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무슨 도장?"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투자사에서 계약서에 도장 찍어서 보내라고 한 건 아닐까?
부리나케 달려갔다.
제발……. 제발…….
"얘들아, 나 왔어."
회사에 들어서니 연출, 제작부 스탭들이 가득하다.
그래, 나에겐 이들이 있었지.
어떤 영화 현장보다도 훨씬 어렵고 힘들게 뻔한 1억원 저예산 영화를 위해
개런티 고작 50만원을 받고도 기죽지 않고 아니, 오히려 기세도 당당한
훌륭한 우리 후배 스탭들이 있었지.
그래, 난 돌아 왔어야 했어.
잘 왔다. 광수!!!
이선미 프로듀서를 찾았다.
"도장은 왜? 혹시……."
"스탭들 계약하려구요. 그런데, 형 스탭들 모두 거의 노개런티나 다름없는데 인센티브 계약하면 안 돼요?"
"스탭 계약? 투자사에서 계약서 온 거 아니구?"
"투자사? 아닌데요?"
헉, 투자 계약 건이 아니었구나.
어쩐지 금방 일이 풀린다 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지…….
"형, 인센티브는?"
"인센티브? 해야지, 그럼 해야지."
우리 회사 이선미 프로듀서는 엄마 같은 성품을 가진 여자다.
나와는 대학 선후배 간인데,
우리가 1988년에 만났으니까 지금까지 19년째 같이 일하고 있다.
이쯤 되면 가족이나 다름없다.
우리 선미(선미?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아닌가? 맞다. <후회하지 않아> 중 정태의 돈을 가로채 도망친 년의 이름이다. ㅋㅋ)의 따뜻한 제안 덕에 모든 스탭들과 인센티브 계약을 하게 되었다.
수익이 생기면 모든 스탭들이 각자의 지분율대로 분배받게 된다.
스탭들 모두가 제작자가 되는 셈이다.
다른 한국 영화에선 유래가 없는 일이다.
<후회하지 않아>는 이렇게 배경도 훌륭하다. 호호호.
너무 자랑이 쎘다. ㅋㅋ
여튼, 그렇게 인센티브가 포함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꽝꽝꽝!!!
며칠 놀았더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뭐부터 해야 할까?
말하면 잔소리, 투자부터 받아야 한다.
한라산에서 받은 정기를 듬뿍 담아 발걸음도 힘차게 보무도 당당하게 투자사를 향하여, 앞으로!
투자사에 가서 다시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1억짜리 저예산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
퀴어 영화의 시장성,
이송희일의 장편 데뷔작에 거는 기대 등등.
지난번에는 말을 하면서 상대방의 의중을 살피느라 눈알을 쉼 없이 굴렸다면
이번에는 달랐다.
눈 똑바로 쳐다보면서 웃으면서 자신 있게!
아, 이 넘치는 자신감. 호호호.
"네, 알겠어요. 다음 주까지 사장님 결재 받을 게요."
깜빡.
깜빡, 깜빡.
잘 못 들은 거 아니지?
다음 주라고 한 거 맞지?
"지난번처럼 또 미루자 거나 그러면 안 돼요?"
"네, 다음 주에는 틀림없이 결재 받을 게요."
"그럼, 다음 주에 계약 하면, 제작비 집행은 언제부터 가능한 거예요?"
"다음 주 계약하고 바로 할 수 있도록 할게요."
"아, 정말 고마워요."
신모팀장, 정말 예뻐 보인다.
맘 같아서는 뽀뽀라도 해주고 싶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을 테니……. 그럼 허그 1번? ㅋㅋ
자, 드디어 출발이다.
이제 더 이상의 좌절은 없다.
우리에겐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꺄오!
회사에 돌아 와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음 주 결재를 장담하기는 했지만 또 모를 일이다.
기뻐했다가 실망한 게 벌써 몇 번 채인가 말이다.
다음 주에 도장 찍고 돈 들어오면 그 때 말 해야지.
그냥 조용히 준비나 착실히 하자.
그래, 이번 주에는 주연 배우 캐스팅에 매진하자.
이송, 선미와 함께 캐스팅 회의를 했다.
W는 어떨까?
걔, 혀는 좀 짧지만 연기는 잘 하잖아.
맞아. 그럼 재민이로?
아냐, 걔는 노동자 삘이야. 수민이가 더 어울리지.
걔, 지난번 드라마에서 재벌 2세로 나왔잖아.
그게 어울리든?
그럼 걔가 수민이면 재민이는 누구?
P?
