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rose777
|
2002-10-15 오전 3:40:50 |
1058 |
[1] |
|
|
"못난 남자들은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발전시키게 됐다" <굳세어라금순아>의 현남섭 감독의 말이다.(주인공 배두나가 <플란더즈의개>에서 열연한 주인공의 이름은 감독 "현남섭"의 이름과 닮은 <현남>이라는 사실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굳세어라금순아에 나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정말 못났다. 술값으로 사기치려 작정하고 달려들다가 금순이에게 귀싸대기를 맞고 몸을 날리는 단란주점 주인. 어떻게든 금순이의 남편을 골탕먹이려고 애쓰는 직장상사. 중국교포의 임금을 갈취하는 나쁜 가게주인. 조폭의 우두머리. 마지막으로 가장 못난 남자 금순이 남편. 그들은 모두... 남자다. 전직 배구선수의 매운 손맛을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맞아내야 하는 것은 모두 남자이며 그들이 맞아야 하는 이유는 또한 너무나도 타당하므로 그들이 금순이에게 손찌검!을 당하는 순간 관객은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금순이가 남편을 유흥가에서 구출하게 되는동안 만나는 많은 이들중에 금순이에게 필연이든 우연이든 손찌검을 당하게 되는 남자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를 떠나 인간적으로 관객이 때려주고 싶어하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영화의 포인트를 감독 현남석은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이 남자라는점에 착안했다는점을 부각시켜서 영화를 들여다보기 전에, 관객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동의하게 되는 점은 바로 인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따뜻한"시선이다. 감독은 이색적인 상황설정과 폭력이 난무하는 코미디로 관객을 웃겨 보려는 심사는 애초부터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과 억지 설정이 만들어내는 웃음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키려는 노력의 흔적이 영화곳곳에 묻어난다. 감독이 의도한 웃음과 감동은 바로 "일상성"에 안주하고 있다는점에서 <굳세어라금순아>는 근간 탄생된 많은 코믹영화와 다른 "안정감"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전직 배구선수였던, 세상물정 모르고 덜컥! 생겨난 떡두꺼비같은 딸, 송이를 들쳐 업고 쫄바지에 원피스를 입고 뛰어 다니는 금순이의 모습은 그간 한국영화가 생산(?)해내온 여성의 캐릭터와 100%동떨어져 있다. 정형화된 한국영화속의 초보주부들은 늘 직장과 가정사이에서 일과 사랑, 육아문제 혹은 옛사랑에 대한 추억등으로 갈팡질팡해왔으나 금순이는 오히려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주부로서의 무능력을 스스로 탓한다. 이로서 금순이를 통해서 일상의 판타지를 보여주려고 의도했던 감독의 의도는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캐릭터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억지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납득할만하며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그 이유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솔직함" 때문이다.
하룻밤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를 2시간여동안 녹녹하게 풀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일장춘몽의 플롯구조는 이미 여러번 시도되었다가 시도의의미조차 되살리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린 역사적 흔적들이 자자하다. 그러한 면에서 <굳세어라금순아>가 일장춘몽의 이야기구조속에서 선택한 금순이 남편탈출기의 플롯이 매우 간단하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인 사실이다. 복잡한 이야기들을 여러군데서 얽기 섥기 묶어 하룻밤사이의 헤프닝으로 엮어 보려고 했었다면 이영화는 분명 실패작으로 기억될 수밖에....그러나 감독 현남섭은 오랜기간의 충무로 시나리오작가경험을 토대로 노련하게 함정들을 빠져나간다. 하룻밤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를 벌여내기 위해 주인공 금순이에게 초목표를 영화의 초반부터 정확하게 던져주고 금순이의 주변인물들을 각자의 자리에 배치한후 열심히 성실하게 밧데리를 갈아끼우며 움직여내고 있다. 주인공은 초목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하며 당연히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만나는 걸림돌들을 만나 일어나는 헤프닝들의 출현은 줄기차게 이어진다. 간단한 플롯이니 개연성따위없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될것이라 예상했지만 물론, 자세히 매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독의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수 있다. 12시가 넘은 새벽의 유흥가의 무시무시한 또다른 세상을 들여다보는 금순이의 눈은 바로 감독의 눈과 일치한다. 임금을 착취당하는 중국교포. 지역을 자치하겠다고 다투고 있는 조폭들의 세력다툼. 원조교제를 하려 드는 아저씨. 장미팔이 할머니. 뛰어난 부부애를 과시하는 포장마차 주인들. 잃어버린 송이를 맡아 금순이에게 되돌려주는 거리의 걸인들. 그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그 파장효과는 미약하나 분명 존재한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가판대에서 금순이와 아기 송이를 떠올리며 삔을 고르는 남편의 상상씬은 바로 감독의 정서를 대변하는 효과적인 장면이다. 