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투쟁의 가장 찌질한 예.. ★★★
후천성 시력 상실을 겪고 있는 줄리아(벨렌 루에다)는 같은 증세로 이미 시력을 잃은 쌍둥이 언니 사라의 자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는다. 줄리아는 남편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언니의 자살에 의문을 품고 언니 주변을 탐색해 나간다. 기묘한 분위기의 이웃들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언니의 남자친구, 그리고 자신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남편의 이상한 행동. 의혹이 커져가는 와중에 남편은 실종되고, 줄리아의 시력은 점점 사라져간다.
스페인 호러 영화를 스페인에서 제작된 영화에 더불어 스페인어로 된 영화, 스페인 출신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좀 더 광의의 개념으로 확대해 보아도, 대체로 스페인 호러 영화의 특징은 피가 흘러 남치는 고어보다는 심리, 감정, 특히 슬픔이라는 감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우아하고 품위가 있는 느낌이랄까. <줄리아의 눈> 역시 마찬가지의 경향성을 보인다. 두 어 차례 정도 끔찍한 장면이 등장하지만, 다른 호러 영화에 비하자면 그것 역시 무난한 수준이다.
<줄리아의 눈>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물리적 어둠 상태에서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고 잡아야 한다는 스릴이 주는 공포를 대체로 잘 전달한다. 이는 기술적 차원에서의 완성도가 꽤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언니인 사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눈이 안 보이는 자들 가운데에서 몰래 엿듣다가 들키는 장면(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또는 <사일런트 힐>의 한 장면이 연상)이나, 시력이 회복됐지만 범인 앞에서 여전히 안 보이는 척 해야 하는 상황, 특히 마지막에 <양들의 침묵>을 연상시키는 어둠 속에서 범인과 벌이는 대결 장면은 소름 끼치도록 아찔한 순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몇몇 장면에서 공포를 심어주는 매끈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줄리아의 눈>은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이는 정서적 공감에서 장점을 보였던 스페인 호러이기에 더 많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가해자의 처지에 대한 부실한 공감에서 직접 기인한다. 그러니깐 가해자든 피해자든 등장인물의 처지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호러 영화에서의 정서적 심리적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거기에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에서의 충격도 거의 없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범인으로 의심 받을 만한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목 아래만을 비춘다. 당연히 관객의 궁금증은 커져만 가고, 카메라가 범인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놀랄 만반의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비로소 카메라가 범인의 얼굴을 보여줄 때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저게 누구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스릴러 장르로서의 평가는 인색해질 수밖에 없다. 줄리아 역시 관객과 마찬가지로 범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의아한 표정이 떠오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공감보다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스릴러나 공포 영화들의 가해자 내지는 범인들은 대게 인정투쟁의 일환으로 사람을 해치거나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그 인정투쟁의 성격에 따라 영화의 빛이 다양해짐은 물론이다. <줄리아의 눈>의 찌질한 범인이 벌이는 인정투쟁은 한마디로 찌질하다.
※ <줄리아의 눈>의 홍보물은 양면 어디에도 감독의 이름인 기옘 모랄레스는 나와 있지 않고 길예르모 델 토로의 이름만(!) 앞뒤로 커다랗게 쓰여 있어 제작자인 그가 마치 감독처럼 혼동하도록 제작되었다. 어쨌거나 길예르모 델 토로라는 이름이 관객의 관심을 끄는 미끼로 활용된다는 게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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