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지역갈등, 부동산 문제, 노사갈등, 교육문제, 빈부격차부터 시작해서 이제 노노갈등, 세대갈등, 비정규직 문제, 인구감소 등의 문제들이 서서히 외연을 넓히고 있다. 한국 뉴스에서 나오는 뉴스거리들은 거의 이런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고, 앞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뉴스들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연평도 포격과 같은 북한의 도발 정도? 아니면 9•11 테러 정도? 이 정도 나라라면 거의 멸망하고 만 조선 말의 상황 아닌가? 영화 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났다. ‘또 하나의 약속’이란 제목이 대충 가족애를 기반으로 하는 가족영화 정도로만 생각됐는데 이 영화, 그 무거운 시대적 아픔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압도됐다. 문제는 더 있었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뭔가 가미가 된 것은 있겠지만 이 영화 속 세상이 지금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왔고,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니 솔직히 끔찍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결코 대종상이나 청룡상 영화제 후보에 끼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감히 재벌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영화가 제대로 극장에서 상영될지도 의문이다. 즉 아슬아슬한 영화다. 한국은 엄연히 경제적 부자와 빈자가 있다. 문제는 경제적 부자가 빈자를 마치 나사 부품 다르듯 하고 있고, 무슨 문제가 터졌을 때, 다 돈으로 입막음 할 수 있는 그런 사회다. 그건 피해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양한 엘리트들 역시 다 돈으로 입막음 시킬 수 있는 그런 나라다. 그래서 문제가 터지면 사회적 빈자들은 부자가 내미는 돈에 알아서 기어야 한다. 그래야 희생당한 가족이나 친구들 덕분에 돈도 좀 만질 수 있고,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누군가의 희생이 바로 나의 행운이 될 수 있는 그런 사회, 이런 속에서 각 개인은 그냥 파편화되고 있고, 희생되고 있고, 다들 모른 채 하고 살게 된다. 누군가의 희생을 모른 척 하기만 하면 힘들지 않게 되는데 뭔 일을 못하겠나? 한국은 이렇게 살고 있다. 아파트 사이에 있는, 이웃의 통로를 막는 무거운 철창, 담벼락들은 사실 상대의 외면이 아니라 희생을 통해 상대적 이권을 더 쥐려는 한국인들의 진정한 참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부동산 문제 역시 집주인이 가격을 비싸게 올려서 집 없는 사람들로부터 자산을 가져가려는 것이 원인이었던 것 아닌가? 그런 얄팍한 술수에 모든 국민들이 달려 들었고, 특히 노년계획을 집값으로 해결하려 했던 세대들이 그 뒤에 있었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상처를 당해도, 그리고 누군가가 전세든 월세든 부담이 돼서 망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집을 살 수 있는 인구가 줄고 있는데 집값 폭락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는 위험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는 한국은 이제 빚을 권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빌려서 집사는 한국의 가계는 이제 1000억이 아니라 1000조의 빚 덩어리를 안고 살게 됐다. 알게 뭐야 하는 인식이 팽배한 한국, 이런 곳에서 남의 문제는 남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좀 모순된 모습이 있다. 현재 아기가 주니까 아기 낳으라고 각종 캠페인도 벌이고 국가가 나서서 공익광고까지 제작하고, 각종 세제혜택도 준다. 하지만 별로 크지 않은 혜택이다. 그리고 그런 혜택 받으려고 2세를 출산한다? 글쎄, 그런 능력자들이 한국사회에 얼마나 될까? 특히 88세대니, 잉여세대니 하는 세대들이 과연 결혼해서 아기 낳을 능력이 얼마나 될까? 설사 된다고 해도 큰 부담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아기 하나 낳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자기 자식들이 누군가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면, 그래서 아기들이 부모 빼곤, 평생 누군가로부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연 행복은커녕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상황이 박탈되는 것이 명확할 때, 과연 그래도 아기 많이 낳겠다는 욕심을 부릴까?