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트리오’가 내놓은, 2004년 일본 최고의 걸작!
<피와 뼈>는 연출, 이야기, 연기의 조화가 눈부신 작품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각 분야의 거장들이 의기투합해서 내놓은 결과물이기 때문. 최양일 감독과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로 인연을 맺은 양석일이, 너무 방대해서 감히 영화화를 엄두내지 못했던 자신의 소설을 다시 한번 최양일 감독의 손에 맡겼다.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 역시 오랜 지인으로 지내온 감독의 영화에 연출과 주연을 겸하던 그간의 묵계를 깨고 14년 만에 순전히 주연 배우로만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최양일 감독은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로 양석일 작가에게 그의 주옥 같은 활자들이 스크린을 빌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으며 “그가 없었다면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란 말로 기타노 다케시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이들 삼인방이 각 분야의 가장 뛰어난 실력자라는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 <피와 뼈>는 그들에게 쏠렸던 기대에 부응, 키네마준보와 닛간스포츠 영화대상 등 일본 내 각종 영화상을 휩쓸면서 2004년 일본 영화계가 거둔 최대의 수확으로 남게 되었다. 원작이 보증한 장대한 스토리, 기타노 다케시가 펼친 혼신의 연기. 여기에 최양일 감독의 뚝심어린 연출이 기념비적인 결과물을 낳은 것이다.
평생 기억될 이름 석자! 김.준.평. 더는 세상에 없을 파격적인 캐릭터!
<피와 뼈>의 주인공인 ‘김준평’은 영화 속에서 일찍이 본적이 없는, 문제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캐릭터다. 폭력적이면서 몰인정하고 동시에 냉혹하고 잔인하다. 피붙이인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모든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조정한다. 모든 악행을 몸소 실천하는 괴물! 일견 김준평은 이렇게 간단히 정의 내려질 수 있다.
하지만 김준평을 단순히 악당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캐릭터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기엔 좀 더 풍성한 이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준평의 행각에 치를 떨던 관객들도 어느 순간 준평의 사소한 표정과 눈빛 하나에서 북받쳐 오르는 통한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와 증오에서 연민과 측은함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 관객들은 준평이 벌인 모든 악행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주변 이들을 강제로 등돌리게 해서 스스로 절대고독 속으로 빠져들기로 작정한 듯 보이는 김준평은, 그저 비난 받아 마땅한 존재에 불과한가? 그 해답은 관객들의 몫이다.
기획에서 제작까지 장장 6년이 걸린, 최양일 감독의 투혼이 빚어낸 야심작!
1988년, 양석일의 소설 ‘피와 뼈’가 간행되었다. 많은 감독이 영화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최종적으로 제작 판권을 거머쥔 이는 최양일 감독이었다. 하지만 영화로 만드는 과정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원작은 픽션이면서도 현존하는 모델(양석일 작가의 아버지)을 기반으로 재일 조선인 1세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는 당시 격동의 시대 배경, 오사카의 풍광, 재일 조선인 사회의 생활상, 언어 등을 선명하게 영상으로 옮겨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현해탄을 건너와 유랑하는 민족의 비극적 인생을 드라마틱한 엔터테인먼트로 그려내야 한다는 부담도 존재했다. 때문에 원작을 스크린에 되살리는 작업은 상당한 역량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한국 유학을 마치고 영화 <돼지의 보답>을 준비 중이던 최양일 감독은 그의 오랜 파트너인 작가 정의신을 끌어 들여 각본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의 상황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 오사카의 이쿠노(生野)구와 히가시나리(東成)구 등을 다니면서 당시 거리와 생활의 잔영을 담고자 스케치를 거듭했고, 그것을 원작과 세밀하게 대조시키면서 상세한 지도와도 같은 취재 메모를 정리해 갔다. 그 방대한 메모 작업과 병행해 재일 조선인 1세대인 서로의 아버지와 자신의 청춘 시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도 소중한 작업이었다. 가령 아버지들은 어린 시절 어떤 식으로 설을 쇠고 있었는지, 식탁에 올라온 ‘수에’ 는 어떤 음식이었는지, 어떤 놀이가 유행했는지 등등. 자신들의 혈통을 반추하는 이런 작업들은 고단한 것이기도 한 동시에 신선했었다고 두 사람은 회고한다.
그렇게 정의신과 함께 완성한 시나리오는 7시간 반에 이르는 초대작에다가, 어림 잡아도 10억엔은 거뜬히 넘는 제작 규모였다. 어디서 어떻게 촬영할 지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연립주택식 옛 가옥, 다이세이(大成) 거리, 어묵공장, 오사카 역 등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오픈세트 여러개가 필수적이었고, 막대한 시간과 자금에 우수하면서 인내력 있는 다수의 스탭이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얘기였다.
기타노 다케시와 스즈키 쿄카, 일본 최고의 남녀 배우가 조우하다!
다음 문제는 다름 아닌 캐스팅이었다. 감독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고하토>(99)를 촬영 중이던 기타노 다케시에게 직접 원작 소설을 건넸고, 영화화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케시도 처음엔 주저하면서도 소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읽어 버렸다. 재미있고 훌륭한 작품이지만 자신이 해서 되겠나 싶어 처음엔 망설였다는 후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 속의 김준평은 키가 183~4 센티에 몸무게가 100킬로나 되는 체격에 벚나무 곤봉을 휘두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구의 남자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케시는 기꺼이 ‘배우’로서 크나큰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자신이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주제의 작품에 모든 정력을 쏟아 도전해 보겠다는 의지가 발동한 것이다. 어떻게든 되게 만든다! 결국 다케시는 육체와 정신을 통제함에 있어 놀라운 몰입을 보여주었다.
준평의 아내 영희 역을 하기로 작정하고 나선 스즈키 쿄카도 마찬가지였다. 원작의 재미에 이끌려 이영희라는 여자의 일생을 연기해 보고 싶다는 마음은 강했지만, 20대부터 70대까지 표현하는 연기가 부담이 되었던 것. 제작을 준비하는 기간이 길어지는 것도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이니까 웃으며 하는 얘기지만, 도중에서 접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라는 스즈키 쿄카의 고백은 당시 심중을 헤아리고도 남는다. “하지만 기다림을 플러스로 만들자! 이 배역에 걸맞는 배우가 되자고 생각했죠.” 부드러운 분위기 안에 분명하고도 강한 심지를 지닌 여배우 스즈키 쿄카는 이렇게 해서 영희 역에 생명을 불어넣게 된 것이다.
두 주연 배우를 포함해, 많은 지지자들이 기다리고 기다린 시나리오가 완성된 것은 지난 2003년 가을의 일. 당시 감독은 교토(京都)에서 <퀼>을 촬영 중이었으며 때를 같이 해 스탭들이 먼저 로케 헌팅과 캐스팅, 세트 디자인 등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스타트한 것이 2003년 말이었다. 그렇게 해서 <피와 뼈>는 장장 6년이란 지난한 시간을 거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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