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오락액션대작영화인줄 알았다면 이 영화를 조금 잘못 보지 않았나 싶다. 분명 화려한 액션이 주요 흥행요소일 것이다. 광고도 그런 쪽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1탄보다 더욱 화려한 액션과 볼거리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쁨을 팬들에게 선사하는 영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이 영화, 왠지 모르게 묵직하다. 그리고 무겁다. 마치 신화의 세상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다른 느낌이 든다. 종종 디스토피아 세상 근처까지 가고 있는 듯 했다. God들이 죽는다. 비록 가상공간인 영화에서지만 말이다. 이름만 같을 뿐 현재의 그리스란 나라가 있기 몇 천년 전에 있던 그리스 문명 지역에서의 머나먼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라 시간이 다르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세상이며 그래서 현시대와는 다르다. 그런 시공간의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인데 왠지 모르게 우리가 사는 현실과 큰 관련을 갖고 있는 이야기이며, 또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 속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 있으며, 우리들의 세계관과 원칙, 그리고 우리들의 갈망이 숨쉬고 있다. 영화 ‘타이탄의 분노’엔 바로 그런 우리들이 존재한다. 그런 영화에서 영원이 살 것이라고 인간들이 단정했던 신들이 죽었다. 즉 인간이 믿었던 존재의 사멸인 것이고 인간이 믿었던 신념이 붕괴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시대의 종언과 우리들이 살아야 할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타이탄의 분노’는 그렇게 묵직한 강렬함을 담고 있다. 흥미진진한 액션과 화려한 볼거리, 명불허전이다. 하지만 영화의 백미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신들의 종언과 인간세상의 도래, 그리고 그런 과정이 현재의 인간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지를 담대하고 묻는다. 영화는 Time-Killing 용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의 사회가 어떻게 붕괴되고 인간 사회는 어떻게 건설되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이미 마련된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이미 결정됐겠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에겐 묘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신들의 죽음과 인간 세계의 도래, 그것은 과연 어떤 사회일지,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신의 결합으로 태어난 페르세우스(샘 워싱턴)의 운명은 분명 가혹한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진행된 것은 하나도 없다. 평범한 어부로 살기를 원했던 그였지만 세상은 시끄럽게 됐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문제로 발생된 것이 아닌 신들의 탐욕과 기묘한 정치적 관계로 인해 발생됐단 점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어쩌면 최고의 비극이라 할 ‘크로노스’와 그의 아들들인 제우스, 하데스 등의 관계는 그리스 신화에서 모든 갈등의 원천이며, 슬픈 이야기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고, 위험에 빠진 자식들이 아버지를 죽인다는 그리스 신화의 설정은 매우 인간적이지만 도덕적 가치관으로 볼 때, 엉망진창인 관계다. 영화에서 아들들이 죽인 ‘크로노스’가 다시 살아나 아들들을 죽이려는 모양새는 확실히 강렬하긴 하다. 제우스의 아들인 전쟁의 신 ‘아레스’까지 이런 불행한 가족사에 한 페이지를 그려 내니 정말 이런 불쌍한 가족이 어디 있나 싶다. 하지만 세상의 질서와 안정을 지키는 신들이 세상의 갈들을 만드는 주체라면, 그것은 인간들에겐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신들이 일으킨 문제를 인간이 풀어나가야 할 운명을 지닌, 불쌍한 인간들의 몸부림은 가련할 뿐이다. 내가 왜 이런 갈등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냐고 묻고 싶었겠지만 애초에 그런 질문 자체를 할 수 없는 가련한 인간들일 뿐이다. 재앙 앞에 시시비비를 따질 것도 없이 몸으로 막아야 할 운명을 지닌 생명체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결국 신들이 만든 불협화음을 인간들이 해결한다. 그런데 묘하게 유추되는 것이 있다. 현재의 금융위기와 경제위기는 사실 서민들이나 국민들이 일으킨 것들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중심세력이라 할 자본가들, 특히 금융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벌인 사업들이 서민들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정보부족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불안해 한 서민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세상은 1929년의 세계대공황을 근 100여 년 만에 다시 한 번 현재 보게 된 것이다. 마치 제우스, 하데스 등으로 이뤄진 그리스 신화에서의 신들의 갈등 때문처럼 말이다. 여기에 페르세우스를 비롯한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이것을 결국 해결하도록 떠밀린다. 평범한 어부로 살기 원했지만 밀어닥치는 불운한 신들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마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칼과 창, 그리고 방패를 들고 신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시시비비를 따지기 전에 우선 자신이 소중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지켜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그들은 현재 경제 위기 속에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몸으로 겪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야 할 인간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억울했을 것이다. 페르시우스는 물론 오늘의 우리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신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있다. 신들의 죽음 속에 인간이 서는 것이고, 서민이 서는 것이다. 특히 영화 속에서 인간, 그리고 서민들의 자립 속에 무겁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책임감이다. 사회를 지킨다는 사회인으로서의 기본전제가 영화 전체에서 풍기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됐지만 개인이 원한다고 포기하고 또한 해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한 무거운 책임의식이 있어야만 그 속에서 살 수 있고,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사회는 소중하니까. 개인주의가 득세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가치가 무디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자유주의가 자신의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개인주의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이 때, 개인주의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현대인들은 피부로 경험하고 있다. 집권층과 있는 자들의 탐욕에 의해, 그리고 각자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해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에 세상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개인과 사회는 죽든 싫든 조화를 이뤄야 하고 개인 혼자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이 시대가 증명하고 있으며, 하다못해 화려한 볼거리로 치장된 액션 영화에서조차도 담고 있는 시대적 소명이자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칼을 쥔 자로서 강한 자의 책임감의 무게를 느낀 페르세우스와 그런 책임감을 물려받는 아들, 헬리오스의 모습은 이상한 맛을 제공한다. 이제 사회는 책임을 개인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럴 자세가 돼있는지 관객에게조차 묻고 있다. 어쩌면 주소는 물론 해외로 이주하거나 심지어 국적을 바꾸며 사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그렇게 옮긴다고 그곳은 유토피아일까? 그곳 역시 뻔할 것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고통을 경험하는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힘들긴 마찬가지고 도망갈 곳도 많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의 폭력사건이 미국에서나 호주에서 더 적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살기만을 원한다고, 도망을 한다고 피해갈 수 있는 문제들은 없으며,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체의 가치를 잊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할 때다. 개인주의는 잠시 잊고 살자. 안 그러면 무서운 디스토피아의 세상만 우릴 기다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