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23일 개봉)
1984년 <파리 텍사스> 그리고 2006년, 가족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이야기
영원한 길 위의 동반자 빔 벤더스 감독이 신작 <돈 컴 노킹>으로 2006년을 열며 가족 이야기 그리고 로드무비로 회귀했다. 술, 마약, 여자 그리고 스캔들로 얼룩진 한물간 중년 스타의 뒤늦은 인생 찾기, 빔 벤더스 감독은 <돈 컴 노킹>으로 오랜 만에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고 의미 있는 드라마로 돌아온 것이다. 2005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 출품작이며 역시 2005년 유럽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특히 <돈 컴 노킹>은 1984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기도 한 <파리 텍사스> 이후 20여년 만에 작가이자 배우인 샘 셰퍼드와 재회하여 작업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 짧지 않은 세월의 흐름 만큼이나 달라지고 변화했을 두 사람은 여전히 끝없이 펼쳐진 길 위에 다시 한 번 가족과 인생,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1984년 <파리 텍사스>, 말을 잊고 기억을 잃고 아들과 아내를 놓아버렸던 남자 트래비스가 찾아가던 화해와 구원의 여정은 2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황량한 대지 위를 묵묵히 따라가며 되풀이된다. 그리하여 2006년 <돈 컴 노킹>, 방탕과 무절제함 속에서 인생을 방치했던 또 한 명의 중년 남자 하워드는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바로 그 순간 놀랍게도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가족과 잊어왔던 삶의 의미를 되찾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빔 벤더스 감독은 한동안의 부진을 떨치고 본인의 장기인 장르로 돌아와 여전히 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건재함 속에는 세월이 주는 깊은 성찰과 여유로움 또한 묻어나 있다.
사막을 가로질러 찾아온 길 잃은 카우보이, 희망을 만나다!
메마르고 광활한 사막을 누비는 카우보이, 전성기의 하워드 스펜스는 미국의 꿈과 낭만을 상징하는 서부극의 대스타였다. 하지만 영웅의 실제 삶은 영화처럼 정의롭지도 올바르지도 행복하지도 못하다. 그의 삶은 술과 마약, 여자 그리고 온갖 스캔들과 추문으로 얼룩져 있다. 젊은 시절 그에게 안겨진 명성과 돈이 이끈 방탕한 생활은 이제 그의 유일한 도피처이다.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나락만이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갈 곳은… 그가 30여년 전 떠나온 뒤 한 번도 돌아가 본 적 없는 바로 그곳, 고향이다. 네바다 엘코, 돌아온 고향에는 아직 어머니가 살고 있고 과거의 흔적이 스치듯 남아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는 무절제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그의 옛 연인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서부 어딘가 자신의 아들 혹은 딸이 자라고 있음을 알게된 하워드는 그곳으로 다시 무작정 떠난다. 몬태나 뷰트,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그곳에서 그는 옛 연인 도린과 성인이 된 그의 아들 얼 그리고 또다른 딸 스카이를 만나게 되고 그들 모두는 세월을 역류하며 얽혀든다. 거부하고 또 다가가고 또 밀어내도 그들은 기쁨과 고통, 혼란 속에서 점차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해 나간다. 사막을 가로질러 찾아온 그곳에서 하워드는 잃어버린 시간과 되돌릴 수 없는 열정을 깨닫지만 그를 구원할 희망의 끈인 가족의 인연과 사랑을 또한 발견한 것이다.
사랑과 인연, 화해 그리고 구원을 향한 영원한 로드무비!
빔 벤더스와 샘 셰퍼드의 이 영원한 로드무비에는 서부극의 낭만과 미국의 꿈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 숨쉰다. 길은 희망이고 빛이 되어 다시금 돌아온 것이다. 기억의 편린을 조합하고 길 위를 흐르는 시간 속에서 가족을 복원해가던 20여년 전의 여정은 어느 날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삶을 허비해버린 21세기의 중년 남자에게도 뒤늦은 후회와 함께 찾아온다. 그리고 그 역시 같은 길을 따라 복원해 나간다. 가족을 인연을 인생을 다시 짜맞추어가는 이 사랑과 비극의 코미디 안에는 더 이상 불편한 실험도 난해한 철학도 과장된 감정도 없다. 이야기는 물 흐르듯 흘러가고 캐릭터들은 당연히 있어야할 자리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며 잔잔한 감동이 영화의 끝자락에 머문다. 영화 속 하워드에게 만큼이나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도 복원이며 구원인 것이다. 반복되어 돌아온 그 시작점에도 길은 여전히 눈부시게 열려 있다.
20년 만의 필연적인 만남, 빔 벤더스와 샘 셰퍼드의 해후!
1984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파리 텍사스>. 감독 빔 벤더스와 시나리오를 쓴 샘 셰퍼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성과물이었다. 따라서 그 후 20년 동안 <파리 텍사스>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두 사람이 다시 뜻을 모아 새로운 작품을 작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것이다. 빔 벤더스 스스로 ‘20년의 근신’이라고 칭하는 오랜 기간의 침잠 끝에 두 사람은 다시 뭉쳤다. 빔 벤더스는 샘 셰퍼드를 찾아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3년 동안 두 사람은 쓰고, 읽고, 의견을 나누며 검토하고, 조정하여 수정하고, 다시 쓰고, 그렇게 한 씬 한 씬 진행해 가며 시나리오를 완성해 나갔다. 그것은 대단한 과정이었고 감독으로서 굉장히 엄청난 노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정말 참는 법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다는 빔 벤더스 감독.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모든 이야기들이 완성됐다. 다시 한 번 서로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고 발전시켜 만들어낸 합작품, 영화 <돈 컴 노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좋은 와인처럼 긴 시간의 숙성이 영화를 더욱 깊이 있고 성숙하게 만든 것 또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7명 각양각색의 개성을 가진 최고의 배우들이 이루어낸 최상의 앙상블!
