 작품을 만드실 거예요. 그런 분을 가까이서 모시는 한사람으로서 감독님에 대한 개인적 바람이 있나요?
저는 이번 <천년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우리 감독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편안히 작품에 몰입할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어떤 부담도 드리지 않고, 편안하게. 우리의 세계적인 감독님이 어떤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고 원하시는 작품을 하실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어요.

100번째 작품이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것도 같아요.
솔직히 100번째 작품, 100번째 작품, 우리가 스스로 말하기도 부담스럽잖아요. 당신은 얼마나 버겁겠어요. 한편으론 마치 이 영화를 끝으로 돌아가시라고 하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어요. 제가 옆에서 느끼기도 그래요. 근데 감독님은 돌아가실 때 까지 현장에 계시고 싶은 분이세요. 근데 마치 밖으로 내모는 것 같고. 그래서 그런 100번째라는 숫자로서의 의미보단 이제 다시 첫 번째란 느낌으로 시작할 수 있게. 그런데 <천년학>이 사랑받지 못한다면 감독님께서 그 힘을 어디서 받겠어요. 감독님의 작품이 관객들의 이해를 필요로 하고, 그 이해가 사랑으로 되어야만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껏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천년학>에서 대사 중 ‘소리에도 길이 있다’고 하잖아요. 오정해 씨도 길이 있겠죠. 본인은 그 길의 어느 정도 오셨다고 생각하세요.
10분의 1?

그럼 나머지 10분의 9는 무엇으로 채우고 싶으세요?
그건 앞서서 간다고 채워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제 나이에 자연스러운 템포대로 계속 꾸준히 가야돼요. 내가 막 지금 빨리 채워 넣는다고 채워지는 게 아니고. <서편제>때와 <천년학>때와 소리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제가 막 공력이 엄청나게 좋아져서가 아니라 소리도 나이가 먹은 거예요. 내가 14년이란 생활을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묻어나서 소리가 성숙해진 것처럼 10분의 9는 자연스럽게 성숙해져가야 하는 과정이거든요. 저는 뭐든지 막 앞서서 가는 걸 싫어해요. 지금 현재, 지금이 소중하니까 지금부터 다 채워 넣고, 그런 다음에 내일도 채워 넣어야죠. 내 앞에 보이는 것부터 차근차근 하는 걸 좋아해요. 막 어떤 한가지만을 보며 가는 건 싫어요. 욕심을 덜어서 다섯 가지가 나란히 천천히 가는 걸 좋아해요. 앞으로의 계획들을 많이 물어보시는데 그건 저도 몰라요. 저도 어디로 갈지. 단지 노력할 수 있는 자세를 항상 가지려고요. 최선을 다할 뿐. 그러지 않았을 때 오는 후회감이 너무 싫기 때문에, 일단 되던 안 되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까진 가보는 거죠. 어떤 일이든 일단 맡았다면. 그랬을 때 다음에 오는 결과가 설령 나쁘더라도 저는 만족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으면 어떤 일이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보다도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부리나케 쫓아다닌 기억은 없어요. 다만 일이 찾아왔을 때 그것이 내 것이라면 잡아야죠. 그래서 항상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찾아온 일들에 최선을 다해서 빠져들었던 것 같고. 지금까지 제가 선택한 길에 후회가 없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아무래도 <천년학>의 비상학은 어쩌면 오정해 씨였던 것 같네요.
우리 이러다 나중에 십 몇 년 만에 또 인터뷰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애 장가보내고! 그동안 뭐하셨어요? 이러면서! (웃음)

음..그때는 11살 때 <천년학>을 본 친구와 인터뷰하면 감회가 새롭겠네요. (웃음)

2007년 4월 14일 토요일 | 글: 민용준 기자
2007년 4월 14일 토요일 | 사진: 권영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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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tto
좋은 작품 기대할게요~^^   
2010-01-29 01:14
mina7359
이쁘시네요!! ㅋㅋ   
2009-02-15 00:34
joynwe
오정해 씨는 판소리 아니면 영화를 하셨을지...   
2008-08-23 00:05
qsay11tem
여전히 이쁘네요   
2007-12-03 13:08
iamjo
잘보고 갑니다   
2007-09-01 13:31
qsay11tem
굿 정보 탱큐   
2007-07-05 08:06
kpop20
꽤 긴 인터뷰지만 잘 읽었어요   
2007-05-26 15:32
js7keien
앞으로도 좋은 연기 펼쳐주길 바랍니다~   
2007-04-3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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