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본 시리즈... ★★★
북한과 중동 테러 조직의 불법 무기 거래 현장을 감시하던 한국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그곳에서 북한 비밀요원 표종성(하정우)의 존재를 알게 된다. 거래 현장을 덮치려던 정진수는 이스라엘 모사드의 개입으로 작전에 실패하고 상부의 질책을 받게 된다. 한편, 북한 대사 리학수(이경영)는 평양에서 비밀 감찰요원 동명수(류승범)가 온다는 소식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동명수는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표종성의 아내인 련정희(전지현)을 이중 스파이로 지목, 표종성에게 증거를 찾아내라고 압박한다.
존 르 카레의 소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에 냉전시대의 베를린은 10명 중 6명이 스파이였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조금 과장되지 않았나 싶기는 하지만, 냉전시대의 베를린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환경이다. 어쨌거나 그건 냉전시대에 그랬다는 얘기다. 오래 전에 냉전체제가 무너졌고 특히 남북한이 공히 유엔 가입국인 이상 영화의 배경이 특별히 베를린이 아니라, 도쿄, 뉴욕, 북경, 그 어디라 해도 사실은 무방할 것이다.(오히려 홍콩이나 마카오라면 더 그럴싸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영화는 여전히 지구에서 냉전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회인 한국에서 냉전시대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베를린이라는 이미지의 차용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현재 시점에서 ‘베를린’이란 도시가 가지고 있는 냉전시대의 이미지를 차용한다는 건 이미 지나가버린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점에서다. <베를린>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바로 이것이다. 허구한 날 입만 열면 ‘빨갱이’를 달고 사는 남측의 정진수나 당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내는 북측의 표종수나 흘러가 버린 구시대를 상징하고 따라서 필요 없어진 이들의 존재는 남북 모두에게서 버림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베를린>은 이들을 버린 존재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그 무엇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당연하게도!) 오히려 비열한 무엇으로 반추한다. 버려져야 할 구시대와 비열한 현실, 그 사이에서 영화의 주인공들은 혼란 속에 허둥거린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잘 표현되었고 묘사되었는지 와는 무관하게 냉전시대의 베를린이라는 이미지를 차용해 현실의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가 남북한이라는 건 그 자체로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아무튼, 영화 <베를린>은 일단 재미가 있기는 하다. 김정일 사망과 젊은 김정은의 등장이라는 북한의 권력 교체기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의 짜임새도 좋은 편이다. 특히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와 한국에서라면 액션은 무조건 최고라고 인정되고 있는 류승완-정두홍 콤비가 만들어 낸 액션장면들도 대체로 인상적이기는 하다. 물론 나라면 액션보다는 오히려 전지현이 만들어내는 (분명히 전지현이라는 배우의 아우라가 만들어낸다고 느껴지는) 멜로 감성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그럼에도 <베를린>에 대해 쏟아지는 상찬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일단 <베를린>은 복잡한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복잡하게 느껴진다. 모사드, CIA, 중동테러조직 등이 등장하면서 뭔가 거대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실상 이들은 그저 부속품 정도의 역할에 머무르며, 이야기의 구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복잡하게 느껴진다. 영화 초반부는 특히 혼란스럽다. 인물 소개라든가 이야기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그저 뭔가 멋진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화면 구성을 한 듯한 느낌이 역력하다. 이건 편집의 문제다.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는 설정들도 눈에 거슬린다. 이를테면,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에 전혀 체크되지 않은 북한의 비밀요원이 대사관의 직원 남편으로 베를린에서 같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곳에서도 남북한 사이에는 상대 대사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인적 정보를 파악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업무일 것이다. 특히 베를린이라면 더더욱. 북한 최고의 요원 표종성이 베를린 소재 미국 대사관의 위치를 파악조차 안 하고 있었다는 점이나, 굳이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액션씬의 무대가 한적한 시골의 갈대밭이라는 점도 그렇다.(왜 정진수는 출발하기 전에 상부에 인력 동원 요청을 하지 않고 굳이 현장에 와서 요청을 했을까)
액션장면의 완성도도 높은 곳에서 추락해 거대한 유리창을 박살내며 떨어지는 장면이 흥미롭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한국 최고의 액션 조합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보기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류승완-정두홍 조합의 최고 강점은 직접 몸과 몸이 부딪치는 장면을 연출할 때이다. 그런데 <베를린>엔 총싸움이 난무한다. 간간이 직접 타격이 이루어지는 장면에서의 타격감은 좋지만 총싸움에 묻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다른 걸 떠나 내가 이 영화의 손을 들어주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베를린>이 결국 <한국판 ○○○○○>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몇 년 전부터 CJ가 꾸준히 내 놓고 있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짝퉁 버전이라는 점이다.(그나마 다행인 건 <광해>나 <베를린>의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높아 이런 점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한국 공산품의 급속 성장이 외국 제품의 모방에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모방은 결국 원제품을 뛰어 넘지는 못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아이폰 같은 제품이 나오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모방 전략을 예술에서도 구사할 셈인지 진지하게 되묻고 싶다. 단적으로 말해 <베를린>은 ‘한국판 본 시리즈’이다. 설정이야 남북한의 특수관계를 배경으로 삼았다지만, 액션장면의 연출, 군중이 있는 곳에서의 감시 또는 추격 장면들, 결말까지 하여튼 전반적인 분위기를 포함해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문제는 <타워>가 <타워링>을 넘어서지 못했듯이 <베를린> 또한 <본 시리즈>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짝패>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류승완 다운 영화였다고 본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도 있지만, 예산의 규모까지 포함해서 그 정도 예산을 들여 자기 만들고 싶은 데로 만들어 본 영화가 바로 <짝패>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짝패>를 좋아한다. 그리고 <부당거래>를 보고서 <짝패>로 한(!)을 풀은 류승완이 드디어 영화(!)를 연출(!)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베를린>. 류승완에게 정답은 각본은 타인에게 넘기고 연출에만 힘을 쏟는 것 아닐까.
※ 마지막 액션 장면은 한국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그래서 갈대밭인가?
※ 김서형의 역할이 많이 편집된 느낌. 만약 속편이 나와 김서형이 하정우를 몰래 도와주는 역할이 된다면 말 그대로 <본 슈프러머시>가 되는 셈.
※ 북한 사투리가 어색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익숙지 않아서인지 대화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대안은 뭐가 되려나???
※ 일각에서 영화 <베를린>과 2008년에 나온 톰 롭 스미스의 소설 <차일드 44>의 유사성이 거론되고 있다. 소설을 읽지 않아 뭐라 얘기할 입장은 아니지만, 유사성을 주장하는 분의 글을 읽어보니 여러 가지 설정에서 비슷한 점이 보이기는 한다. 이걸 표절이라고 해야할 지 아니면 장르적 클리셰로 치부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http://moviestory.net/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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