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 영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수다’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그것은 그가 ‘필름있수다’의 대표여서이기도 하지만 조근조근 리듬을 맞추면서 생뚱맞은 결론을 향하는 수다가 유발하는 웃음이 장진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의 잔치인 수다는 솔직한 자기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의 수줍은 속내를 들킬까봐 말을 열심히 주워 삼키는 것에 가깝다. 인물들의 진심은 긴 수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짧고 뭉툭한 대사나 말없는 행동 속에 감춰져 있다. <거룩한 계보>는 이른바 그런 방식이 의사소통의 전형이라고 일컫는 “말없이 통하는 ‘싸나이’들의 우정”에 관한 영화다. 이것은 감독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들키지 않는 우정”인데, 친구가 자신의 존재나 호의를 인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언제나 뒤에서 지켜주는 방식의 인간관계를 말한다. 우리는 그런 관계들을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들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다. ‘동막골’의 양쪽 군인들이, 전혀 수다스럽지 않았던 킬러들이, 사랑하는 남자를 지켜보는 ‘아는 여자’가 상대에게 마음을 주는 방식이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장진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그것을 ‘조폭영화’라는 좀더 가시적이고 대중적인 코드와 접목시킨다.
이 작품에서는 <아는 여자>에 이미 등장했던, 아는 남자 ‘동치성’(정재영)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 조직의 오른팔인 그는 점차 세력이 위축되는 조직을 위해 칼을 잡고, 그로 인해 감옥에 가게 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칼날처럼 차가운 배신뿐이었다. 동치성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 대신 조직의 오른팔이 된 김주중(정준호)은 조직의 룰을 어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친구를 버릴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그는 우연한 방식으로 치성의 복수를 돕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친구를 향해 총을 겨눠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에는 두개의 계보가 존재한다. 하나는 치성이 교도소 밖에 있을 때 몸담고 있던 조직의 계보이고, 다른 하나는 감방 동기들과의 계보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조직의 종적 계보는 파괴되고, 동지의 횡적 계보는 공고해진다. 종적 계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상부의 카리스마와 하부의 복종이 필요한데, 보스가 실추된 조직의 위세를 확장하면서 부하들을 ‘팽’하는 야비한 방식에 의해 카리스마와 복종은 간데없이 사라진다. 반면 횡적 계보는 동일한 목적의식과 서로에 대한 신뢰 속에서 유지되는데 교도소에서 만난 동지들은 바깥 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원망(願望)과 탈옥이라는 동일한 목적의식을 공유하면서 신의를 다져간다. 영화 전반부에서 강조되었던 상명하복의 조직 위계는 후반부로 갈수록 비열한 깡패들의 생존법칙으로 전락하고, 동등한 지위 속에서 형성된 조직 아닌 조직 ‘사랑과 평화’의 우정은 점점 빛을 발한다.
<거룩한 계보>는 두개의 조폭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친구>와 <거룩한 계보>는 사내들의 우정이라는 동일한 지점을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다른 지역적 정서 속에서 조망한다. 감독은 통상적으로 코믹한 캐릭터에 국한되어 가볍고 천박하게 그려졌던 전라도식 사투리와 조폭 정서를 <친구>에 버금가는 묵직한 것으로 다루고 싶었던 것 같다. 장진 특유의 유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상당히 자제되고 있으며 인물 내면의 정서적인 무엇인가를 포착하기 위해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또 이 영화는 조직의 보스에게 배신당한 오른팔이 조직 전체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점에서 <달콤한 인생>을 연상시키는데, 두 작품의 결정적인 차이는 보스를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김지운의 보스가 한국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갱단의 우두머리 같은 모습이었다면, 장진의 보스는 암흑세계에 대한 환상을 걷어낸 조폭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깡패들 중에 좋은 놈 하나 없다’는 동치성의 말이 떠오른다. 보스가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동치성이 내뱉는 대사 ‘얼굴 꼬라지가 그게 뭐여?’에는 증오와 연민이 묘하게 얽힌 심사가 잘 드러난다. 내가 믿고 의지했던 존재가 나를 버리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 존재의 실체가 허약하고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다.
장진 감독에게는 ‘연극판의 총아’였다는 사실이 양날의 칼이었다. 연극판에서 검증받은 탄탄한 필력과 연출력은 그의 무기가 되어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영화가 지나치게 연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룩한 계보>는 그런 비판으로부터 더 벗어나고 싶었던 듯, ‘클로즈업’을 백분 활용하고, 자연광을 흠뻑 담아내고, CCTV 화면을 차용하는 등 영화적인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기술적인 시도들은 분명 이 작품을 영화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관객에게 과도하게 어떤 정서적 상태를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 다양한 인물군상을 통해 관계, 즉 인간 사이의 계보를 탐색하려는 시도들은 잔잔한 재미를 주지만, 주요 캐릭터의 서사를 지나치게 지연시킨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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