특별한 개연성없이 금순이의 편에 서게 되는 착한이들의 설정은 꼬집어 말하자면 도식적이지만, 한편 뒤집어서 볼 때, 현실에 존재할만한 가능성의 인물들임이 틀림없다. 즉, 금순이를 돕는 지지파의 존재들을 만들어낸 감독의 시선은 부정할수 없는 "선한것"이라는 결론에는 이견을 제기할수 없게 만드는 영화의 "선한"장점이다. (금순이의 팬으로 돌변한 무시무시한 싸인맨조차 희화화 되어 있지만 납득할만하다.) 감독 현남섭은 데뷔작으로 선택한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위에서 언급된 많은 장점들과 뛰어난 역량을 자랑하는 배두나라는 배우의 존재감만으로 이미 꽤 좋은 위치에 서있다고 볼수 있다. 그가 직접쓴 시나리오와 기대이상을 웃도는 상황역전의 웃음은 거부할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옴으로써 이미 영화는 많은 관객들의 지지를 얻을수 있는 위치선정을 성공적으로 해낸듯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헛점이 많다. 물론, 신선한 상황설정과 캐릭터들의 움직임속에 묻어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빠져있다는 것이 가장 큰 헛점이다. 시간과 상황에 쫓겨서 어쩔수 없다고 변명을 한다 해도 여전히 납득할수 없는 사실은 금순이가 바라보는 인물들의 출현과 퇴장의 어이없음이다. 한국영화의 시나리오가 가장 많이 놓치고 있는 헛점 "개연성"의 존재를 감독은 금순이에게만 공들였지 주변인물들에게는 도통 나눠줄 여력이 없는듯 보인다. 감독의 따뜻한 시선들이 십분 발휘될수 있었던 금순이가 초목표를 향해 달리는 시점에서 만나는 장애물들의 이야기와 유흥가 뒷골목의 버려진 혹은 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잠시 바라보는 시점. 딱 그시점에서 머물러 있어서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마치 도덕교과서의 "바르게 살아라"라는 훈시처럼 금순이가 바라보는 밤거리의 약자들은 그렇게 인형처럼 틀에 박혀 움직이지 않고 박제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여전히 거부할수 없는 조폭이야기를 금순이 스토리에 끼워놓은 것은 결정적인 감독의 실수이다. 오히려 이러한 선택을 받아들여 제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작가로서 예술인으로서 반성해야 될 자신을 지키는 "신념"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시류를 탔어야 했기 때문에....라는 궁색한 답안따위는 집어 치워라. 그렇다면 누구나 "살인"소재를 이야기 하고 "살인"을 하는 엽기적인 악마 따위의 이야기가 500만을 육박한다면 소박한 산골소년과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아마 옆집에는 반드시 살인가마 살아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가 "진실"쯤으로 오인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말테니까.... 존재하는 모든 문학과 예술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대중예술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이러한 억지상황을 영화에 삽입하여 이야기를 난잡하고 지루하게 만들어 내는 감독에게 "자의식"의 존재를 묻는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최선이었다고만 말하지 말기를 바란다. 최선이란...모두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노력의 흔적이지 "안일함"을 선택하는 "게으름"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플란더즈의 개>와 <굳세어라 금순아> 영화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의도적인것인지 자연스러운것인지 모르게 배두나의 전작 "플란더즈의개"와 닮아있다. 마치 <굳세어라금순아>는 플란더즈의개의 현남이의 "시집버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플란더즈의 개에서 현남이의 친구로 나왔던 멋진! 뚱녀는 굳세어라 금순이에서 배구경기장의 매점직원으로 대사한마디 없는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플란더즈의 개의 개를 잃어버린 무말랭이 할머니는 귀여운 송이에게 폭언을 일삼는 무서운 할머니로 돌변한다. 또한 현남이가 가진 엉뚱함과 솔직함은 바로 굳세어라금순아의 금순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이 두작품에서 배두나가 연기를 한것인지 아니면 배두나의 성장영화로 두편을 보아야 하는것인지의 혼란과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굳이 이어서 비교결론을 내리자면, <굳세어라금순아>에서 현남섭감독이 보여준 만화적 상상력과 일상을 넘나드는 판타지의 영상미는 <플란더즈의개>의 봉준호 감독의 내공의 힘을 따라오기엔 여전히 벅차 보인다. 혹여, 영화 관계자들이여 플란더즈의 개와 굳세어라 금순아를 묶어서 생각하지 말아달라고는 말하지 말아달라. 그것은 관객에게 가하는 지나친 고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그 사항을 강요하고 싶었다면 ... 그랬다면.... 무말랭이 할머니의 출현만큼은... 뺐어야....옳았다....ㅠ ㅠ
현남섭 감독이 그려낸 굳세어라 금순아는 위에서 언급된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과 에피소드에서의 안일한 선택에 대한 분노를 제외하면 호의적으로 받아들일만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따뜻한 영화이다. 단점 없는 인간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듯, 단점 없는 영화를 찾는 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금순이>를 사랑하기 위해 당신이 선택한 가장 간단 명료하고 유쾌한 최선이다.
@www.onreview.co.kr
|
|
|
1
|
|
|
|
|
1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