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장르를 가지고 노는 타란티노.. ★★★★☆
쿠엔틴 타란티노가 익스폴로이테이션 무비 특히 그 하위 장르인 블랙스폴로이테이션 무비의 광팬임은, 블랙스폴로이테이션 영화가 더 이상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자 한동안 극장에 가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미 충분히 알려진 사실이며, 1997년작 <재키 브라운>이 그 자장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라고 것도 너무 유명한 사실이다. 거기에 그의 영화에 서부극적인 요소가 풍부히 담겨있는 걸로 봐서 언젠가 서부극을 만들 거라는 전망도 너무 당연하게 생각되는 예측이었다.
서부극에 블랙스폴로이테이션 무비가 결합된 <장고 : 분노의 추적자>(이하 <장고>)는 이처럼 타란티노 본인의 취향이 가장 최고조에서 결합된 한마디로 화끈하며 끝내주는 영화임과 동시에 전작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 이어 역사를 다루는 능수능란함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타란티노 최고의 작품이라 하기에 손색없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워낙 취향을 타는 감독이라 타란티노의 그 어떤 작품을 최고로 꼽아도 수긍할 수 있음)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바스터즈>와 이어지는 측면이 있지만, 둘 사이엔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한다. <바스터즈>가 실존인물들, 예를 들어, 히틀러, 괴벨스와 같은 최고 나쁜 놈(!)들을 등장시킨 일종의 대체 역사 장르 영화라면 <장고>는 소위 스파게티 웨스턴과 블랙스폴로이테이션 장르 법칙을 충실히 따르며 두 장르에 경배를 바치는 영화인 것이다.
도망치다 잡혀 팔려가던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는 현상금을 노리는 사냥꾼 닥터 슐츠(크리스토프 발츠)의 도움을 받아 노예에서 벗어나게 된다. 슐츠의 목적은 장고가 얼굴을 알고 있는 노예농장 관리인들을 죽여 현상금을 챙기는 것이었지만, 같이 다니면서 장고의 아내 브룸힐다(케리 워싱턴)가 악랄한 농장주 캘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노예로 있음을 알게 된 후, 구출작전에 동참하게 된다. 둘은 만딩고 선수를 사겠다는 핑계를 대며 캘빈에게 접근한다.
스토리는 전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며 단선적이다. 주인공인 장고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나쁜 놈들(노예주의자)을 죽이고 아내 브룸힐다를 농장에서 구해내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며, 따라서 장고의 모든 행동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 이 때문에 제이미 폭스의 연기가 좀 경직되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보기에 경직되어 보이는 그 자체가 바로 연기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런 단순함과 경직함에 다채로움을 부여하는 건 무엇보다 닥터 슐츠와 캘빈의 집사 스티븐(사무엘 잭슨)이라는 캐릭터다. 이 둘은 <장고>에서 가장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감히 말하자면 영화의 주인공은 제이미 폭스가 아니라 크로스토프 발츠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다.
둘의 캐릭터는 한 마디로 상극이다. 닥터 슐츠는 백인이면서 노예제를 증오하는 반면, 스티븐은 흑인이면서 웬만한 백인보다 더 흑인을 경멸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디카프리오가 대를 이어 물려받은 것(!)들을 물건 다루듯 하는 순진한 악당이라면, 스티븐이야말로 뼈 속 깊숙이 노예제도의 옹호자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역사도 대입해볼 수 있다.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직후 조선인들이 가장 먼저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건 일본인보다 그 밑에서 일종의 마름 역할을 했던 조선인이라는 사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더욱 더 철저하고 더 잔인하게 굴어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단연코 빛을 발하는 건 닥터 슐츠라는 캐릭터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 중 아마도 현재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일한 캐릭터가 닥터 슐츠일 것이다. 장고가 있지 않냐고? 조금 박하게 해석하자면, 장고는 노예제에 대한 문제보다 자신과 아내라는 개인적 문제에만 천작해 있다고 보이며, 현재 시스템을 긍정하거나 최소한 인정하는 입장이라고 보인다. 예를 들면, 캘빈에게 접근하기 위한 연극이라고 할지라도 개가 노예를 물어뜯도록 방치하는 장면이야말로 가장 상징적이다. 슐츠가 이 장면에서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데 반해 장고는 자신의 무자비성을 과시하기 위해 눈 깜짝하지 않고 이를 조장 및 방치한다(장고가 감정을 드러내려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아내와 연관된 문제일 뿐이다). 그리곤 캘빈에게 말한다. “닥터 슐츠는 이런 장면을 보지 못했거든요” 닥터 슐츠가 조금만 참으면 별 문제 없이 그 농장에서 나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도화선을 당긴 것도 결코 캘빈으로 대표되는 그런 시스템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타란티노가 종전 직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바스터즈>처럼 굳이 남북전쟁 2년 전을 <장고>의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것은 마구잡이로 죽일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북전쟁 2년 전이라면 대부분의 세계에서 노예제가 폐지됐으며, 미국 내에서도 많은 백인들이 노예 제도의 폐지에 목소리를 싣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노예 해방주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그 시점까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놈들은 죽여도(죽이는 장면을 봐도) 별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전편에서 나찌들을 무차별 죽였듯이.
한마디로 노예제도에 대한 경멸을 바탕에 두고 장고와 슐츠가 백인과 지독한 노예주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는 영화 <장고>는 타란티노의 폭력적 미학이 언제나처럼 능수능란하면서 거기에 깊이까지 갖추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165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최고의 오락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한다. 최고의 쾌감을 선사하는 최고의 오락영화, 그게 바로 <장고>다.
※ <장고>는 1966년 세르지오 코부치가 연출하고 프랑코 네로가 주연을 맡은 스파게티 웨스턴 <장고>를 원작으로 하지만, 제목과 주인공 이름을 제외하고 두 영화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아무튼 오리지날 <장고>의 주인공인 프랑코 네로가 타란티노의 <장고>에 카메오 출연한다. 끔찍한 만딩고 경기가 끝난 후 장고에게 와서 이름과 스펠링을 물어보는 노인이 바로 프랑코 네로다. 장고가 장고에게 이름을 물어보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 자주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는 타란티노가 이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광산으로 노예들을 이송하는 3명 중 한 명으로, 장고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그래도 타란티노가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건 아마 <플래닛 테러>일 것이다.
※ 영화 거의 마지막에 악당 중 한 명이 '디장고'라고 하자 장고가 'D는 묵음이라고'하면서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타란티노의 농담이다. 그 악당에게 글씨로 이름을 써준 적이 없으니깐.
※ 오리지날 <장고>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장고가 끌고 다니는 관과 그 속에서 나온 기관총이다. 혹시 타란티노가 장고에게 기관총을 쏘게 하지 않을까 조금 기대했는데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 블랙스폴로이테이션 무비의 대표작인 <샤프트>를 기리듯 장고의 아내 풀 네임이 브룸힐다 폰 샤프트다.
※ 영화 후반부에 좀 의아했던 게,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고 독일어를 하는 노예가 필요하다고만 했어도 충분히, 그리고 쉽고 편하게 브룸힐다를 데리고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 엔딩 크래딧 다 올라간 후에 아주 짧은 쿠키영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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