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드시고 연락 주세요."
헉, 이 건 아니 잖아.
정말 아니 잖아.
"어, 그 게요. 그 게 말이죠... 저희는 제작비가 없어서 케이블 판권을 팔아서 제작비를 좀 만들어 보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판권료를 미리 주실 수는 없나요? 좋은 작품 만들어서 보답하겠습니다."
"네? 완성 전에 미리 구매를 하라는 말씀이세요? 그 건 곤란해요. 저희 회사는 선구매를 하지는 않아요. 그런 전례가 없어서요."
그랬다.
미리 판권을 팔아서 제작비를 만들어 보겠다고 나선 건,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제작자의 계산이었다.
그 담당자의 얘기는 이렇다.
시나리오도 좋고 감독의 단편으로 미루어 봤을 때 영화도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아서
시나리오 단계에서 판권 구매 의사를 밝힐 수는 있지만
판권료를 지불하는 건 영화가 제작을 마치고 나서나 가능하다는 것.
사실, 시나리오 단계에서 판권 구매의사를 밝히고 진행하는 것도
<야만의 밤(후회하지 않아의 전 제목)>이 처음이고 특별한 케이스라고 했다.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외국의 경우에는 '완성보증보험제도'라는 게 있어서
영화의 시나리오와 제작 계획서 등을 토대로 심사를 거쳐
보험 회사에서 영화의 완성을 보증해 준다.
그 보험을 담보로 은행에서 제작비를 빌리거나
투자자들을 모을 수 있는 거다.
만약 문제가 생겨서 제작이 중단 되거나 하면
보험 회사에서 은행이나 투자자들의 투자분에 대해 보험료로 원금을 상환해 준다.
은행이나 투자자들은 최소한 원금을 돌려 받을 수 있으니
안심하고 미리 돈을 줄 수 있다는 말씀.
물론, 보험회사의 심사를 거치려면 정말 엄정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아무에게나 보증을 서주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여튼, 그런 좋은 제도를 이용하여 많은 작품들이 독립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미국을 위시로 한 여러 나라들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이런 완성보증보험이 없는 상태에서 판권을 선구매 하여 미리 돈을 지불했다가
만약이라도 제작이 안 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담당자는 문책을 당할 게 뻔하고, 아니 짤릴지도 모른다, 뭔가 나리가 나는 상황이 될 것이 뻔하다 보니 판권구매 담당자가 손을 내젓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청년필름은 그런 회사 아니잖아요'에서 부터
'우리 영화 다 좋아 하셨다면서요'까지 온갖 얘기로 설득을 해 봤지만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어쩌면 좋아.ㅠ.ㅠ
다시 또 원점으로 돌아 왔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이 영화를 찍을 수 있단 말인가?
진정, 방법은 없단 거야?
다시 머리를 급회전 시켜 본다.
돌아라 내 머리야.
이러다가는 정말 말 그대로 돌아버릴 지도 모르겠다.
악!
감독은 내 말만 믿고 연출부도 꾸리고 헌팅도 하는 모양인데,
어쩐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중단하라고 해야 하는 거야?
정말 이 돈(아직은 금액을 밝힐 수는 없다, 왜? 진짜 저예산이기 때문이다. 예산만 듣고 '이 영화 만듬새가 후질 거다'고 미리 편견을 가질지도 모르니까 아직은 밝힐 수 없다.)도 못 구한단 말이야?
내 능력이 이 정도 밖에는 안 된다는 거냐구?
영화 다섯편을 만든 제작자 김조광수의 능력을 시험하는 잣대가 된다고 생각하니
좀 억울하기도 했고
또 그런 만큼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좋아 내 머리는 폼이 아니고
내 능력도 이 것 보다는 훨 낫다는 걸 보여 주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반짝반짝,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역시 난 아직 괜찮아. ㅋㅋ
<분홍신>에 투자했던 투자사(디씨지플러스, <분홍신>은 디씨지플러스의 첫 투자 작품이다)의 신모양(디씨지플러스의 투자팀장으로 아주 꼼꼼한 여성이다)을 만났다.
여차 저차 해서 케이블TV에 판권을 팔 수 있게 되었는데
돈을 미리 줄 수 없다고 하니
완성보증보험사가 되었다고 치고 제작비를 좀 투자해 주면 어떻겠냐고,
영화는 잘 만들 테니 좀 도와주는 셈 치라고,
어차피 케이블 판권도 팔린 거니까 혹시 손해를 보더라도 그 손해라는 게 정말 얼만 안 되니까 눈 딱 감고 투자를... 굽신굽신.
영화 투자라는 게 그렇다.
블록버스터 시나리오에 스타를 캐스팅하고 100억 투자 받는 건 쉬운 일이지만
시나리오 좋아도 스타 없이 몇 억 투자 받는 건 하늘의 별따기.
이건 비단 우리나라 얘기 만은 아니다.
외국에서도 저예산 독립 영화 만들려면 다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쪽엔 완성보증보험이 있고 우리는 없다. ㅠ.ㅠ
신모양, 며칠 간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에이, 고민은 뭐 하러 하나, 이 건 정말 돈 되는 시나리오라니깐요.
그리고 며칠 후?
오 NO!
바로 다음 날 전화가 왔다.
대답은 YES!
오, 예스.
드디어 이 영화의 서광이 비치는 구나.
급흥분한 피터, 이송감독에게 전화질을 한다.
이럴 땐 폼을 좀 잡아도 괜찮다. 호호호.
"희일아, 준비는 잘 돼가?"
"네, 준비는 그럭저럭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런데 투자는... 아직도 어려운가요?"
"투자? 어... 투자는 ... 투자는 되었어. 투자가 됐다구!"
"정말요?"
"그래, 됐어, 이제 니 첫번째 장편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됐다구!!!"
아, 얼마나 기쁜 일인가?
술을 못 마시는 편이지만, 이런 날 술이 빠질 수는 없다.
이송과 이선미프로듀서, 조감독 등과 함께 술 한잔 기울였다.
술이래보니 호프집에서 닭 한마리에 맥주 한잔이 고작이지만
이 보다 더 맛있을 수는 없다.
자, 야만의 밤을 위하여!
디씨지플러스의 신모팀장과는 바로 다음 주에 약속을 잡았다.
이제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만 하면 드디어 출발이다!!!
최종 시나리오와 제작비 예산서, 제작 일정표 등을 보냈다.
그리고 약속의 날.
즐거운 마음으로 룰루랄라…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
오늘따라 신모양 너무 알흠다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어 주는 센스를 보이며,
“잘 지내셨어요?”
“네, 대표님 그런데…”
그런데?
왜?
“저 계약을 좀 이루면 안 될까요?”
꺅!!!
이 건 또 뭐야?
이러다 이 영화 정말 못 찍게 되는 거야?
정말?
다음 회에 계속.....
<후회하지 않아> 리뷰 보기!
이송희일 감독 인터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