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쇼스키 형제가 돌아왔다. <매트릭스>라는 걸출한 시리즈로 세계 영화관객을 쥐락펴락했던 그들이, 새로운 영화를 들고 관객을 다시 찾았다.
오는 17일 전세계 동시개봉을 앞두고 있는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복수의 ㅂ’ 쯤으로 해석될 이 영화는, 서기 2040년을 배경으로 세계 제 3차대전 이후 모든 것이 통제된 미래사회를 그린다. 테러리스트와 각성된 주인공, 그리고 모든 것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권력 간에 벌어지는 대결을 형사물과 액션물이 혼합된 리듬 안에 솜씨 좋게 버무려 넣은 영화의 원작은 앨런 무어와 데이비드 로이드의 동명 그래픽 노블. <매트릭스>를 작업하기 훨씬 전부터 워쇼스키 형제가 탐내왔던 작품이다. 이미 10년 전 각색작업을 마쳐두었던 그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대프로젝트 <매트릭스>를 끝냄과 동시에 영화화에 착수, 마침내 관객 앞에 서게 됐다.
낯선 감독에게서 워쇼스키 형제의 기운을 느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워쇼스키 형제의 연출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브이 포 벤데타>는 온전히 그들만의 ‘작품’이라고 말하기 곤란한 것이 사실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참여한 부분은 각색과 제작. 감독은 신인 제임스 맥티그가 맡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데뷔한 낯선 이름의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며 워쇼스키 형제의 기운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단 영화를 들여다보기 전에 감독 맥티그의 전력을 보자. 그는, 이 영화의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이미 저 유명한 <매트릭스> 시리즈의 제 1 조감독으로 워쇼스키 형제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이것은 <브이 포 벤데타>가 드러내는 워쇼스키 형제의 아주 사소한 기운, 첫 번째 징후다.
크레딧 상에 나타나는 표면적 연관성 말고도, <브이 포 벤데타>에서 워쇼스키의 기운을 느낄 단서는 널렸다. 미래를 배경으로 그리는 SF액션물이라는 장르적 공통점은 기본이고, 드라마적 특색마저도 <매트릭스>를 상당히 닮아 있다. 생각과 사상, 취향까지도 완벽하게 통제당하는 음울한 미래 배경에, 가면의 테러리스트 V와 각성 끝에 전사가 되는 이비의 관계, 위장된 현실과 권력을 뒤집으려는 노력, 그리고 마침내 찾아오는 대오각성의 순간에 이르는 이야기 맥락까지, 워쇼스키 형제의 전작 <매트릭스>를 빼닮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자, 이쯤 되면 누군가 <브이 포 벤데타>를 워쇼스키의 적자라고 해도 슬슬 부인하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무장된 볼거리, 뒤틀리고 혼합된 장르의 재미
<브이 포 벤데타>에서 드러나는 워쇼스키의 흔적은 그 뿐 아니다. 화려한 비주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테크닉 또한 그들의 전작에 뒤지지 않는다. 전화선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역동적 워킹이 빛나던 <바운드>나 각종 디지털 비주얼로 새로운 영상언어를 창출했던 <매트릭스>가 그랬던 것처럼, <브이 포 벤데타>는 일단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3D 작업과 고속촬영 기술을 통해 잡아낸 우아한 칼날의 곡선, 현실적으로 안배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안무에 가까운 V의 액션은 <매트릭스>가 보여주었던 디지털 비주얼의 참신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있으며, 거대한 모니터와 화상회의, 전자장비 그득한 욕실로 대변되는 미래사회의 풍경과 이와는 대조적으로 꾸며진 ‘새도우 갤러리’의 고풍스럽고 회화적인 모습은 그 자체로 볼거리다.
또한 표면적으로 SF액션 영화의 모양새를 지녔으면서도 형사드라마와 멜로의 장르적 특성을 솜씨 좋게 버무려낸 혼합장르적 특징 역시 그간의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들이 계속 견지해온 특성과 같다. 여성 버디무비인 동시에 퀴어 드라마이고, 또한 필름느와르였던 그들의 데뷔작 <바운드>나 SF액션블록버스터인 동시에 멜로이자 휴먼드라마였던 <매트릭스>는 장르적으로 딱히 이거다 할 만큼 하나의 색깔이 진한 작품이 아니었다.
