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이 되어 있을수 있고, 편의상 말을 짧게 합니다.
또 대사는 일부 틀릴 수 있으나 느낌을 전하기에 충분하리라 판단합니다.
마지막으로 오타가 많을 수 있으니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을 적어놓은 것이니만큼 의견을 주시면 감사히 수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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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원히 늙지 않고 영생을 누리는 삶.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영생은 늘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러한 혜택아닌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영생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삶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피곤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400년을 살아온 외계인은 늙지도 않고 살아간다.
부는 축적이 되었지만, 거듭되는 사망신고를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는 정말 인복이 타고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변호사를 만났으니까.
아마 지금 당장 영생을 얻는다면, 이러한 수고를 행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기란 힘들 것이다.
영화 '어바웃타임'에서는 하루를 두번씩 살던가 과거로 돌아가 추억을 나누거나 하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하루를 평생같이, 순간을 소중히 사는 것 말이다.
물론 그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 있고, 정지된 시간을 반복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평생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과학이 발전하고 뭔가 나타나 영원히 늙지 않고 사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어떠할까.
영화 '인타임' 처럼 그 시간을 금액으로 계산해서 살아갈것인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점치기는 어렵지만, 영화라는 허구아닌 허구에서는 논할 가치가 충분하다.
가정을 해서 우리의 삶이 영원하다면 어떻게 다가올까.
'죽음의 중지(주제 사라마구 저)'에서는 노화가 진행되지만 죽음이 없는 상태를 논한다.
큰 사고로 치명상을 입어도 죽지 않고, 모두들 그러한 상태로 살아간다.
양로원은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죽음이 사라져 장례업체는 존재가 필요없는 상태.
만약 이러한 일이 발생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까.
물론 이같은 가정들은 '모두'가 죽지 않을 때 발생이 되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도 이러한 것이 아닌 '나 혼자'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도민준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 처럼 살아가는 아니 어찌보면 그보다 더 긴 삶을 살거나 살아갈지 모르는 존재들이 있다면 어떨까.
그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피를 갈구하고 피가 없으면 서서히 죽어가는 존재들이다.
물론 피만 있다면 영생을 살지도 모른다.
오염된 피를 먹으면 죽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것을 잘 피해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아담(톰 히들스턴)과 이브(틸다 스윈튼)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셰익스피어처럼. 때로는 저명한 음악가인 것 처럼.
물론 그녀의 동생 애바(미아 와시코브스카)도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는 늘 검은색 옷을 입고 살아가고 그녀는 늘 흰색(아이보리)옷을 입고 살아간다.
그녀는 디지털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고, 그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충만하다.
이렇게 서로 맞지 않을 것 같은 둘은 연인이다.
창세기전에 나와있는 인류의 시조.
그들의 이름을 딴 연인.
그들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영화는 조명하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하듯.
그들이 처음부터 시작이었건, 중간 그 어느즈음에 만들어졌는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연인이고, 그들이 조금만 신경을 쓰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지만, 그들 중 하나는 죽고 싶어한다.
계속해서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삶이란 지루하기만 할 뿐인 또하나의 오늘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머리에, 심장에 총알을 박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그 사랑이 워낙 강렬하기에 지루하고 덧없는 일상을 넘고 죽음조차 넘어서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 가볍게 생각하라는 그녀이지만, 가볍지 않은 그들의 관계는 그 무게를 더해간다.
그가 왜 음악을 하는지, 그녀는 어떻게 사물을 만져보기만 해도 그 물건의 연도를 아는지 알 수 없다.
그는 기타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음악을 만든다.
그에게는 인간친구가 있고, 뭐든 그에게 가져다 준다.
그와 그녀는 왜 떨어져서 살고 있을까. 그렇게 사랑하면서.
이와 같은 물음은 말로(존 허트)가 대신한다.
물론 답이 나오진 않지만.
그들은 왜 고유의 옷 색을 가지고 살아갈까.
무언가 나쁜 마음을 가졌기에 그러할까.
그녀는 늘 흰색계열의 밝은 옷을 입고 있지만, 단 한번 검은색 옷을 입는다.
그의 인간 친구 이안의 시체를 유기할 때.
그렇다면 범죄를, 나쁜 짓을 저지를 때 그러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누군가의 피를 섭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단지 목숨을 빼앗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한 피일 경우이지만.
어찌보면 누군가에게 해를 입혔을 때, 그들은 검은색 옷처럼 보여질지 모른다.
그는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범죄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반면 그녀의 동생 애바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그녀는 자유롭고, 즉흥적이다.
그녀는 이안의 목숨을 빼앗고 피를 갈구한다.
화려한 옷처럼 자유로운 그녀는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하고, 늘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심지어 바깥조차 나가지 않고 교류하고자 하지도 않는) 아담에게 쫓겨난다.
그런 그들에게 이기적이라면 위선자라며 욕을 하고 그녀는 그렇게 사라진다.
그렇다 그녀의 말 처럼 그들의 위선적이다.
죽음을 갈구 하면서도 '사랑'때문에 살아가고 있고, 당연하듯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며 피를 섭취한다.
결국 살아가고 있고, 피를 섭취하면서 말이다.
단지 본능에 따라 살아가지 않을 뿐.
물론 그들이 가장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최상위의 본능은 사랑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사랑이고. 이 사랑은 진짜다.
진정한 사랑.
누군가는 습관처럼, 아무런 감정없이 휘발성으로, 몸을 뒤섞고자 남발하는 이 말이 그들에게는 진짜다.
표현하지 않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들이 결국 살기 위해 몸을 뒤섞고 있는 누군가를 해하지만 그들은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살아야만 하니까.
마치 턴테이블 위에서 늘 같은 방향으로, 그리고 그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만 도는 그들의 춤처럼.
그들은 사랑하기 위해 살아야만 한다. 늘 그래왔듯.
★ 5개 만점
★★★☆(스토리 7 연출 8 비쥬얼 8 연기 8)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쉽다. 그 말은 아무런 무게도 가지지 않고 그냥 달팽이관을 뒤흔들 뿐이니까. 하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힘이되고 희망이 된다. 또 그 말을 하지 않아도 그 감정은 전달되기도 한다. 진짜 사랑이라는, 가벼운 사랑이 아닌 그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사랑하기에 행할 수 있는 행동들이 있고,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 누군가에게 삶이 특권이라면, 그 조건을 말한다면, 그들에게, 감독에게는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짜' 사랑하기에, '진짜'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꿈을 꾸듯 읊조리는 그 말 처럼, 꿈속에 있는 것처럼 사랑하라.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사랑해'라는 말이 얼마나 가치 있는 말인지를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때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장황하게 말을 이어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알고 그는알고,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나도 사랑해'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말하기에 영화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럼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그만큼 그 마음이, 표현이 '진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그녀가 살아가는 조건. 그것이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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