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충무로뿐 아니라 , 새롭고 신선한 소재는 모든 창작계가 목이 마르게 찾고 있는 것이다 . 더불어 싱그러운 소재가 반드시 자신의 영역에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 그래서 수많은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야기가 영역을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으로 자신의 범위를 확장해 왔다 . 여전사 라라 크로프트도 , 지구를 골백번 구한 슈퍼맨이나 돌연변이 집단 엑스멘도 ,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야기에 대한 영화판의 구애에 게임과 만화가 응한 결과다 .
그 동안 한국영화에 상상력을 빌려주었던 매체는 대개 소설이었다 . 수많은 문제작과 베스트셀러가 은막을 타고 영상으로 재탄생 되었다 . 불교적 세계관을 이야기로 꾸몄던 김 성동 의 베스트셀러 〈만다라〉나 독특한 로드무비 〈고래사냥〉과 같은 작품은 한국영화가 한국소설에서 얻은 값진 성과 중 하나였다 . 청춘영화와 한국식 액션물의 접점에서 한 때 유행을 주도했던 〈인간시장〉은 원작이 80 년대를 대표하는 히트 소설이었다 . 그리고 21 세기 , 오랫동안 자신의 영역에서 이야기와 캐릭터의 테두리를 확장하고 서사의 도서관을 쌓은 한국만화가 충무로에서의 필모그래피를 하나 둘 씩 늘리고 있다 .
소년만화의 기둥: 이현세와 허영만
한국만화의 역사가 그리 짧지 않은 만큼 ,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이미 정수라의 주제곡과 함께 불멸의 청춘 스포츠물로 명성을 쌓은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불굴의 복싱 영화 〈신의 아들〉이 80 년대에 청춘스타 최재성 과 최민수 를 낳으며 승승장구했고 , 이후 최민수 는 90 년대 한국액션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테러리스트〉에도 출연하며 만화 원작의 영화에서 활약했다 .
한국 순정만화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서사극 작가 중 한 명인 김혜린 의 〈비천무〉가 영화화 되었고 당대 최고의 스토리텔러라는 강풀의 만화는 이미 개봉한 〈아파트〉를 포함하여 발표한 대부분의 픽션이 영화화 각색선 상에 올라있는 기염을 토하는 중이다 . 매우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기괴한 만화 〈다세포 소녀〉 역시 개봉을 끝냈고 , 한국영화계는 일본 만화 〈올드보이〉를 세계가 주목하는 작품으로 만들고 〈미녀는 괴로워〉같은 유명한 일본 만화를 영화화 각색 중일 만큼 만화를 필름롤로 옮기는 솜씨가 물에 올라 있다 .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한국 만화계를 대표하는 작가 , 허영만이 있다 .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일본만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만화의 입장에서 , 허영만 이라는 작가가 차지하는 위치란 의미심장하다 . 이미 일본만화를 압도하는 박력과 스케일로 인정받는 순정만화계는 차치하고라도 , 공장처럼 얇은 만화책을 찍어내던 대본소 ( 속칭 만화가게 ) 시절부터 현재의 단행본에 이르기까지 한국 소년만화를 지키고 있던 두 기둥이 있다면 , 허영만과 이현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 테크닉과 경력 , 작품의 수와 수준에서 두 작가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
거칠고 선이 굵고 스케일이 큰 남성적인 작품을 즐기는 이현세가 80 년대에서 90 년대 사이에 충무로와 공중파에서 재조명을 받은 경우라면 , 다양한 소재에서 세심한 연출과 꼼꼼한 취재를 통해 페이소스와 현장감을 살리는 허영만의 만화는 90 년대 이후 현재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해석되는 경우다 . 기본적으로 영웅담과 서사극에 강한 이현세가 무협지 계열의 스토리 작가 야설록과 잘 어울려 〈남벌〉같은 변형 무협 영웅담을 만들 때 , 허영만은 꼼꼼한 취재를 통해 현실에 접근하는 시대극 〈오 , 한강〉을 그리거나 역시 비슷한 스타일의 스토리 작가 김세영 과 함께 〈타짜〉〈사랑해〉〈짜장면〉 ( 물론 이 작품은 중반에 들어가며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지만 ) 같은 만화를 그리며 대조적인 작품 목록을 만들었다 .
