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영화를 보면 스토리 라인만을 보고 재미없다 재미있다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는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다 없다 라는 사실만을 가지고 제대로 된 영화니 아니니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영화 중에는 스토리 위주로 만든 영화가 있고 현실성을 중시해서 만든 영화도 있다. 하지만 내가 여태까지 보아온 김기덕의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위의 것들을 원한다면 굳이 김기덕의 영화를 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유쾌한 오락거리를 원한다면 광복절 특사를 보러가야 함이 마땅하다. (전작인 주유소 습격사건만은 못하지만 광복절 특사도 잼있더라...)
시사회를 보고 나오는 길에 같이 간 후배가 김기덕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 하나같이 입을 다문다고 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미있다 재미없다라는 말 한마디로 표현하기엔 김기덕의 작품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 중 <수취인 불명>, <악어>, <섬> 등은 흥행에 참패한 영화이기에 어차피 세인들의 입에 오르 내릴 일 없이 매니아들에 의해서만 평가 받았지만 그러나 <나쁜 남자>의 경우 드라마 <피아노>의 성공으로 인기 상승 중이던 조재현 덕분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김기덕의 작품을 보게 되었고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은 스토리 라인이나 여성에 대한 비하(개인적으로 이것은 오바라고 생각한다) 또는 상영관을 나설때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찝찝함 때문에 그의 작품을 서슴없이 쓰레기라 비난하기도 했다.
이번 영화... <해안선> 조재현보다 훨~씬 더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장동건이 출현했다 하여 크랭크인 전부터 많은 관심을 보였던 지라 시사회 좌석이 꽉 차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문 가운데 뒤에서 들리는 여자들의 목소리... 보초서던 두 군인을 죽인 것은 김상병이나 강상병이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강상병의 얼굴이 언제부터 흐릿하게 흔들려 보이기 시작했는가에 촛점을 맞춘다.
처음부터 간첩을 잡겠다는 투철한(?) 군인정신을 발휘했던 강상병에 비해 군복무기간 동안 아무일 사고 없이 무사히 제대하기를 바랬던 김상병은 미쳤지만 자신의 절친한 동기였던 강상병을 막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며 해안선에 들어갔다 간첩으로 오인되어 사실된 애인때문에 미쳐버린 여자를 범하고도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서슴없이 낙태수술을 감행하는 군인들 속에서 유일하게 죄책감을 느낀는 인간이다. 그런 그가 총을 잃어버리고 연병장에서 기합을 받다가 뒤돌아본 곳에서 자신의 총을 가지고 서있는 강상병을 발견하게 된다. 어째서 그만이 강상병을 발견하였으며 어째서 그 시점부터 강상병의 얼굴은 흔들려 보이기 시작하는가... 마지막 장면쯤 나오는 명동에서의 강상병은 흔들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흔들리는 강상병은 강상병이 아니라 결국 김상병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어떤 심리의 발로라고 볼수 있을 것 같다. 친구에 대한 연민과 여인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총을 잃어버린 불안감과 군대라는 조직에서의 불합리성에 대항할 수 없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도 없는 심리가 강상병의 환영을 만들고 그것을 빌미로 자신의 감정을 대신하여 평소에 증오해 왔던 후임병과 그 사실을 눈치챈 또 다른 후임병을 살해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해안선 앞에 놓인 푯말에는 7시 이후로 접근하면 간첩이라고 간주하여 사살할 것이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다. 그것을 철칙으로 믿고 까라는 대로 깐 강상병... 그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미쳐버렸는가... 조직과 사회가 내거는 규칙이자 철칙을 지킨 결과 그는 사회가 주는 표창장을 받았으나 이미 마음은 말할 수 없는 혼란과 황폐로 미쳐갔고 군대가 지켜야 할 마을 사람들은 커다란 비극을 맞이해야 한다. 과연 강상병이 갖고 있는 왜 잡아야 하는 지도 모르고 간첩을 잡아야 한다는 신념처럼 우리 또한 조직과 사회가 우리에게 던져준 어떠한 문제들을 이유없이 쫓아만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전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이며 평화가 아닌 휴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지낸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도 겉으로는 평화가 감도는 모습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여기저기서 또는 우리의 내면 속에서 이미 많은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고 있기에 총을 들고 있지 않을 뿐 휴전을 가장한 전시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영화 <해안선>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