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깊이를 가진 감독, 그래서 예술영화를 만들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감독이 블록버스터를 연출하는 것만큼 관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도 없다. 돈을 떡칠한 상업영화라는 혹평에 시달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한 예술적, 철학적 구원이랄까. 아마 폴 버호벤이 옛날에 <로보캅>을 만들었을 때가 그러했겠고, 대론 아로노프스키가 배트맨을 리부트 한다고 했을 때가 그러했다.(후자는 무산되었다.) 리들리 스콧의 SF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는 이미 숱한 인문학적 해석의 텍스트로 사용되었을 만큼 성공한 ‘철학적 상업영화’이다. <노아>는 바로 이 계보의 끝에 놓여있는 영화이다.
종교색이 강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안해도 된다. 영화에 창조, 타락, 심판이라는 기독교의 모티프가 나오지만 전체적인 색채와 분위기는 신, 천사, 괴물, 인간 군대가 나타나 마술과 검술을 펼치는 여느 판타지물과 다를 게 없다. 일단 천사와 인간이 뒤엉켜 맞붙는 전투장면과 대홍수의 CG가 스펙타클하며, 태곳적 지구풍경과 동물의 진화과정을 묘사한 영상이 아름답다. 또한 노아를 향한 신의 계시는 언어가 아닌 꿈 속의 환상적인 이미지로 전달되기 때문에 더더욱 종교성은 희석된다. 만약 신의 음성이 직접적으로 노아에게 들렸다면, 판타스틱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순식간에 성극이 되었을 것이다. 상상해보라. 스크린에서 “노아야, 방주를 만들거라.”는 음성이 들리는 순간 객석을 메울 오글거림을. 이렇듯 비기독교인이라도 전혀 거부감 없이 관람할 수 있게 한 감독의 섬세한 배려가 돋보인다. 외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려 평점 테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이니 말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기독교 모티프에 대한 재해석은 사뭇 전복적이고 도전적이다. 원작 성서 신화에서 악의 화신이자 타락한 천사였던 사탄은, 영화 속에서 애끓는 사랑 때문에 신을 거역하고 돌무더기의 흉측한 몸에 갇힌 채 인간 곁에 머무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들의 활약 덕에 영화의 판타지적 면모와 웅장함은 배가되고, 보수 기독교인들의 분노는 커져간다. 기독교 희대의 악역을 굿맨으로 격상시켜놓았으니 열이 받을 만도 하다. 이는 배신자 유다를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한 뮤지컬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처음 접했을 때 기독교인들이 느꼈던 당혹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악인이 선인이 되었다면 이제 남은 도발은 선인이 악인이 되는 반전이다. 이 역할은 노아가 맡았다. 구약성서의 창세신화에서 그는 당대의 의인으로 나온다. 오죽이나 의인이었으면 야훼가 홍수로 인간을 멸종시키더라도 노아는 살려주겠다고 했겠는가. 그러나 극 중 노아는 방주를 만들 때까지만 해도 나름 성실하고 정의로운 인물인듯하지만, 뒤이은 두발가인의 공격과 대홍수의 쇄도로 인해 내면이 점차 허물어져간다. 그는 홍수가 끝나면 방주에 보존한 동물들을 풀어준 뒤, 그들 자신도 악한 인간이기 때문에 신의 심판을 받아 마저 파괴되어야 한다는 광기 어린 집착을 영화 종반까지 고수한다. 심지어 손녀의 탄생을 저주하고 입에 칼을 문 채 방주 안을 샅샅이 뒤지며 갓난 아기를 살해하려 한다. 폐쇄된 방주 안에서 벌어지는 노아의 서스펜스는 신의 이름을 빙자해 그간 인류 역사에서 자행돼 온 온갖 종류의 잔인한 살상과 폭력을 섬뜩하게 상징한다. 절대자의 존재를 배경 삼아 추동되기 때문에 어떠한 합리적 필설로도 종교인의 폭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여전히 지구촌 어딘가,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진행중인 이러한 종교적 광기에 대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영화적 대답은 무엇일까? 스크린에서 그 답을 만나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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