각광 받았던 당시 , 열정적인 스포츠 영웅담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인기있는 원작자에 올라 형사 하드보일드 드라마 〈폴리스〉와 하드보일드 영화 〈테러리스트〉의 원작을 제공하며 승승장구 했지만 , 이현세의 수작으로 남아있는 대부분의 작품은 현재의 한국영화에서 쉽게 소화할 수 없는 스케일이 대부분이다 . 몇 번이나 각색 목록에 올랐다가 결국 영화화 되지 못한 초창기 수작 시대극 〈사자여 , 새벽을 노래하라〉나 매우 저돌적인 ( 그러나 매우 이현세다운 ) 하드보일드 영웅기 〈남벌〉을 비롯해서 이현세의 대표작 목록은 서사적 매력과 동시에 다루기 힘든 스케일을 겸비하고 있다 . 함부로 영화화를 하지 못하고 작가로도 완숙의 경지에 오른 이현세가 민족의 창세기를 다루고 있는 〈천국의 신화〉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일견 ,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
허영만 : 90년대 이후의 작가
밀착한 취재에 의해 현장에서 건져낸 듯한 대사와 행동이 손쉽게 만들어진 듯한 흔한 조폭 영화에서까지 나타나고 있는 현재의 한국영화가 작가 허영만을 돋보이게 한다 . 헐리웃 혹은 무협지 스타일의 영웅담보다는 수많은 약점을 가지고 현실 속에서 고민을 거듭하는 허영만의 주인공은 치밀한 취재가 시나리오에 밀착되며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90 년대 이후 영화와 드라마에 각광 받았다 .
대사와 캐릭터 , 상황과 이야기의 굴곡에 집중하는 90 년대 이후의 트렌드와 허영만의 만화 스타일이 잘 맞았던 것 . 때 마침 90 년대 이후의 만화계는 수많은 문하생을 두고 제목도 미처 다 알 수 없는 만화를 양산하던 대본소 체계와 단행본 체계가 혼재하던 시기였고 , 허영만은 일련의 잡지 연재작과 신문 연재작으로 그 시기를 성공적으로 돌파하던 차 였다 .
대본소 시절 SF 와 서사극 속에서도 기묘한 철학적 고민을 거듭하던 허영만 만화의 주인공 ( 당시 대부분의 이름은 ‘ 이강토 ' 였다 ) 은 90 년대 월등한 퀄리티의 몇 몇 작품을 거쳐 TV 드라마를 통해 부활한다 . 갓 개국한 SBS 의 야심작 〈아스팔트 사나이〉는 정우성 을 스타에 안착 시켰고 , 송윤아 를 대중에 소개한 〈미스터 Q 〉의 성공은 허영만 특유의 소시민 성공담으로 이후 〈신입사원〉과 같은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
치밀한 취재와 풍부한 인용을 즐기는 스토리 작가 김세영 과 합작하며 허영만 만화는 독특한 경지로 진화한다 . 한 스포츠신문에 두 만화를 동시에 연재하는데 , 완성도와 재미에서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을 뿐더러 마주보고 있는 페이지에 연재하며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 구조와 그림체를 선보이는 괴력을 보여주었던 것 . 한 쪽은 역시 치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국적 장르 영화를 구사한 데뷔작으로 인상적인 실력을 증명한 최동훈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된 〈타짜〉다 .
튼튼하고 세밀한 뎃셍을 토대로 70 년대와 80 년대를 아우르는 화투 도박의 세상과 최고와 최저를 오가는 군상을 근사하게 묘사한 허영만의 필력과 김세영 의 감각은 장시간에 걸친 도박꾼 고니의 일대기를 호흡 한 번 흩트리지 않고 쫓아가게 하는 솜씨로 만화를 완성했다 .
