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에 다니는 남편을 둔 여성이 이혼 소송을 걸면서 위자료 청구를 위해 남편의 연봉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는 기사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국가 발전과 번영을 위해 나라의 안보를 지키고 자유민주체제를 수호하는 이들의 연간 소득은 국가기밀로 취급되므로 공개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최근 일부 공개된 바 있지만. 아이디 16개로 왕성한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한다던지…
부부란 모름지기 서로 간의 자산 총액에서 부채 총액을 제외한 순수 자본이 얼마인지를 알아야 투명하고 신뢰가는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한 결혼예비학교의 자료에서 읽은대로 철썩같이 믿고 살던 나는 이 기사를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국정원 다니는 남편을 둔 친구에게 물었다. 너 신랑 월급을 몰라? 친구는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쓸만큼 가져다주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 받는지는 몰라.' 그럼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니? 이어지는 질문에도 역시 친구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프랑스 담당 뭐라는데 들어도 모르겠던 걸?' 오해가 있을까봐 밝혀두는데, 이 해맑은 친구의 행복은 거짓이 아닙니다.
나의 애인이나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궁금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부부라면 소득에 대해서도 서로 간에 거짓없이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굳이 재산 상태까진 아니더라도 영화 <화차>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관점에서 연인이라면 서로의 기본적인 신상 정도는 파악해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점점 진지해지고 있으니 이쯤에서 서로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보는 게 좋겠다며 동사무소로 향하는 것은 조금 부자연스럽겠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와 공감과 믿음을 토대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에 그를 이루고 있는 수 많은 요소들, 주위의 환경과 상황들이 둘 사이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어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신분을 위장하고 정체를 숨기고 속마음을 가리고 타인을 속이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대체 이 사람은 누굴까, 나가서 어떤 일들을 하는 걸까, 설마 나를 사랑하는 마음도 진심이 아닌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내 남자가 그런 수상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가령 <베를린>의 표종성(하정우) 같은 사람 말이다.
영화 <베를린>을 보고 하루쯤 지나니까 화려한 액션과 복잡한 스토리의 긴박한 첩보물로 여겨졌던 이 영화가 갑자기 슬픈 멜로로 느껴졌다. 사랑이 대체 무엇이냐. 사랑이란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서도 가장 명확한 속성을 지닌다. 숨길 수 없고, 꾸밀 수 없다. 그런데 스스로의 정체를 아는 이 없고 자신 또한 그 누구도 믿지 않는데, 그렇다면 그가 빠져있는 사랑은 진짜인 걸까? 이어질듯 이어지지 않는 표종성과 련정희(전지현)의 대화, 여자는 남자를 '조국의 영웅'이라고 칭하고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아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서로에게 갖고 있는 애정의 크기가 작아져서 소원해진 커플로 보이기보다는, 말하지 않음으로 서로에 대한 애정을 묵묵하게 지키고 있는 듯한 아련함과 짠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침대에 돌아누워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련정희의 처량하게 커다란 눈,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굳은 얼굴을 풀지 않던 표종성의 속을 읽을수 없는 눈. 어디에서도 권태와 같은 감정은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둘은 서로를 의심하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속을 내보여선 안되는 현실에 처했지만 서로를 믿지 않으면 안되는 딜레마에 빠진 사랑은 표종성이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인간병기에서 인간으로 각성하는 순간,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일그러지는 것으로 폭발한다. 련정희를 끌어 안고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솔직히 진한 신파의 냄새가 느껴진 것도 사실이지만, 가녀린 실루엣 탓인지 그냥 서있기만 해도 슬픔이 느껴지는 파리한 얼굴의 전지현과 액션히어로라는 비현실적 캐릭터 보다는 맷집 좋고 무뚝뚝한 현실의 남자에 가까운 하정우가 만나 만들어낸 그 마지막은 스크린 밖에 앉아있던 이들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베를린>은 지독한 멜로다
2013년 2월 22일 금요일 | 글_앨리스(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