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광수 대표는 바쁘다. 심하게 바쁘다. 파티에, 팬미팅에, 밤샘시사에, 기타 잡일에 아주 난리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니 당연한 행보 아니냐? 뭐 그렇게 반문할 수 있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선 분위기다. 물론, 이런 정도! 마구 넘을수록 좋은 거다. 혼자 신난 게 아니라 배우, 스태프, 관객과 함께 하며 승리의 V를 날리고 있으니까!

저예산 독립영화로서는 최단기간 1만 명 돌파에 성공하며 적잖은 반향을 불러 모으고 있는 퀴어멜로 <후회하지 않아>를 제작한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가 이런 와중, 무비스트와 후회공식블로그를 통해 제작기 뒷담화 연재를 시작했다. 두 남자의 사랑을 다룬 문제적 영화였던만큼 관객과 대면하기까지의 과정 역시 문제가 상당했더랬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흥미진진하고 재미난 혹은 지난했던 <후회하지 않아>의 제작기 뒷담화! 그 1탄을 전격 공개한다. 도끼눈 뜨고 보길 바란다. 정말이지 당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글이다_편집자

그 첫번째 이야기.

2005년 여름이었다.
<분홍신>을 만들어 개봉하고 신나게 무대인사를 다닐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분홍신>은 우리 회사에서 만든 작품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그래 보니 140여만명의 관객이 본 것일 뿐이지만
그동안 <와니와 준하>, <질투는 나의 힘>, <귀여워>등의 영화를 만들어 오면서
'청년필름영화 = 예술영화'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그 꼬리표는 한국 연화산업에서는 주홍글씨와 같다.
'예술영화 = 돈 안되는, 관객이 외면하는 영화'였으니
돈 놓고 돈 먹기에 가까운 영화산업에서 살아 남는 길은
꼬리표를 떼는 것 밖에 없었다.
그 첫번째 칼질이 <분홍신>이다.
<분홍신>으로 꼬리표는 일단 떨어 졌다.
2005년 공포영화 최고의 흥행성적을 올리면서 청년필름도 잘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방에 보여줬다.
오호, 이제 돈 버는 일만 남았다?

호호호.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와 청념필름 식구들의 취향이라는 놈이 스멀스멀 기어 들어온다.
그러더니 그 놈, 기어이 사고를 치고야 만다.
어떤 사고냐 하면
그 무섭다는 '예술영화 혹은 작가영화 또는 독립영화'에 눈을 돌리게 만든 것.
뭐 어쩔 수가 없다.
돈 되는 영화는 돈 되는 영화대로 만들고
또 우리 취향에 딱 들어 맞는 영화는 또 그렇게 만들면 되지.
살짝 자신감 더하기 무모한 도전 정신 같은 게 생긴다.
아까도 말했지만 뭐, 어쩔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좋은 걸 어떡해'다. ㅋㅋ

<분홍신> 다음 영화로 <야만의 밤(후회하지 않아의 바귀기 전 제목)>을 택했다.
이송감독과는 원래 <굿로맨스>의 장편 버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캐스팅이 되질 않았다.
웬만한 여배우들은 30대 유부녀에 애까지 딸린 역할을 하기 싫어 했다.
게다가 <굿로맨스>는 고등학생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가 주인공.
묘사가 꽤나 쎈 정사씬도 더러 있다.
유명 여배우들에게 시나리오가 건네졌지만
다들 손사래를 쳤다.
<해피엔드> 준비할 때 (1998년) 경험이 있었지만
지금(2005년)은 그 때와 상황이 좀 달라졌겠거니 했다.
서른이 넘은 여배우들도 많고
배우들 생각도 많이 변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정말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일 뿐이란 걸 시나리오 건네고 바로 알게 되었다.
여튼,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고
그렇게 캐스팅이 안 되면서 그 영화 <굿로맨스>는 시쳇말로 엎어졌다.
좌절의 나날.
이송 감독은 <굿로맨스>를 위해서 2년 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엎어져 버렸다.
이젠, 뭘하나?
그 때 퍼뜩 든 생각이
이송은 저예산 디지틀 영화 만들면 아주 잘할 거라는 거였다.
오호, 그래 놀면 뭐하나?
아니, 놀지 말고 생산을!!!
니가 잘 할 수 있는 게 여기 있잖아.
예산을 최대한 낮추면 빨리 준비해서 빨리 찍을 수 있다고 생각이 미치자 얼른 이송에게 말했다.

"희일아, 후딱 영화 한 편 만들자."

이송에게는 저예산이란 게 더 좋은 장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왜?
이송은 독립영화출신이니까.
사실, 이런 소리 이송은 싫어할 지도 모른다.
아니, 이송 말고 다른 독립영화 감독들도 싫어할 수도...
그렇다면 미안요. ㅠ.ㅠ
독립영화에서 잔뼈가 굵은 이송은 달랑 1,200만원으로 옴니버스 3편을 묶은 <동백꽃>을 제작, 연출하여 극장에 걸었던 프로듀서 겸 연출자.
자, 그럼 이송의 장편 데뷔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 냅니다. 짜잔.

