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포스터에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는가?" 이 카피가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누구', 즉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믿고 의지하는가?"를 묻고 있는 영화다.
'믿고 의지하는는 대상'이 곧 마스터다. 마스터는 자신을 이끈다. 스승이며, 교주이며, 주(主)다. 그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내가 될 수도 있다. 나를 더 구체화 하면 나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내면의 그 무엇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그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것이 영화의 핵심으로 읽혀진다. ... 남자 주인공은 신흥종교 교주를, 신흥종교 교주 마스터는 자신의 아내를 믿고 의지한다. 여기서 소개되는 신흥종교는 사이언톨로지교라고 한다. 내가 알기로 사이언톨로지교는 과학을 신봉하고, 외계인을 믿는 종교인데, 영화에서는 아직 외계인까지는 안 가고, 최면을 통한 심리치료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전세계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정도까지의 사상을 만드는 데까지의 단계에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이언톨로지 자체가 아니다. 그 종교가 뭐든 간에 무엇인가를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종교를 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전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자본과 종교의 결탁을 그렸고, 이번엔 종교 그 자체를 파고 들어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의존성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이 사이언톨로지교의 발흥에 대한 소개는 흥미롭다. 최면 상태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곧 영이며 본래의 자신이라고 소개한다. 마치 자신들만의 깨달음을 중시한 고대 영지주의를 모태로 한 것만 같다. 이들은 '기억'을 끄집어 내는 데 집중한다. 최면 상태에서 얻은 정보들이 전생의 것이라고 단정짓는 지점에서 이들의 사이비 종교성이 드러났지만, 현재의 자신이 묶여있는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는 이들이 보유한 고유한 자산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기억의 존재다. 치매에 걸려 기억을 상실한 인간은 그 순간 다른 존재가 된다. 단적으로 인간의 존재는 육체라는 그릇에 담긴 관념이라 볼 수 있다. 영지주의의 관점을 빌린다면 인간은 공간에 부유하는 관념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는 관념과 실체가 맞물린 나사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관념은 실체의 항해를 이끄는 주체다. 그렇기에 인간은 실체에만 집중할 수 없고, 관념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이다.
영화속의 신흥종교는 핵심 사상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에서 '상상'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자신들이 끄집어낸 기억이 실제로는 '상상', 즉 허구일 뿐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다. 사실에 대한 왜곡된 관념이 그들을 이끌고 있는 마스터였지만, 신념은 근거가 필요하지 않았다. 관념의 왜곡이 일어났음에도 종교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이언톨로지교뿐만이 아니다. 신천지와 같은 오늘날의 신흥종교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단지 믿을 뿐이다. '만들어진 관념' 속을 부유하며 울고, 웃고, 만족한다.
관념이 인간 존재를 이끈다. 이것은 왜곡된 관념의 종교단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주인공은 마스터의 관념적 지평을 떠나 다시 모래로 지어진 여성의 곁으로 돌아간다. 자신이 간절히 바랐던 이성에 대한 기억과 환상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것에 대한 욕망 내지는 갈망이 주인공 인생을 이끌고 간 중력과 같은 힘의 근원이다. 그 내용만 바꾸면 누구나 그렇지 아니한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가서, "당신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믿고 의지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자. "어떤 관념이 우리를 이끌고 있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우리의 마스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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