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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또는 낯익은. 동사서독
peacenet 2006-10-06 오전 1:03:08 2002   [12]

 

왕가위식 영화처럼 사연을 노래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한때 동방불패류의 홍콩무협에 매료되어 그야말로 우연히 접했던 영화, 동사서독이 나로선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늘을 가르는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고 접했던 영화는, 그러나 첫 장면부터 기대와는 영 딴판으로 흘러갔다. 관계. 낯선, 또는 낯익은 관계. 그는 그녀를 떠나 그를 만나고, 그녀는 또한 그를 기다린다.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하지만,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사실 잊지 못했던 쪽은 그였으며, 그것을 알지 못했던 쪽이 그녀였을지도.

남녀의 마음이란 어쩌면 모용연과 모용언의 마음과 같아, 사랑과 증오, 그리움과 무관심 혹은 연민과 시기의 양면을 가진다는 걸 깨닫는 데엔 영화상영시간보다는 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마시면 과거를 잊는다는 술, 취생몽사.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 때문이라던가. 그 번뇌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왕가위와의 첫 만남은 마냥 버겁기만 하였다. 황약사가 매년 구양봉을 찾은 까닭도, 또 그가 취생몽사를 가져와선 제가 다 마셔버린 까닭도. 낯설기만 한 이들의 짧은 만남이 결코 가벼울 수 없었던 건, 이들의 현재 진행형인 저마다의 사연 때문이었겠지.

어쩌면 누군가를 뒤로 한 채 그저 무심한 일상을 그려 가는 이들의 모습을, 왕가위는 평범하지 않은 플롯 속에 차곡차곡 재어 넣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에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그 어떤 것도 영화의 주된 내용으로 자리잡지를 못하고, 주인공들은 또다시 저마다의 삶을 꾸린다. 그렇게 그의 영화는, 일상의 연관된 사연들을 수납해선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결코 넉넉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빼곡하게 정돈된 사연들은 이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겐 복잡하게만 다가온다. 침대밑 수납장 안에서 청바지를 꺼내 입기 위해 이것저것 건드려야 할 것이 많고, 또 청바지를 꺼낸 후엔 모두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

왕가위의 영화는 따라가기가 참 아렵다. 짧은 만남은 지나치게 길고, 정작 만남을 위한 긴 여정은 짧게 끊어진다. 세월이 흘러 낯선 장소에서 낯익은 이를 만났을 때, 혹은 그것이 과거에 그러하였던 것인지조차 분간이 되질 않아 어색하기만 한데 영화는 그런 불편함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전혀 새롭고 어쩌면 이질적인 내용으로 스크린을 채워낸다. 내가 막연하게나마 그 느낌을 좋아하게 된 건,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이도 서른 중반을 넘어서고 난 후였다. 그것도 다행히 아비정전을 보았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왕가위는 영영 낯설고 어쩌면 괴짜같은 감독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이었다.

동사서독에 데어서였는지, 이후 한동안은 왕가위의 영화는 보지를 않았다. 열혈남아, 중경삼림, 타락천사, 화양연화. 심지어는 세간을 뜨겁게 달구었던 해피 투게더. 난 장국영이 내게는 영웅본색 또는 천녀유혼의 이미지로 남아 있어 주기를 바랬고,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그랬던 것이, 삶이 점차 회색빛으로 바래 갈 즈음 해서야 그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장국영을 보려고 구양봉을 찾는 것이 아니라, 구양봉을 연기하는 장국영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왕가위의 영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경삼림이 무협영화인줄만 알고 있었다는 내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친구가 생각이 났고,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이제껏 그랬다. 지금쯤 보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복잡하고 난해하고 그래서 또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 그랬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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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1994, Ashes of Time / 東邪西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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