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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와 융합을 가능케 한 사운드 펑꾸이에서 온 소년
andrew1130 2008-01-03 오전 1:02:37 1129   [4]
 


지금껏 보아온 대부분의 영화들은 이야기의 흐름이 분명했다. 인물들이 존재하는 시공간이 일치했고, 이야기의 맥락에 맞게 장면과 장면이 유기적으로 이어졌다. 후샤오시엔의 진정한 첫 번째 데뷔작이라 칭하는 <펑쿠이에서 온 소년>은 그런 영화였다. 난 <펑쿠이에서 온 소년>을 보고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감정적으로 그 소년들의 아픔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남국재견>은 전혀 감정적으로 동화되지 않았다.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지 못하니, 감정의 흐름에 동참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양아치들이 사업을 벌이고, 아버지를 잃고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경찰에 잡혀갔다가 풀려나는 내용은 <펑쿠이에서 온 소년>에서처럼 음울하다. 그러나 내용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받은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감정적으로 동화되기 힘들어서이다. <열대병>도 감정적으로 따라가기가 어려운 영화였다. 그래서 또다시 무언가를 발견하려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았지만, 나무만 보이고 숲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씬바이씬으로 나무들을 조합해보았다. 어떤 이음새로 씬과 씬이 연결되고, 이들이 하나의 전체로서 어떤 인상을 남길 것인지 하고 말이다. 결론은 전체의 내용과 그것이 주는 정서를 볼 순 없었다. 어쩌면 정서를 기대했던 것 자체가 헛수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후샤오시엔이 지향하는 내용에 사용되던 화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화법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보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새로운 화법을 찾아내는 도전에 박수를 칠지언정, 후샤오시엔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의 전달을 극대화하는 형식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용이 안 들어오는데, 형식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새로움을 찾아 떠난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평생을 두고 한 예술가가 가져야 할 숙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미 없고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새로움은 예술적 욕망을 위한 고된 전투이지만, 대중에게는 환영받지 못한다. 대중과 호흡하지 못한다면 영화의 존재의미는 어디 있는 것인가? 계속되는 실험 멋있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그 실험이란 것도 결국은 기존에 있는 걸 해체하고 변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남국재견>을 대단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대단하게 보지 않는다. <게리>와 <열대병>, <남국재견>으로 이어지는 왠지 앞서가는 듯한 영화들.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새로움의 유희. 멋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들 영화는 실험영화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과연 지금 시대에 이들 영화를 대중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차피 이러한 시도들은 영화 이전에 미술과 문학 등의 예술분야에서도 지속되어왔다. 그렇지만 그래서 뭐란 말인가? 자꾸만 새로운 걸 발명하고, 꼬여만 가는 그림과 영화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추상화 한 장에 몇 장씩의 경이로운 평들이 이어지는 등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로 자꾸만 해체하면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다는 건가? 더 이상 새로운 걸 찾지 못한 예술가들의 도피처가 포스트모던 아닌가? 새로운 내용이 아닌 새로운 형식을 위한 파괴. 위 세편의 영화는 왠지 새로운 형식에 도취됐지만, 내용과 정서는 들어오지 않는 영화들이었다. 이쯤에서 나의 푸념과 분노는 접겠다. 어쩌면 형식이 주는 내용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남국재견>의 형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내용에 대해서 논하지는 않겠다. 내가 보기에 형식과 내용이 아무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체 스토리의 시간이 있다면, 플롯시간은 그 스토리 시간 안에서 분절되어 드러난다. 그리고 인물들과 그들의 상황, 배경에 대해 영화 초반에 아무런 설명도 없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대사를 통해 차차 드러나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해서 어떤 식으로 내용전달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내용의 온전한 전달보다는 이러한 형식이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영화의 인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심이 더 갔을 것 같다. 영화는 대부분 주인공으로 보이는 gao를 따라간다. gao가 프레임 안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그 공간에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이다. 그러나 gao가 존재하지 않는 장면도 있다. gao의 여자친구 ying이 양치질을 하는 장면, 그리고 flatty와 pritzal이 삼촌 집으로 찾아가 돈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삼촌의 아들인 ming과 주먹다짐 끝에 flatty의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장면, 그리고 flatty의 사촌인 ming에 의해 flatty와 gao, 그리고 pritzal이 잡혀간 동안, gao가 몸담은 조직의 보스 hsi와 ming이 타이페이 국회의원 li씨의 중재 하에 협상하는 장면에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flatty와 pritzal도 몇 장면만 제외하고는 영화의 대부분에 등장한다. 