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시간 동안 유지되는 강력한 몰입감...★★★★☆
폴 토마스 앤더슨의 다른 영화들이 그러하듯 <마스터> 역시 첫 장면부터 뭔가 엄청난 놈(!)이 등장했다는 느낌을 풍기며 시작한다. 조니 그린우드의 신경질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바닷가에 한 남자가 보인다. 해변가에 만들어 놓은 모래여인의 음부에 대고 성관계 흉내를 내는 그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표정에서 선뜻 가까이 하기 힘든 정신 나간 놈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혼자 떨어져 바다에 대고 자위를 하고 있거나 동료들이 떠난 후 모래 여인의 옆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그. 프레디 퀄(와킨 피닉스)에겐 모래여인이 유일한 안식처인 듯 하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많은 젊은이들처럼 프레디 퀄 역시 외상 후 장애를 앓고 있는 중이다. 일상에 적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비법으로 만든 알콜로 인한 중독증세, 거기에 분노와 폭력적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잠깐 사진사로 일하다 때려치우고 떠돌던 그는 우연히 숨어든 여객선에서 ‘코즈’라는 신흥종교를 이끌고 있는 랭카스터 도드(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와 그의 부인 페기 도드(에이미 아담스)를 만나게 된다. 첫 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랭카스터와 프레디, 둘의 불안한 관계가 시작된다.
전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개척 시기 한 남자의 집념을 통해 교회와 자본의 결탁이라는 미국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제 카메라를 2차 세계대전 직후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한 젊은이와 신흥종교가 확장되는 과정을 통해 미국 사회가 그 시기를 어떻게 통과해, 여기까지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940, 50년대의 풍경을 느낄 수 있도록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일부러 몇 대 남지 않은 70mm카메라로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했다고 하는데, 이게 화면에서 어떤 효과로 나타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차이를 알만큼 전문적이지 않을뿐더러 온전하게 이를 보여줄 수 있는 스크린이 국내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단관극장 시절 대한극장은 국내최대 스크린 70mm를 강조하는 홍보를 하곤 하였다. 좀 아쉽다) 다만, 인물들의 주름 하나하나를 살피는 클로즈업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사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한 건 아니다. 오히려 매우 평이하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사회부적응자를 훈련시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조련하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그게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스터>는 말 그대로 제자를 교육시키는 마스터에 대한 얘기란 말인가?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바로 이 영화가 엄청나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마스터>의 텍스트는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스터와 제자와의 관계로 읽는 건 너무 당연하다. 다만, 둘의 관계는 마스터에서 제자로 내려가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의존하는 쌍방향적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또는 절절한 멜로드라마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엔 두 가지 방향으로 가지가 뻗어간다. 랭카스터와 프레디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중에 하나는 유사 부자 관계이다. 친아들과 양자 사이에 긴장관계가 보이고, 친아들보다 양자의 아버지에 대한 강한 인정욕구가 도드라진다. 그러나 양자는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던 아버지의 모든 것이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엄밀히 말해 랭카스터는 사기꾼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인 사기꾼과 다른 건 자신이 하는 얘기를 자신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알게 된 후 아버지와 다투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돌아갈 곳이, 그리고 자신에게 유일한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이는 아버지 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아버지 역시 자신을 가장 존경하고 자신의 업적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이 양자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깐, 멜로드라마의 한 방향은 유사 부자 관계인 둘의 사랑에 있는 것이다. 둘이 서로를 부여안고 마당에서 구르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라든가, 둘을 떼어 놓으려는 주위의 반응, 특히 페기의 반응은 분명 질투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멜로드라마로서의 또 다른 방향은 너무 당연하게도 영화에서 보여지는 프레디의 인생 전체가 사실상 도리스에 대한 사랑과 좌절, 그리고 극복이라는 점에서이다. 한 여인으로 인해 흔들리는 인생만큼이나 절절한 멜로가 어딨겠는가.
대게 전쟁 직후에 신흥종교가 부흥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바로 이 점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마스터>를 연출하게 된 가장 직접적 계기라고 하는데, 영화에서 ‘코즈’는 사이언톨로지교이며, 2차 대전 직후 미국에서도 사이언톨로지가 급격한 붐을 이루었다고 한다. 아마 감독은 2차 대전 직후의 미국이 프레디처럼 외상 후 장애, 사회에 대한 부적응이 심한 정신병적 증세에 시달렸으며, 비록 단 번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힘들게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겪어 왔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게 이 영화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스터>는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논리적, 내용적으로 연결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깊이가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마스터>는 대단한 영화지만, 그보다 나에게 더 인상적인 건, 영화의 모호함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강력한 몰입감이었다. 영화는 자주 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내고 작은 주름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살핀다. 조니 그린우드의 신경질적인 음악은 여전하고, 영화는 마치 안개에 쌓인 미로 속을 헤매듯 흐릿하면서 동시에 종잡기가 어렵다. 대체 이 영화는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예측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인다. 이건 <마스터>가 대단히 파격적이라거나 거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현재 컷 바로 다음에 어떤 컷이 올지 궁금해지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137분의 상영시간 동안 유지되는 강력한 몰입감이야말로 그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이 영화에 대한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마스터>를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건,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도 너무 좋지만, 역시 가장 돋보이는 건 와킨 피닉스다. 혹자는 와킨 피닉스의 연기가 너무 강력해 오히려 에이미 애덤스의 일상적 연기가 더 좋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럼에도 <마스터>는 결국 프레디의 영화일 수밖에 없다.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린 사람의 특징을 잡아내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어깨를 구부리고 두 팔로 겨우 지탱하며, 얼굴의 반쪽만으로 힘겹게 이야기하는 와킨 피닉스의 연기는 한 마디로 ㅎㄷ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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