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구 없는 극한 상황의 재연.. ★★★☆
※ 영화의 결론을 포함한 중요한 설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트웨이(리암 니슨)의 직업은 알래스카 석유 채취 공장의 노동자들을 야생 늑대로부터 보호하는 일종의 경호원이다. 드디어 25주간의 작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영하 30도를 밑도는 극한의 추위에 내동댕이 처진다. 살아남은 몇 명의 생존자와 함께 그는 엄청난 추위, 그리고 자신들을 침입자로 여긴 늑대들의 공격을 피해 살아남아야 한다.
이 영화는 재난 영화라기보다 일종의 서바이벌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헐리웃의 일반적인 재난 영화를 예상하고 이 영화를 찾은 관객이라면 아마도 낭패감을 느낄 것이다. 왜냐면 <더 그레이>에는 어떠한 난관을 극복하면서 얻어지는 희망이라든가 안도감을 느낄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을 위협하는 생존의 위협은 그 원인이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끈질기게 생존자들 주위를 맴돈다. 탈출구가 없는 극한 상황이 영화 상영 내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 <더 그레이>가 리암 니슨과 늑대가 한 판 대결을 펼치는 액션 영화로 생각한 사람이라면 영화 관람을 포기하기 바란다.
자, 영화를 재구성해보자. 오트웨이는 어떠한 이유로 삶의 의지를 잃은 채 결국 자살 직전의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자실 직전에 그는 힘차게 뛰어가는 늑대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입에서 총을 꺼내 늑대를 겨냥해 발사한다. 그게 프로패셔널로서 일종의 본능인지, 아니면 늑대에게서 힘찬 생명의 꿈틀거림, 살고자 하는 본능을 느꼈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진 않다. 아무튼 그는 숨을 헐떡이는 늑대의 배에 조용히 손을 내려놓고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경건한 의식을 수행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늑대는 오트웨이에게 생과 사의 전령으로서 정반대의 의미로 다가온다. 자살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는 동시에 혹독한 환경에서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존재로.
사실, 생존자들이 왜 비행기를 떠나 눈길로 나섰는지 딱히 공감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의 전문가인 오트웨이가 ‘그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하니깐,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으니깐 그냥 따라 나서게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래야 영화가 되니깐 나서야 한다. 드라마로서는 분명 아쉽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더 그레이>가 생존자와 관객에게 전달하는 공포는 주로 세 가지 차원에서 진행된다. 첫 번째는 풍경(?)이다. 지척도 구분하기 힘든 눈보라와 하얀 눈 밖에는 보이지 않는 풍경은 그 자체로 공포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생존자들은 점점 더 위험한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더 공포스러운 건 그 사실을 관객도 모른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리다. <더 그레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바로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비행기가 추락할 때의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 폐부를 찌르는 듯한 늑대 울음소리는 듣는 것만으로 몸에서 희망이 빠져나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아, 과연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당연히 늑대다. 다큐멘터리 <지구>의 초반에 늑대가 순록 사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늑대는 순록의 뒤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수십 킬로미터를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그 이유는 순록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순록은 뒤에 늑대가 따라온다는 공포심에 결국 스스로 무너져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실수를 범하게 되고, 그것으로 그 순록은 늑대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정확히 무리 전체가 보이진 않았지만, 일반적인 늑대 무리라면 일시에 공격했을 경우 초반에라도 사람들의 숨통을 끊어 놨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겠지만, 한명씩 그것도 가장 약할 것 같은 존재만을 노리는 늑대의 공격은 <지구>에서 순록을 사냥하는 늑대의 본능, 습성 바로 그것이었다. 과장된 괴물이 직접적인 공포를 생산하기 힘든 것은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의 늑대가 더욱 공포스러웠던 건 다른 재난영화나 괴수영화에서처럼 괴물로 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늑대를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더 그레이>를 보면서 자꾸 <미스트>가 떠올랐다. 그건 <미스트>의 주인공과 <더 그레이>의 리암 니슨이 동일한 궤적을 밟아 나가기 때문인데, 위기상황에서 둘 모두는 나름 합리적이고 과감한 결단으로 무리를 이끌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빠져 나가려 하지만, 뭔가 결정하고 행동했을 때마다 그 결과는 거의 매번 최악으로 돌아온다. 만약 그런 상황을 다시 맞는다면 다른 결정을 내렸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당시로선 그게 가장 합리적인 결정으로 믿을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더 그레이>는 <미스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 <미스트>는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설정들이 주인공의 결정이 옳다는 근거를 제공해 주며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더 그레이>는 근거 제공이 약하다. 영화를 보고나서 든 첫 번째 생각 - 나라면 비행기 잔해와 승객들의 짐을 최대한 끌어 모아 늑대가 공격하기 힘든 장애물을 구축한 후 최대한 버티며 구조팀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한 번 더 싸워보세. 마지막으로 폼나게 싸워보세. 바로 이날 살고 또 죽으세”
※ 아마도 <미스트>에서 마트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 역시 살아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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