그러니 영화는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놓고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관객은 알고 인물들은 모르는 드라마틱 아이러니가 없다. 영화의 카메라는 대부분 이 세 인물들이 존재하는 공간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드라마틱 아이러니가 필요하지 않은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이들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고, 중국 본토에 있는 심양과 상하이에서 사업을 벌이려고 그쪽 사람들을 만나는 등, 영화의 화면에 보이지 않는 많은 상황들과 사건들이 내재해있다.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그러한 상황들과 정황들, 관계 등을 그 시공간으로 가 담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핸드폰이라는 원격무선통신장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인물들에 걸맞게 인물들을 따라간다. 핸드폰이라는 테크놀로지로 인해 바뀐 인간들의 생활양식에 맞게 영화도 다른 시점으로 인물들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 같다. 편지라는 과거의 통신수단은 쌍방향 통신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실시간이 아니지만, 요즘과 같은 인터넷, 핸드폰 시대는 상대방과의 통신이 실시간이고, 여기 한국에서 저 멀리 미국까지도 한 시공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곳의 상황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남국재견>에서 인물들은 왜 끊임없이 통화를 하는가? 가 아니라 왜 감독은 그렇게 핸드폰 통화를 하는 인물들을 지겹도록 보여주고, 그 통화의 상대방이 있는 공간은 보여주지 않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점이 세 인물이 영화의 대부분의 공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것은 핸드폰으로 통하는 네트워크 시대의 생활패턴과 그 느낌을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시공간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영화의 특성을 거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핸드폰 통화로 인물들의 배경과 처한 상황이 보이고, 이들의 동선이 결정된다. 물론 인물들 간의 대화로도 위와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화와 통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정보에 비해 분절된 파편이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들을 주의 깊게 보아야만 영화의 윤곽이 드러난다. 정보가 단편적으로 찔끔찔끔 드러나면서 쌓여가 결국엔 하나의 완전한 정보가 완성되는 셈이다. 영화에 대한 이해는 이런 식으로 봐야 가능하다. 어쨌든 인물들이 차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기차를 타는 등 어느 지역에서 어느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인물들 간의 핸드폰 통화와 대화를 통해 결정된다. 인물의 개인적인 목적과 이유로 움직인다는 느낌보다는 주위의 영향 하에 쓸려간다는 느낌이다.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야 하고, 가족이 이사를 가고, 보스의 지시 하에 남쪽으로 내려가는 등. gao는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지 못한다. 반면 그의 애인 ying은 사랑을 포기해서라도 자신의 길을 걷는다. gao는 매우 지쳐보인다. 돼지로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한 후 마신 술자리에서 돌아와 변기에 오바이트를 하며 그가 내뱉는 대사에는 그가 주변 사람들의 영향 하에 치여 살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꿈만을 이루길 바라는 자조가 섞여있다. 그가 핸드폰 통화를 하면서 웃은 걸 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핸드폰이 없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이런 gao의 심정을 보여주려 하기위해서라도 감독은 끊임없이 그의 전화통화를 담아냈을 것이다. 이렇듯 전화통화는 2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이별을 의미하는 ying과의 중요한 대화 도중에 flatty로부터 온 것으로 보이는 전화를  받아야 하는 대화의 단절과 주변의 영향이 인물을 옥죄고 괴롭힌다는 상징으로, 또 하나 인물들의 상황정보를 제공하여 영화의 맥락을 완성시키는 도구로서 말이다. 핸드폰이 영화의 맥락을 짚어줌으로 인해서, gao 상대방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카메라가 보여줄 필요가 없고, 이들이 왜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고 행동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러한 정보는 대화와 핸드폰 통화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즉 직접화법이 아닌 고난이도의 간접화법을 펼치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간접화법이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이야기하겠다. tung인가 하는 아저씨와 gao가 밥을 먹으면서 tung 조부의 유산을 노리는 사촌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카메라는 그 두 인물에 집중하다가도 flatty가 등장하자, 그를 따라간다. 그 와중에도 두 인물의 대화는 계속된다. 왜 그랬을까? 이상했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에 flatty도 자신의 삼촌을 찾아가 땅에 대한 자신의 몫을 달라고 협박한다. 사운드와 카메라의 이동으로 복선을 깐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것 또한 특이한 간접화법이다. 이렇듯 영화는 대부분 인물들 간의 대화 분량이 많고 그것을 계속 들려주면서도 카메라는 거기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볼 때가 많다. 그러면 대화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누가 말하고 있는지도 분간이 안 된다.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관객의 눈에 들어와 관객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gao도 그랬을 것이다. 