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이 83세, 150이 조금 넘는 자그마한 키, 젊은 시절 영화언어의 이단아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독자적인 자신만의 언어로 영화를 만들다 못해, 기괴한 영화세계를 창조한 ‘스즈키 세이준’
그가 나이 80이 넘어 ‘가부키’ 문학의 18번인 ‘너구리저택’을 소재로 짬뽕무비를 만들었을 때 다들 속된 말로 노망이 들었다고 했다. 그것도 일본전통문화를 영화화하면서 짱골라 배우인 '장쯔이'를 캐스팅하지 않나, 그의 괴팍함은 나이가 들어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오페레타 너구리저택>은 그의 괴상함을 드러내는 단적인 작품이며 세상에 태어나 그의 작품을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스즈키 세이준의 모든 것을 총망라한 백과사전 같은 영화이다.
“당신의 직업은?”
“그 일이 즐겁나?”
즐겁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영화기자이기 때문에 당신 같은 명감독을 만나고 누구보다 먼저 영화를 맛 볼 권리가 생겼다고 그래서 ‘내 일이 즐겁다’고 본 기자 대신 어느 젊은 기자는 대답했다. 그러나 산소 호흡기를 코에 꽂고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이 노감독은
“대단하다. 감독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나는 왜 지금까지 영화 만드는 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산소 호흡기 착용으로 인해 순간순간 숨소리가 거칠게 들리지만 스즈키 감독은 분명 젊은 치기에 싸인 우리를 놀리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우린 지지 않고 되묻는다. 산소 호흡기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오페레타 너구리저택>을 완성한 당신의 행동은 그 대답과 상반된다고. 그의 대답에 허를 찌르는 공격이 아닐 수 없는 질문이다.
마치 기 싸움을 벌이듯 20명 남짓 되는 20~30대의 기자들과 질문과 대답을 칼과 방패삼아 주거니 받거니 했던 83세의 노인 얼굴에 야릇한 아니, 우리들의 공격이 가소로운 듯 미소가 퍼져나갔다.
“ ‘너구리저택’은 가부키 공연의 18인데 당신들 나라의 추석이나 설날 때 사람들이 즐겨보는 잔치용 공연이다. 나이 80이 넘어가니 이런 잔치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지더라”
가시 돋친 공격의 응수치고는 허망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일본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려고 작정했으면 배우 또한 일본배우를 기용하는 게 합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리의 의구심에 스즈키 세이준은 별걸 다 물어본다는 어투로 대답한다.
“너구리저택은 좋은 날에 사람들이 즐겨보는 가부키공연이다. 이걸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으니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도록 배우 또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배우를 썼어야 했다. 장쯔이가 그 조건에 가장 합당해서 썼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호부라 강하게 말하는 노감독의 말을 듣고도 정신 못 차리고 장쯔이의 연기력에 대해 솔직하다 못해 냉정한 평가의 말을 그에게 기대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배우에 대해서 난 더 이상 칭찬할 말이 없고, 이 자리에 동석한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의 프로듀서에게 물어봐라”
3전 3패로 그에게 당했다. 평생을 그의 말마따나 힘든 영화일로 밥 벌어 먹은 사람을 상대로 영화를 씹어 밥 벌어 먹는 영화기자들의 질문들은 갓난아기의 옹알이에 불과함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의 거만함은 젊은 혈기에 불을 지르고 우린 더욱 더 거칠고 무례한 질문들로 백전노장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겸손함을 애타게 기다려본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은 일본 영화 안에서도 매우 특이한 작품들만 만들어왔다’
자신의 영화를 높이 평가하는 기자들의 존경의 질문마저도 일순 조크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비상함에서 언뜻 거장의 여유를 본 건 착각이 아니었을 게다. 폭력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갑자기 엔카의 곡조를 멋들어지게 뽑아낸 <도쿄 방랑자>는 분명 그의 작품이니 말이다. 산소통을 메고 바다 건너 한국에 올만큼 영화는 그에게 단지 힘든 일만은 아닌 듯하다.
“영화감독에게 첫 번째 중요한 것은 체력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도 체력이다. 지혜는 필요 없다”
불편해 보이는 그의 노쇠한 몸은 체력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앞으로도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 것임을 약속하는 한 노인의 ‘고집’을 상징한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간담회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부산 파라다이스호텔로 급하게 이동 하던 중, 복도에서 아주 몸집이 작은 할아버지를 만났다. 본기자 앞에서 이동식 짐수레에 산소통을 싣고 끌고 가는 노인의 머리는 온통 흰색이고 머리카락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숱이 적었다. 젊고 건장한 청년이 노인의 느린 보폭에 보조를 맞추며 걸어가고 있지만 청년의 얼굴에선 그 노인 대신 손수레를 끌어야겠다는 도움의 의사표시가 없어 보였다. 조용히 그 노인의 구부정한 등을 바라보면서 간담회실로 들어가자 어느 센가, 노인은 꼿꼿이 허리를 피고 자신과 산소통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즐기고 있는 ‘스즈키 세이준’으로 변해 있었다.
동시에 스즈키 세이준을 좋아하는 팬클럽의 회원으로 젊은 기자들이 그 순간 변신했음을 눈치 챈 사람은, 오직 그 노인밖에 없었다.
사진제공: 씨네티즌 김건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