걘, 싫어. 발음이 새.
혀 짧은 애랑, 발음 새는 애랑 붙여 놓으면 가관이겠다, 그치?
낄낄낄…….
이런 때가 좋을 때다.
시나리오 돌리기 전에 얘는 어떻고 쟤는 어떻고 할 때 말이다.
그 때는 탑스타들도 별 거 아니다.
걔는 어디가 어때서 문제고, 난 걔 싫고, 뭐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다.
출연해 준다고 하면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머리라도 숙여야 할 판이지만
이 때 만큼은 내가, 우리가 스타다.
일단 제작비 1억짜리 영화지만
이름대면 알만한 스타들에게도 시나리오를 건네 보기로 했다.
물론, 그들이 시나리오 선택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그래도 보낸다, 시나리오.
우리들은 이럴 때 '예의상' 보낸다고 한다.
그게 스타에 대한 예의라서?
아니? 네버?
우리 시나리오에 대한 예의 말이다. 호호호.
그렇게 예의상 돌린 시나리오가 간택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얘기했던 W, P 모두 거절이다.
매니저를 만나서 설득해볼 요량으로 약속을 잡으려 했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NO를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마디.
시나리오 읽다가 깜짝 놀랐단다.
예상 가능하게도 그들에게는 수민, 재민이가 영화 속의 캐릭터로 보이는 게 아니라
그저 게이 혹은 호모로만 보이는 가 보다.
그래 정중한 거절이었다.
그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ㅠ.ㅠ
캐스팅이 쉽지 않으리란 걸 예상 못한 바는 아니지만 거절을 당하는 맘은 역시 쓰리다. 쓰…….
그나마 다행인 것은 1억 짜리 저예산 영화라서 꼭 스타를 써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
캐스팅이라는 험난한 산을 꼭 넘어야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정 안 되면 신인을 쓰면 된다.
어차피 과감한 영화, 과감하게 가면 되니까 솔직히 큰 걱정은 없다.
다만, 신인들의 경우 연기가 검증이 안됐다는 게 문제다.
장편 영화에서 주인공이 연기 못하면 그 영화를 누가 보겠나?
게다가 저예산영화에서 연기를 못한다?
으악, 죽음이다.
그래서 일단 찾기로 했다.
감독은 신인 배우들 중에서 연기가 되는 이들을,
난 지명도 있는 배우들 중에서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이들을.
역시나 예상대로 둘 다 쉽지는 않았다.
지명도 있는 배우들 중에 과감한 섹스씬이 있는 영화에 출연해 줄 배우는 없었다.
그 지명도라는 것도 처음엔 정말 탑스타였다가
나중엔 그저 장편 영화 경험 있는 배우로 점차 낮아져 갔지만
'나 여기 있소'하고 나타나는 쿨한 남자는 없었다.
어쩌지?
거절하는 유형은 다양했다.
첫 번째, 시나리오 너무 좋고 영화를 잘 만들 분인 줄 알지만 먼저 약속한 작품이 있어서 이번에는 못할 것 같다고 거절. 다음번에 좋은 기회를 만들어 보자며 정중하게 말하지만 그 이후로 한동안 출연한 작품이 없었던 배우도 있었다. ㅠ.ㅠ
두 번째, 매니저는 시나리오를 너무 좋게 보았는데 배우가 이해를 못하거나 겁을 먹는다고 거절. 겁을 먹는다니? 호러도 아닌데 말이다.
세 번째, 이 걸 영화로 만들 수 있겠냐고, 투자 받기 어렵겠다고 걱정을 하면서 거절. 왜 배우가 투자를 걱정해? 왜? 나중에 투자 받았다고 다시 들이밀었더니, 슬그머니 또 다른 이유를…….
네 번째, 배우가 기독교 신자라서 못한다고 거절. 정말 황당한 경우였다. 그 배우는 지금도 여전히 ‘성격 말씀에 이르길 호모는 지옥 불에 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을까? 꺅, 소름 돋는다. 지옥 불……. 지옥 불……. 앗, 뜨거!
이송도 마찬 가지로 힘든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많은 신인들을 만났지만 수민이로, 또 재민이로 딱이다 싶은 사람을 찾기란 힘들었다.
아, 대한민국 배우들 다 어디 간 거야?
호모들한테 먹힐까봐 숨은 거야? 그런 거야?
그러다가 나는 나대로
이송은 이송대로
한명씩 추천을 했다.
이한과 이영훈을.
다음 회에 계속.....
<후회하지 않아> 리뷰 보기!
이송희일 감독 인터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