기차 안에서 핸드폰 통화가 잘 안되고, 자신이 통화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도박을 할 때마다 flatty와 pritzal은 방해가 된다. 핸드폰 통화와 주변의 상황의 혼란이 그를 혼란케하고 지치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세상을 썬그라스를 끼고 봐서 온전히 보지 못하고 왜곡되게 보지 않는가? 핸드폰 통화도 직접 그곳으로 가서 눈으로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닌 매체를 통한 간접소통이 아닌가? 음악도 혼란스럽다. 이것이 영화의 배경음악 즉 비디제시스인지, 영화 속의 실재하는 소리인 디제시스인지 관객을 헷갈린다. ying의 노래는 전 장면 기차의 시점샷에서 시작돼, 영화의 배경음악인 것처럼 보이다가, ying의 노래 장면으로 이어지고, 구슬을 바라보는 장면까지 이어지다 끊어진다. 그리고 깊이있으면서도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샷이 바뀌어 ying이 gao를 구슬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음악은 한 장면에서 시작해 끝을 맺지 않고 불규칙하게 여러 장면에 걸쳐있다. 그리고 그 음악이 배경음악이 아닌 영화 속 현실의 음악임이 나중에 밝혀진다. 감미로운 음악도 gao와 ying이 재회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었다. 화면에서도 그렇다. 영화 초반부의 달리는 차의 시점에서 바라본 거리의 생뚱맞아 보이는 그린 계열 화면은 나중에 gao가 개업한 식당에서 손님들을 향해 다가가는 붉은 계열의 카메라와 사운드가 사실 flatty의 썬그라스 색깔과 그의 귀에 꽂았던 이어폰의 음악소리였던 것으로 미루어 그린 계열의 썬그라스를 쓴 flatty의 시선으로 보인다. 당연히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생각했던 부분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다시 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가 영화 초반에 나왔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안정된 정보의 축적과 예상을 할 수 있었을텐데, 영화의 중반이나 후반에 그 정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처음부터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들었다. 몇몇 flatty의 시선으로 느껴지는 필터샷으로 보아 영화는 flatty의 시선으로 이루어지는 영화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 것 같다. 이러한 사운드와 이미지의 혼란의 의도는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인물과 그를 아우르는 주변 상황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인가? 잘 모르겠다. 이 영화에는 재미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시간의 점프와 융합(압축)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영화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게 점프하고, 일반적인 관습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장면들을 뺐다. 왜냐면 앞서 언급했듯이 핸드폰이라는 통신장비 때문이다. 통화하는 상대방의 상황과 전체적인 배경을 설명하는 장면이 없다. 핸드폰 통화의 대화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이 영화의 시간이 장면마다 점프하는 것을 제외하면 장면 안에서는 실제 시간과 똑같이 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인물들이 대화하고 핸드폰 통화하는 시간은 실제의 시간과 같은 템포이고, 핸드폰 통화하는 상대방도 바로 이 시간대에 함께 통화를 함으로써 같은 시간을 공유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보여주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면 영화의 시간은 영화가 만들어낸 왜곡된 시간이 되고 만다. 지극히 사실적인 시간이 흘러가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따라가고 인물들과 직접적으로 상관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시간의 분리가 아닌 융합을 의미한다. 핸드폰 통화에서 일반적인 영화가 쌍방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내 시간을 분절시킨다면 이 영화에서는 한 인물을 중심에 놓고 시간이 흘러가도록 함으로써 영화적으로 분절될 수 있는 시간을 하나로 융합한다. gao와 flatty의 문제를 놓고 ming과 hsi가 협상하는 시간에 두 인물은 경찰서에 갇혀있을 것이다. ying이 노래를 하는 시간은 gao와 함께 있는 방의 시간과 이어지면서, gao와 연관된 시간이다. ying이 양치질을 하다가 전화를 받으러 가는 시간도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 전화가 pritzal이 팔목에 칼을 긋고 전화한 것으로 gao가 그 일로 ying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이들을 혼낸다. 비록 gao가 부재하지만 gao와 연관된 시간들이다. gao가 통화할 때 통화하는 상대방도 gao와 연관돼 있지만, gao가 통화하는 시간이 실제의 시간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상황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gao가 부재한 장면의 시간은 gao와 연관된 시간이기에 실제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세 인물이 기차를 타고 차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는 시간은 그 출발과 도착까지의 시간에서 일부분만을 보여준 시간이다. 일반적인 영화처럼 오버랩을 사용하여 출발과 도착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가는 동안의 시간의 일부를 잘라 보여준다. 여기까지 종합해보면 영화는 시간과 시간을 점프해가지만 그 시간만큼은 사실적으로 흐른다. 여기서 점프한다는 것은 전체 스토리의 시간에서 중간중간 뛰어넘어 연속되지 않는 분절만을 보여주면서 사운드를 통해 빠진 부분들을 채우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보면 장면과 장면은 불연속적이다. 그러나 이 부분 또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인간의 삶이 영화처럼 사건의 연속이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돼 해결되는가? 