다른 한 면에는 동서양의 문구와 명언을 수시로 인용하며 연애와 결혼의 한 단면을 경쾌하게 다루는 소프트한 단막극 〈사랑해〉가 연재되었다 . 의인화된 동물과 한 아이를 키우는 부부가 가볍게 연애의 한 일면을 짚고 이야기하는 작품의 구성에 걸맞게 반대쪽에서 연재되는 〈타짜〉와는 전혀 다른 , 생략과 과장이 강조된 그림체로 허영만은 마치 시트콤 같은 만화를 동시에 연재했다 .
허영만의 영화
시골동네의 순박한 청년이었던 고니가 전국을 주름 잡는 화투꾼이 되는 과정을 굴곡 많은 이야기로 다룬 〈타짜〉의 1 부 이후에도 허영만과 김세영 콤비는 직간접적으로 고니와 이어진 후세들이 도박의 세계에서 주고 받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 트럼프 카드와 카지노를 거치며 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삶의 한 순간에서 도박을 택하는 주인공은 드라마틱한 과정에서 치밀하게 취재한 도박꾼의 세계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 이를테면 〈타짜〉는 젊잖은 〈도박묵시록 카이지〉나 역동적인 〈도박사 마우스〉같은 만화라고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 훨씬 우리 주변의 삶에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매력과 무게를 가진 작품이다 .
그 중 최동훈 감독에 의해 이번에 만들어지는 작품은 이야기의 시작에 해당되는 〈타짜〉의 1 부 . 둥그스레한 원작의 고니는 날렵한 턱선을 가진 조승우 가 맡았고 , 음험한 팜므파탈의 냄새가 물씬 풍기던 마담은 김혜수 가 맡아 훨씬 뇌쇄적이고 젊은 외모로 탈바꿈했다 . 제자를 한국 최고의 화투꾼으로 만들고 최고의 라이벌을 인계했던 평경장은 작금 한국 영화의 조연 중에 가장 독특한 캐릭터를 자랑하는 백윤식 이 맡아 예의 유들유들한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 유일하게 남은 문제는 소년부터 장년 초입까지 아우르는 고니의 인생사를 2 시간 남짓의 영화 안에 어떻게 압축하는가에 대한 걱정과 기대 .
최근 허영만의 만화 공력이 그대로 드러난 수작이자 수많은 만화팬을 양산한 〈식객〉도 각색 중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 일본에서 유행하는 음식 전문가 만화를 본격적으로 국내에 도입한 〈식객〉은 , 한 때 유명한 한식집의 후계자였다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식료품 장수로 직업을 바꾼 ‘ 성찬 ' 이라는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일간지 연재물 . 전문 담당 기자와 어시스턴트로 이루어진 취재팀과 함께 꼼꼼하게 조사한 한국 전통 음식의 화려하고 맛깔나는 세상은 잉크와 펜이 더 이상 몸과 구분되지 않는 경지에 이른 허영만의 세심한 솜씨로 만화 지면에 다시 태어났다 .
그간 지역 음식을 즐기는 사람에게만 전해 오던 ‘ 매생이 ' 나 ‘ 과메기 ' ‘ 돌산 갓김치 ' 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경력만으로도 작품의 무게를 짐작할 만 하다 . 원래부터 유명한 음식점이었던 ‘ 하동관 ' 같은 곳을 대중에게 알린 것도 바로 이 만화 . 다만 비슷한 스타일의 일본만화 〈미스터 초밥왕〉이나 〈맛의 달인〉이 일본에서는 드라마 형태로 만들어졌고 , 중국요리를 바탕으로 한 〈중화일미〉가 연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것을 감안하면 영화로 만들기엔 너무나 많은 컨텐츠를 담고 있는 〈식객〉의 영화화 각색이 쉽지 않게 느껴진다 .
만화계에서 성실한 작업 스타일과 꼼꼼한 솜씨로 선후배에게 이름 높은 허영만 . 이제 지면을 넘어 은막으로 나선 그의 작품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현재 한국에 밀착된 캐릭터와 이야기를 가진 허영만의 세계에 마주한 것이 무척 반갑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