이송에게 빨리 찍을 수 있는 아이템이 있으면 보여 달라고 했다.
예산은 말도 안 되는 액수를 건넸다.
이송 그리 놀라지 않는다.
역시 이송이야.
<동백꽃>에 비하면 블록버스터 아니냐고 꼬드겨 볼 생각이었는데
그 말도 안 되는 거짓부렁은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휴~

며칠 뒤,
이송은 나에게 요상한 트리트먼트를 보여 주었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해고된 젊은 녀석이 호스트바에서 일하게 되고
거기서 부잣집 도련님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지만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호락호락하게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내용.
어허, 이 거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의 변주인가?
너무 뻔하게 가는 거 아냐?
고런 선입견에 빠진 대사를 날리려는 순간
허걱, 예상 못한 쓰토리로 달음질 친다.

좋다!
이 거면 되겠다.
영화적으로도 좋고, 돈도 될지 몰라.(돈은 장담 못함, 삐질:; ㅠ.ㅠ)
자 그럼 투자사 여러분, 모두 돈 준비 하세요.
시나리오 보냅니다~~~
내일쯤,
어이, 김조광수. 진작에 이런 시나리오에 이런 예산...이런 걸 보냈어야지...
오케 우리가 투자하겠어!
이런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날아 오는 소리는 청천벽력이었다.

쓰.......!!!

<후회하지 않아>를 투자해 달라고 시나리오를 보내고 나서
바로 연락들이 왔다.
NO! 라고.
허 참, 반응이 빨리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대답이 NO!일 줄은 몰랐다.
칫, 그럼 그렇지.

투자사로부터 온 반응은 대체로 같았다.
제일 많이 들은 소리는
"정신 못 차렸군."이었다.
정신? 차리고도 남았다구.
30억 넘는 돈 들이고 스타 써서 만들 수 있는 영화만 해야 한다면
그래야 정신 차린 거라면
나, 정신 못 차린 거 맞다.
하지만 한국 영화, 그렇게 안전빵으로만 간다면 미래는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30억 들여서 만들어야 하는 영화는 그렇게
100억(억, 억, 정말 큰 돈이다) 들여서 만들어야 하는 영화는 또 그렇게
그리고 또 어떤 영화들은 적은 예산으로 찍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야 하는 것.
그렇지만 투자사의 생각은 나와 정반대 지점에 있었다.
그들에게 난 여전히 '돈 안 되는 영화 만드는 정신 못차린 제작자'인 것.ㅠ.ㅠ
난 돈 안되는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일반 장르 영화는 아니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어 일종의 실험 같은 걸 해보고자 하는 건데,
지금 당장 돈은 안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손해는 보지 않게 만들어 내고
다음엔 그 결과를 바탕으로 또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그러다 보면 매번 똑 같은 식상한 영화들만 양산하는,
영화 산업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건데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좌절 할 수는 없었다.
좌절은 나를 앞으로 나가게 해주지 않으니까.

시나리오를 보내고
짜게 식기(후회팬카페 유행어, 삼성아파트 501호 노래 중 '차게 식어간다..'는 노랫말이 있는데, 가수가 발음이 안 좋아서 차게를 짜게로...ㅋ)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내 열정도 조금씩 조금씩 짜게 식어갔다.

하지만 좌절의 늪에 빠져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좌절이라는 단어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거라 생각하며
좌절, 그 쯤은 '반사'를 날리며 다른 길을 찾았다.

투자사에서 외면한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다구!
세상에 돈은 많다.
돈 찾아서 삼만리인들 못 가리오.

다른 길을 찾으려 머리를 짜냈다.
다른 길, 다른 방법, 돈 줄...
그러다가 생각낫다.
오호, 그럼 그렇지 다 방법이 있다구.

내가 짜낸 묘수는 케이블TV였다.
케이블 TV에서는 동성애를 소재, 혹은 주제로 한 영화나 TV시리즈들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지 않은가?
<퀴어 애즈 포크>는 물론이고 <퀴어 아이>, 등.
그래, 케이블TV 판권 구매 담당자들을 만나 보자.
그쪽에 판권을 먼저 팔아서 돈을 받자.
그 돈으로 찍고... 극장에 개봉해서
우리 영화 외면한 사람들에게 본 때를 보여 주자.
결의를 다지면서 그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퀴어 애즈 포크> 런칭 파티 때 만낫던 사람, 맞아 그 분이 있었지?
그리고 바로 전화~

"여보세요, 저 청년필름의 대표인데요..."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청년필름과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채널 CGV 담당자는 청년필름 영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히힛, 바로 이 거야.
야호.
바로 시나리오를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미팅하는 날.
가슴은 콩닥콩닥.
영화 투자사들 처럼 단칼에 거절하진 않겠지?
그럴 거야, <퀴어 애즈 포크> 시청률 높았잖아.
아마 좋아 할 거야.
M Net 건물(채널 CGV 사무실은 M Net 건물에 같이 있다)로 올라가는 동안 긴장이 됐다.
이 건 뭐 짝사랑하던 놈에게 사랑 고백할 때 보다 더 긴장 되는 군. 쩝.

미팅룸에 쭈----욱 들어 와서 앉는다.
브리핑을 했다.
어쩌구 저쩌구...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도록... 극장 개봉은 꼭 할 수 있게... 몇 십만, 몇 백만은 몰라도 최소 몇 만명 이상은 좋아할...

"저, <질투는 나의 힘> 좋아해요. 청년필름 영화 다 좋아하구요."

빙고! 소문은 사실이었다.
이 건 청신호.

"판권을 사도록 하겠어요."

꺄오!!!
판권을 산단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밝게 웃고 인사하고 정말 화사한 분위기.

"그럼, 돈은 언제..."

"네? 그 건 영화를 다 만드시고 보여 주시면..."

허걱, 난 또 짜게 식는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