인간이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 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목표와 주변관계의 여러 가지 상황의 부딪힘 속에서 분명치 않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영화에는 이러한 실제 삶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 예를 들어 ying이 양치질을 하다가 전화를 받으러 가는 장면에서 화면은 누구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고, 당구장에서 gao가 사업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앞서 거듭 언급했듯, 이 영화는 대부분 gao라는 인물을 따라가고 gao라는 인물의 대화의 전화통화를 통해 어떤 상황의 정보가 드러난다고 했다. 즉 gao를 중심으로 따라가기 때문에 gao가 모르는 내용을 관객이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시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ying이 양치질을 하는 의미없고 일상적인 장면은 보여줄 수 있어도 pritzal이 포주에게 빚을 지어 맞았다는 중요한 정보는 그 장면에서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당구장에서 gao가 ying의 전화를 받고 flatty를 ying에게 보내고, 자신은 일을 처리한 후 집으로 돌아가면 pritzal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객은 알게 되는 것이다. 철저히 gao를 따라가며 정보가 획득되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런 원칙에 어긋나는 장면이 있다. flatty와 pritzal이 flatty의 삼촌을 찾아가 돈을 요구했다가 경찰인 사촌 ming에게 맞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는 gao가 존재하지 않는다. gao가 모르는 정보를 관객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 원칙을 고수하고 싶었는지, 장면의 순서를 바꾼다. 이 전 장면인 gao와 ying이 이별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이 전화는 ming에게 맞은 후 flatty가 한 전화다. 그리고 flatty가 맞는 장면, 다음 장면에 술집에서 전화하는 flatty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상적인 순서라면 flatty가 맞는 장면 -> gao와 ying이 대화하다가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 -> 술집에서 gao와 flatty, pritzal이 만나는 장면이어야 순서가 맞다. 그런데 과거의 시간을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할 두 장면 사이에 넣은 이유는? 관객이 flatty가 ming에게 맞았다는 정보를 gao도 모르게 얻기 전에 gao가 flatty에게 전화를 받는 장면을 넣어 flatty에게 대략의 이야기를 듣게 함으로써 전지적 시점이 되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점이 또 있다. 술집에서 flatty가 전화를 끊는 장면에서 바로 gao가 등장한다. 내 추측으로는 flatty가 통화한 사람은 gao였던 것 같다. 전화했는데 바로 등장하다니, 무슨 공간이동도 아니고, 내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flatty가 세차하는 차 안에서 전화통화를 하는데, 그 통화의 사운드가 컷이 바뀌어 밤거리를 달리는 차의 장면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실제의 시간 개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점은 영화의 전체적인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다. 이야기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단편들만을 선택해 보여주는 것은 이 플롯상의 단편들을 통해 누락된 장면들을 상상하고,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누락된 장면들은 플롯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할애를 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도가 flatty가 전화를 하고 바로 gao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연출된 것은 아닐까? 즉 한 샷으로 연결돼 있지만, flatty가 전화하는 모습과 gao가 등장하는 모습 사이에는 장면과 장면의 시간이 점프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하나 사족일 수 있겠지만, 프레임 내에서 인물들은 프레임 내에 위치하기도 하고 카메라 이동으로 프레임에서 빠지기도 한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카메라의 프레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같은 공간에 인물이 실재해도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장면이 있다. 세차를 하는 자동차 내부 장면이다. 화면상으로는 gao만 보이고, flatty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후 orange를 찾아가는 장면 어디에도 pritzal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ming 일당이 이들을 풀어줄 때는 pritzal이 보인다. 무슨 의도로 pritzal의 존재가 보이지 않도록 연출을 했는지 모르겠다. 카메라의 프레임이 만들어낸 단절로 무엇을 이야기할 것 같은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겠다. 영화는 이야기의 전체 윤곽을 보여주는 데 관객의 관찰력과 끈질김을 요구한다. 대사 하나 화면 하나에 집중하고 프레임을 차지하는 모든 공간에 신경을 써야만 영화의 의미파악이 가능해진다. 단조로워보이지만 엄청난 정보가 함축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파악이 어렵고 이러한 형식이 기대할 수 있는 효과에 동의하지 못한다.


(총 0명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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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쿤요   
2010-03-1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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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 The Boys from Fengku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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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급
  • 미상
  • 시간
  • 101 분
  • 개봉
  • 미상
  • 재개봉
  • 미상
  • 전문가영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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