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빈곤한 것들과 귀하신 부자님들과의 전쟁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리라. 1심에서 어설프게 판결 받아서 이겼을 수는 있지만 2심은 물론 3심인 대법원까지 그럴 상황이 벌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한국에서 공동체 내의 평등한 관계는 사실 지금까지 없었고, 무시당했다. GDP만 올린다면, 그리고 그런 혜택으로 집값만 오른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한국사람들이 넘친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영화 속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좋은 해결은 유토피아에서나 기대할 노릇이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정의감이 있었다면 그 전에 다 해결됐을 것이다. 그러나 여긴 한국이고,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 영화 속 불편한 이야기들은 가슴을 울렸다. 최근 1000만 관객을 이끈 ‘변호인’란 영화의 열풍은 아마도 ‘우리 좀 살려 주세요’라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긴 ‘변호인’이란 영화 보고 종북이네 좌빨이네 하고 몰아붙이는 한국의 극우세력들이 엄존하긴 하다. 과연 그들이 ‘또 하나의 약속’이란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고 종북이네 좌빨이네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회적 약자가 바닥까지 간 상황에서 그들의 도전이 사회적 부자들을 건든다면 그것은 대역죄인이 되고 마는 한국에서 영화 속 택시기사님보고 차라리 그만 하세요 하고 충고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심정에서 한국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그리 똑똑해 보이지 않는다. 부동산 폭락을 막으려고, 국민연금을 내줄 인간들이 부족하니까, 그리고 스마트폰처럼, 부자들이 주인으로 있는 회사의 상품을 많이 사줄 소비자들이 부족해서, 그리고 비정규직으로 불만 없이 일하면서, 사표도 필요 없이, 나가라고 할 때, 아무 소리 못하고 나가야만 할 그런 인간들이 부족하니까, 그런 것들을 보충하기 위해 아기들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아기 낳을 좋은 이유는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로 인해 아기가 필요하다면 보호받지 못할 아기가 과연 제대로 커줄지도 모르지만 계속 한국에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현재 러시아인으로 한국의 쇼트트랙 대표팀의 메달 획득의 최대의 적이 된, ‘빅토르 안’처럼 한국을 떠날 수도 있겠다. 사실 미래세대가 과연 이런 한국에 태어나고 싶을까? 그들의 선택권이 있다면 한국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보호받지 못한 빈자들은 앞으로 계속 삭제될 것이다. 아파서, 그리고 돈이 없어서 등 이런 저런 이유로 말이다. 그래서 한국은 인구가 줄고 있다. 인구가 준 이유는 바로 자기 사람들이라고 보호를 해주는 제도나 권력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능력도 안 되는 사람들이 2세를 나을 수도 없고. 이런 것들을 타개하기 위해 재벌과 같은 부자들은 해외 인력으로 그 부족분을 보충하려 할 것이다. 솔직히 해외 인력들은 사고를 당해도 한국인들보다 보호를 덜 받을 것이고, 더 싼 값에 쓸 수 있으니 당장은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큼 한국인들의 구매력을 보충해줄지, 부동산 가격을 계속 지탱해줄지, 그리고 국민연금을 얼마나 보충해줄지 모르겠다. 그들 역시 어차피 소모품 인생으로 한국에서 살 텐데 인간적으로 불행해 보인다. 어차피 해외 이주민들과의 갈등은 한국의 사회적 빈자들의 몫이니 부자들이 고민할 것도 아니니, 참 한국의 부자들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다. 그러니 이제 아기 좀 낳으라는 권유, 그만 했으면 좋겠다. 지금의 인구도 사실 많다. 불쌍한 노동자들을 보호도 못 해주면서 그들에게 너 아니어도 줄 선 인간들 많다고 협박을 할 것 아닌가? 미래의 아기들의 노동력이나 여러 가치만 소비하려고 했지, 어차피 제대로 대우해주지도 않을 것이지 않은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어떤 불쌍한 나라들보다 낫다고 위로할 것인가? 그럼 선진국 수준으로 인간을 대우해주는 그런 나라는 계속 외면할 것인가? 한국의 반성이 없다면, 한국인들의 인식 전환이 없다면, 한국의 인구는 줄어야 한다. 인구가 너무 줄어야 그나마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게 한국을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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