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을 미루자고 했다.
시나리오도 좋고 다 좋은데,
이런 전례가 없으니 시간을 갖고 추진을 해 보자고.
어찌 보면 절망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을 수 있지만
계약서에 도장 찍으러 룰루랄라 나온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게다가 <야만의 밤>(후회하지 않아의 바뀌기 전 제목)은 제목처럼
후반부에 나오는 그 야만스러운 밤(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장면이 중요하고
그 건 태풍 올 때 찍어야 하는데,
시간을 갖고 추진을 한다는 건
그 야만의 밤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에겐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나 떨어져요......
갑자기 힘이 빠져 버렸다.
맥이 풀린다는 소리가 이런 거구나…….
그랬다.
힘이 빠져 그녀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 눈에는 그녀의 입 모양만 커다랗게 남아 있을 뿐이다.
뭐라 말하는지 들리지는 않고 입 모양만 기억난다.
그렇게 몽롱하게 그 자리를 파하고 돌아 섰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처음 <야만의 밤>을 제작한다고 했을 때부터 들려오던
소리들이 귓가를 맴돌며 나를 괴롭혔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돈 되는 영화를 해야지……."
"이 건 어렵겠는데요……."
"돈은 영화를 다 만들고 나면……."
"계약을 미루고 좀 더 생각을 해 봐야겠어요."
그냥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을 보았다.
너무 맑고 청명한 하늘.
모든 게 다 원망스럽다.
하늘이 파란 것도
길거리 사람들의 웃음도…….
어린 아이처럼 주저앉은 채로 발로 땅을 차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힐끗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렇게 한동안 길바닥에 있었다.
정신이 돌아 온 건 사무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었다.
정신을 차리니까 이송희일의 얼굴이 떠오른다.
맥주잔 부딪히며 잘 해보자고 이제 잘 찍기만 하면 된다고 했었는데…….
이송의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인가?
게다가 연출, 제작부들은 또 어떻고.
50만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개런티를 받고도
'저희는 <야만의 밤>이 좋아요'라고 외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 있는
그들을 볼 낯이 없다.
갑자기 아득해 진다.
내가 제작자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이렇게 되었을까?
다른 영화들, 일반적인 상업영화들의 30분의 1밖에 안 되는 제작비를 못 구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내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니었다면…….
차승재, 김미희, 심재명, 오기민, 오정완, 조민환…….
나와 친한 제작자들의 이름이 떠오르며
그들에 비해 형편없는 능력을 가진 나를 비교하며 정말 괴로워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이었다면 이깟 제작비 투자 받는 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을 게다.
아마도 지금쯤 한참 촬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내가 한심했다.
사무실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갔다.
작은 옥탑 방으로 터덜터덜 올라가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세수를 하다가 울컥 눈물이 났다.
그냥 서러웠다.
날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고,
옥탑 방에, 지지리도 못사는 가난한 내가 싫었고,
그러면서 영화 제작한다고
능력도 없으면서 일만 벌린 내가 미웠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다음 날,
회사에 가서 <야만의 밤> 투자를 못 받았다고 전했다.
그리고 대표직을 내놓겠다고 했다.
능력 없는 내가 대표 자리에 앉아 회사를 말아먹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모두 깜짝 놀랐지만
내가 워낙 완강하게 그만 두겠다고,
너무 지쳐서 쉬고 싶다고 말하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볼 뿐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럼 며칠 쉬고 오라면서 그동안 생각을 해보겠다고
그러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난 며칠 지나도 달라질 건 없을 거라며 쓸쓸히 회사를 나왔다.
나락으로 떨어지니까 모든 게 다 힘들고 괴롭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나란 놈이 더 싫어 졌다.
또 다음 날,
난 제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맘 같아서는 외국에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그냥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에 내가 가진 돈으로 가장 멀리 떠날 수 있는 곳으로 갔다.
대한민국 최고의 휴양지 제주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밝게 웃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지,
난 왜 이 모양인지,
더 괴로워졌다.
서울을 떠나면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온통 나에 대한 자책과 현실에 대한 원망으로 머리 속이 가득했다.
바닷가를 거닐어도 산에 올라도 난 많은 관광객 속에 홀로 남겨진 섬 같았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 건
나의 자학이 바닥을 친 다음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꿈을 꾸셨다면서 아무 일 없냐고 물으신다.
뭐 별일 없다고 지방에 일 때문에 내려 왔다고 했는데,
엄마는 전화를 끊으시면서 이러셨다.
"난, 우리 아들 믿는다."
엄마가 무슨 꿈을 꾸셨는지 난 모른다.
엄마의 뜬금없는 믿는다는 한마디는 바닥을 친 나를 끌어 올려 주었다.
괜히 힘이 났다.
그리고 그냥 오기가 생겼다.
청년필름을 만든 지 8년째 되는 해였다.
그래, 2년만 더 해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그 때 깨끗하게 포기하자. 쿨하게.
맞아 10년은 해 봐야지.
10년 해도 안 되면 그 건 아니지.
그래 2년 남았어.
남은 2년 죽어라 달려보자.
이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불끈불끈 거린다.
아, 이런 게 조울증이란 건가 보다.
급우울에서 벗어나니 웃음이 돌아왔다.
미친놈처럼 혼자 키득키득 웃는다.
나, 정말 미친 거 아냐?
갑자기 힘이 나니까 솔직히 미친 거 아닌지 겁나기도 했다. ㅋㅋ
지금 생각하니 정말 김조광수, 지랄 같은 캐릭터다.ㅠ.ㅠ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너무 느렸다.
빨리 회사로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지.
얘들아, 나 돌아왔어, 돌아 왔다구!!!
다들 깜짝 놀라겠지?
혹시 그 새 대표를 새로 뽑은 건 아니겠지?
설마?
그건 안 돼!!!
난 2년 더 해야 한다구!
서울에 내리자마자 전화기를 켰다.
이 것들이 나를 밀어 낸 건 아니겠지?(ㅋ 지가 그만 둔다고 해놓고 밀어 내긴…….)
"여보세요."
"형, 왜 전화기는 꺼놓고 지랄이야."
"어? 어 그게……. 근데 나 회사로 빨리 갈게……. 너네 나 밀어내고 벌써 대표 새로 뽑은 건 아니지?"
"으이구, 빨리 와서 도장이나 찍어요."
"도장?"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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