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영화를 보고 극장문을 나서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이미 위 첫 문장을 읽고 벌써부터 손이 근질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대부분의 흡연자들은 극장문을 나와, 채 열 걸음도 걷기 전에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어려운 사람과 동석하여 영화를 관람하였거나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가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한다면 잠시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뜰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극장문을 나서면서, 과연 우리는 단순히 담배를 피우고 싶은 것인지, 아님 영화 속 주인공들의 담배 피우는 이미지 때문에 우리가 그 속에 동참하고 싶은 것인지를 말이다.
필자는 얼마 전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을 보고 나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말보로 레드를 사서 피운 적이 있다. 최대한 빨리 가서 펴보고 싶었다. 독했다. 나름대로 요즘 웰빙(?) 시대에 걸맞게 니코틴이 적게 들어간 담배를 피우던 나에게 말보로 레드는 너무도 독했다. 순간 머릿속이 핑 도는듯한 현기증이 일어났고 그 몽롱함 속에서 난 영화 속 동수(김상경)를 떠올렸다. 초라한 현실 속에서도 선배의 영화를 보며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도용했다고 우기는 치졸한 동수의 초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 때 영화감독을 열망했던 나였기에 더욱 그의 초라함이 내 자신 같았고 동수를 위해서라도 아니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와 함께 말보로 레드를 같이 피우고 싶었다.
동수가 그랬듯, 또 내가 그랬듯이, 영화를 사랑하는 끽연가들이라면 이런 유치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한번쯤 편의점을 들렀을 테고, 담배를 피우면서 스크린 속 그들의 고민과 슬픔에 짧은 시간이나마 동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흡연가들의 흡연 욕구를 마구마구 증폭시키는 영화 속 명 끽연씬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 거친 느와르 속 멋진 남성들
범죄와 파멸이 변주되는 뒷골목 세계를 주로 보여주는 느와르 영화 속에서 담배 연기는 어둡고도 우울한 영상을 보여주는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대부’에서 조직과 가족 사이에서 고민하는 비토 꼴레오네가 내뱉는 짙은 담배 연기는 어두운 조명과 말론 브란도의 명연기에 힘입어 느와르 영화 속 명 흡연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대부’에서 함께 출연한 알 파치노 역시 멋진 흡연 씬을 많이 보유한 배우로 유명한데 ‘스카페이스’에서의 흡연 장면은 젊은 알 파치노의 광기어린 눈빛 연기만큼이나 매력적인 장면이다.
앞서 언급한 두 영화 속 흡연장면이 두터운 시가를 성냥불에 붙여 깊고 나지막이 빨아들이는 중후한 끽연가들의 모습이었다면 바다를 건너 동양에서는 필터 담배를 입술 가장자리에 삐딱히 깨물고 지포 라이터에 불을 땡기는 주윤발과 유덕화가 있다. 특히 ‘영웅본색’을 비롯한 오우삼 영화 속의 등장하는 주윤발의 흡연장면은 영화 팬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는 800만 관객 돌파의 신기원을 이룩한 ‘친구’의 후반부 중요한 모티브로 쓰이는 유오성의 담배 장면은 최근 ‘강호’라는 홍콩영화에서 오마주 될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전달하는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 역동하는 청춘의 메타포
방황하는 청춘을 표현하는 소도구로서 담배는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배우 제임스 딘…
‘이유없는 반항’의 빨간색 라이더 자켓을 입고 담배를 삐딱하게 꼬라 물은 그의 모습은 아직도 당구장이나 허름한 카페 등지에서 쉽사리 찾아 볼 수 있다.
국내 영화계에도 제임스 딘 만큼이나 확실한 청춘의 아이콘이 있다. 정우성이다. 이제는 어엿한 성인 연기자로서 자리잡아 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선 청춘의 상흔이 느껴진다.
특히, ‘비트’에서 유오성과 함께 보여주었던 환상적인(?) 흡연 장면들(필터를 뜯어내고 흡연하는 장면) 때문에 이 영화는 소위 좀 논다는 젊은 남성들의 흡연 교과서로 불리우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 삶을 뒤돌아보는 쌉싸름한 담배 연기
담배 연기는 영화 속 회상 장면을 연출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와 맞물려 보여지는 과거로의 여행. 이처럼 흡연 장면은 영화 속 인물들의 인생을 뒤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누들스(로버트 드니로)가 몽롱한 자세로 누워 피우는 아편 장면은 4시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 지으며 드니로의 깊게 패인 주름만큼이나 인생의 회한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장면이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영화 ‘스모크’는 애연가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특히 주인공 하비 케이틀이 들려주는 인생얘기와 감칠나는 그의 흡연 장면은 인생의 선배로서, 혹은 담배의 선배로서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주인공들이 죽기 전에 피우는 마지막 담배는 어떤 맛일까?
엔딩 장면이 인상적인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두 주인공 마틴과 루디는 석양이 비치는 한적한 바닷가에서 생을 마감한다. 죽기 전 그들은 좋아하던 데킬라를 마시고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다. 정말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조금 느낌은 다르지만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파이란’의 최민식의 모습도 국내 관객들에게 기억되는 장면이다.
● 왕가위 영화 속의 슬픈 영혼들
양조위, 장국영, 임청하, 유덕화….
왕가위 영화 속에는 유난히도 많은 끽연가들이 등장한다. 그것도 너무 매력적인.
이들은 오로지 사랑에 상처 받고, 사랑의 기억에 몸서리치는 슬픈 영혼들이다.
왕가위의 모든 영화에서 담배 장면은 등장한다. 사랑에 아파하는 주인공들의 관계는 자욱한담배 연기만큼이나 불확실하고 모호하다.
특히, ‘아비정전’과 ‘해피 투게더’의 두 주인공 양조위와 장국영은 시종일관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으며 영화 역사상 가장 슬픈 담배 시퀀스를 연출한다.
● 가녀린 긴 손가락 사이의 고독
담배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여성들의 흡연 장면은 인물의 캐릭터를 설정하는데 있어 남성보다 더욱 강한 캐릭터로 다가온다.
영화 속 여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는 흡연 장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팜므 파탈적인 강한 캐릭터를 표현하는 장면과 또 하나는 삶에 지친 고독한 여인상을 표현하는데 쓰이는 장면이다.
특히, 영화 ‘원초적 본능’ 취조실 장면의 샤론 스톤의 관능적인 담배 시퀀스는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한 팜므 파탈 여성 캐릭터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 역을 맡은 니콜 키드먼의 가녀린 긴 손가락 사이의 담배는 반복적인 일상에 찌든 그녀의 지긋한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 당신은 어떤 영화를 보았습니까?
또, 그 영화에서는 어떤 멋진 흡연 장면들이 나왔나요?
“Smoke gets in your 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