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남한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북한의 무기 ‘부당거래’ 현장을 감시하던 중, 고스트라 불리는 북한 비밀 감찰요원 표종성(하정우)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한편 평양에서 급파된 ‘피도 눈물도 없는’ 감찰요원 동명수(류승범)는 표종성의 아내 련정희(전지현)를 스파이로 지목, 표종성을 옥죈다. 종성이 믿고 따르던 북한 대사 리학수(이경영)의 목숨마저 ‘죽거나 혹은 (더) 나쁠’수 있는 상황. 표종성의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의 음습한 기운을 머금은 스토리는 기존 첩보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류승완은 이념의 대립을 꺼내들기 보단 울화통 터지는 (억울한)상황 한 가운데 놓인 한 남자의 신념과 그 신념을 무너뜨린 욕망들에 집중한다. 어떻게 보면 두 개로 쪼개진 남북이라는 정치적 색채는 이야기를 보다 극적으로 주조하는 요소일 뿐, 류승완의 타깃은 인간의 고독에 정 조준돼 있다. 실제로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들의 대결양상은 남북의 대립이 아닌 개인의 욕망으로 바뀌는 모양새를 취한다. 특기한 건,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고독이, 심리묘사가 아닌 액션 수위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베를린>의 액션은 그것이 ‘액션을 위한 액션’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성취감이 크다.
영화는 지독할 정도로 하정우를 위험 속으로 내몬다. 120여분 동안 하정우의 ‘육체단련기’를 보는 듯한 인상이 들 정도다. 책상 모서리에 찍히고, 둔탁한 물체에 맞아 쓰러지고, 유리창 틀 사이를 떼굴떼굴 구르다가 보호막 없는 시멘트 바닥 아래로 댕강 떨어지는 하정우는 <황해>의 구남만큼이나 서럽고 고독해 보인다. “하정우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꼴보기 싫어 편집해 버렸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영화가 표종성이라는 인물에게서 보고자 한 게 무엇인지가 읽힌다.
심지어 류승완과 그의 오랜 단짝 정두홍 무술감독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휘하고 싶어 이 날만을 벼르고 벼려왔다는 착각마저 인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장기인 아날로그 액션을 몸에 두르고, 그 위에 새로운 에너지를 이식한다. 덕분에 <베를린> 속에서 할리우드 액션 영화 특유의 정갈함도 있지만, 맨몸이 부딪쳐 만들어내는 류승완-정두홍표 충돌의 쾌감 역시 죽지 않고 살아있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하정우가 ‘남조선 여성’들 마음에 불을 질러놓을 기세로 고난위도 액션과 묵직한 멜로를 오가는 사이, 류승범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연기를 펼쳐 보인다. 그 어떤 배우가 연기해도 류승범이 만들어낸 동명수의 느낌은 따라할 수는 없을 거다. 이건, 류승범만이 할 수 있는 연기다. 전지현은 수동적인 캐릭터에 머물 수 있었던 련정희에게 무게감을 부여한다. 절대적 비중은 작지만, 상대적 비중은 작아 보이지 않는다. 수컷들로 가득 찬 영화 현장에서 주눅들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도둑들>에서 보여준 발랄한 이미지의 대척점에서 색다른 매력을 보여줬다는데 의미가 깊다. 전지현의 전성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쉬운 게 있다면, 알고 보면 어렵지 않은 이야기가, 영화를 볼 땐 어렵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건, ‘뭔가 있어 보인다’는 느낌과도 다르다. 풀어놓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쪽에 더 가깝다. 이는 수많은 등장인물과도(영화에는 남북한 외에 CIA, 러시아, 아랍, 이스라엘 등 여러 조직이 그물망처럼 엮어있다) 무관하지 않다. 등장한 모두를 확실하게 책임지지 못 할 거면, (몇 개는) 과감하게 생략하는 게 더 심플해 보일 수 있었겠다. 하지만 <베를린>은 묵직한 에너지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호방한 영화다. 액션을 사랑하는 감독의 열망과 대규모 자본이 결합해 각자의 경쟁력을 극대화한 영화이기도 하다. 류승완의 액션은 진화중이다.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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