그들의 영화는 늘 동시에 많은 것들을 아우르고 있었으며, 기존의 장르영화에서 드러나던 관습적 표현을 슬쩍 비틀었고, 덕분에 모두의 눈에 다르게 읽히는 데칼코마니 작품처럼 매번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사실 그것이 바로 이 워쇼스키 형제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나 선명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어디로든 열려있고, 누가 드나들어도 괜찮을 듯한 해석의 문. 만화와 동양철학을 두루 섭렵했던 미디어 시대의 총아들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대중을 매료시켰다.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브이 포 벤데타>의 브이는 이비의 전향을 의심하고, 종국에 이비는 세계의 진실성을 의심한다. 마치 네오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의심은 하나의 통과의례이자 생존의 요건이 된다. 그리하여 워쇼스키 형제의 세계에는 데카르트마저 무릎꿇고 말 회의주의가 그득하다. 워쇼스키 영화의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자신을 의심하며, 결국에는 세계의 근원까지 의심한다.
회의하고 있는 자신, 즉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만은 더 이상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는 달리, 동양의 장자철학까지 수용해낸 워쇼스키 형제들은 회의하고 있는 자신마저도 의심의 대상으로 놓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하고 있는 나는 진짜인가? 가상인가? 현실인가? 꿈인가? 근대적 사유의 기반을 자근자근 밟아대는 워쇼스키 형제의 이러한 행각은 그래서 그들이 가진 진짜 철학적 깊이와는 상관없이 호사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영화를 소비하는데서 그치던 관객의 사유를 유도했다. 사방으로 열린 문은 바로 이 회의주의에서 시작된 것이며, 바로 이 간단없는 회의가 그간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일련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들은 얼마나 귀여워졌는가?
전체주의와 권력, 테러와 혁명을 소재로 삼아 시대와 개인의 역할을 회의케 하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냄새 풀풀 나는 워쇼스키 형제의 작품이다. 대단히 미래적인 비주얼이 곳곳에서 관객을 반기지만, 반대로 19세기 풍의 고아한 조형미가 화면 안에서 빛나며, 대단히 전복적인 듯하지만, 대단히 위험하고, 대단히 심오할 듯하지만, 또 대단히 오락적이다. 여전히 의심은 영화의 주요 포인트이며, 문은 사통팔달로 열려 있다.
그러나 어느 쪽 입장에 서도 분명한 한 가지는, 휴고 위빙의 탁월한 연기를 통해 표현되는 주인공 V의 캐릭터가 매우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찰랑대는 가발과 시종 웃는 얼굴인 가면을 쓰고도 중후하고 무게감 있는 V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해낸 휴고 위빙의 연기는 가히 압권이다. 오죽하면 그가 더 이상 자기복제를 하지 못함에도 총 한 방에는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묘한 기대 같은 걸 품을까.
특유의 무표정으로 영화의 추리적 재미를 더해준 스티븐 레아나 독재자의 전형 그대로를 표정과 대사만으로 충분히 보여준 존 허트, 그리고 머리까지 삭발하며 소녀에서 여전사를 오가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도 물론 대단한 볼거리이긴 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워쇼스키 형제다운 캐릭터는 우리의 V다. 셰익스피어와 윌리엄 블레이크를 인용하고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줄줄 외워대는 주인공 V의 젠 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아는 걸아는 척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워쇼스키 형제의 ‘귀여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자,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깊어졌느냐고? 이런, 이런, 그 질문은 틀렸다. 어차피 회의는 그들의 몫이 아니라 관객의 몫이니 깊이를 갖추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관객의 몫이어야 한다. 그것이 워쇼스키 영화를 즐기는 일종의 ‘스킬’이고 ‘테크닉’이다. 다시 묻자. 그들은 얼마나 귀여워졌는가? 아, 이런. 형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