빔 벤더스와 샘 셰퍼드의 인연은 시나리오만이 다가 아니었다. <파리 텍사스>를 작업하며 빔 벤더스는 무릎까지 꿇으며 직접 트래비스 역할을 연기해줄 것을 샘 셰퍼드에게 제의했지만 단호히 거절당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운이 좋게도 당시 해리 딘 스탠튼이라는 그 이상의 배우를 찾아낼 수 있었기에 작은 에피소드로 끝이 났지만 빔 벤더스의 아쉬움은 내내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돈 컴 노킹>을 작업하며 샘 셰퍼드는 각본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찌감치 주인공 하워드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오랜 바램이 실현된 것. 그 뿐만이 아니다. 이야기에 하워드의 옛 애인 도린의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 제시카 랭을 떠올렸던 빔 벤더스는 그녀 역시 캐스팅하는 행운을 얻었다. 제시카 랭과 샘 셰퍼드, 1982년 이래 한 집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1984년작 <컨츄리> 이후 상대역으로 함께 연기한 적이 없는 그들에게도 <돈 컴 노킹>은 특별한 작품이 되었다. 영화 속 두 배우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완벽한 호흡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두 아이들, 하워드의 아들과 딸인 얼과 스카이는 캐스팅 보드의 젊은 배우들 중에서 찾아냈다. 캐나다 출신의 사라 폴리는 이미 다양한 인디영화에서 눈에 띄는 연기를 선보이며 주목을 받은 배우이며, 신인 가브리엘 만은 영화 속에서 부르던 3곡의 노래를 직접 연주하는 타고난 재능을 보여주며 빔 벤더스 감독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들 외에도 그 옛날 <워터프론트>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아름다운 금발의 여배우 에바 마리 세인트가 곱게 늙은 모습으로 하워드의 어머니로 등장하고,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설 탐정 서터 역에는 팀 로스가 특유의 날카로우면서도 인상적인 연기로 영화의 무게감을 더한다. 그리고 마지막 빔 벤더스 감독은 그리 크지 않은 역이었던 얼의 여자친구 앰버에 페어루자 볼크를 선택했다. 촬영 직전 마지막 수정본에서 그녀의 역할이 커졌고, 조금은 정상적이지 않은 앰버 역을 정말로 잘 해냈다. 이렇듯 7명의 최고 배우들이 모여, 영화 <돈 컴 노킹>의 최상의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특히 캐릭터에 집중했던 작가 샘 셰퍼드의 의도는 본인을 비롯한 이들 배우들의 호연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영화 속 그들의 몸짓, 목소리, 표정, 눈빛은 그 황량하고 메마른 대지와 어우러지며 하나로 녹아든다.
<돈 컴 노킹>의 여정을 완성하는 장소들, 흔들리는 태양과 한 줄기 바람이 그곳에 있다!
타락한 서부극의 영웅이자 우리의 주인공 하워드 스펜스는 미국 서부를 가로지르며 잃어버린 시간, 잊었던 꿈을 찾아 길을 떠난다. 몬태나 뷰트와 네바다 엘코 그리고 유타 모압까지 세 개의 주를 건너는 긴 여정 속에서 하워드는 점차 간절한 자신에게로, 뒤늦게 만나는 분신에게로 그리고 가슴 아픈 옛 사랑에게로 다가간다. 늙고 지친 그에게 그 여정은 초조하고 서글프다. 거칠고 황량한 대지, 인적 없이 퇴락해가는 과거의 영광만을 간직한 텅 빈 도시. 하워드가 발길을 옮기는 그곳들은 빔 벤더스가 사랑해 마지 않는 바로 그 미국의 또다른 모습이다. 몬태나주 뷰트, 주인공들 모두가 한데 모이는 그곳은 그 어떤 곳보다 빔 벤더스 자신에게 무척 특별한 장소이다. 1978년 처음 방문한 뒤로 항상 그의 머릿속에 남아 언젠가는 꼭 영화 속에 등장시키리라 마음 먹었던 것을 이제야 실현한 것이다. 한 세기 전 뷰트는 광산업으로 흥청거렸던,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보다 훨씬 큰 매우 부유한 도시였다. 하지만 이젠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같은 거대한 건물들과 넓은 대로들 하지만 그곳은 텅 비어있고 황폐하며, 마치 유령 도시와도 같은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과거의 영광이 퇴락한 채로 남아있기에 더욱 그로테스크한 그곳의 풍경을 촬영감독 프란츠 러스티그는 선명한 색감으로 한 폭의 회화처럼 화면에 담아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정체된 공기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고독과 절망이 낮게 비추는 태양빛 아래 드리워져 있다.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빛바랜 도시의 그림자는 슬픔으로 얼룩져 있다. 태양은 영원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공기는 충만하며 한 줄기 바람은 지친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워드는 뒤늦은 후회와 절망 그리고 작지만 소중한 희망의 끈을 동시에 발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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