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 마고 (Queen Margot / La Reine Margot ,1994)란 영화는 실제역사를 마고를 중심으로 소설화한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는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마음껏 교차되는 역사를 배우는데 있어서도, 그리고 한 작품으로써도 손색이 없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영 화자체는 마고를 중심으로 주변인물들과 그 사회의 사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퇴폐하고 문란한 시대의 쾌락주의와 자신들의 과오를 신을 섬긴다는 것만으로 모조리 감싸버리려는 자들과 그에 대비되는 모든 것을 죄인으로 몰고가버리는 사회가 드러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 단 영화를 보기 전에 간단한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자. 유럽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카톨릭은 개혁을 주장하는 신교와 원래의 카톨릭을 지키려는 구교로 나뉘게된다. 이는 현대의 조계종 사태처럼 같은 종교간에 싸움을 불러일으키며, 이 시대에서의 싸움이란 현대의 그것과는 판연히 다른 신의 종자들이 서로를 죽이고야마는 형태로까지 발전하고야 만다. 하지만 영화에선 이것만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왕위 계승권의 다툼까지 나온다. 이 왕위 계승권은 계승자간에 신교, 구교로 인한 문제가 겹치게되어 그 갈등의 골은 더욱더 깊어만 간다.
영 화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교와 구교의 화해를 위해 개혁 교회의 지도자 'H. d.나바르(앙리4세)'와 현재 프랑스의 왕 '샤를로9세(앙리2세)'의 여동생 '마고'와의 결혼을 추진하게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계획에 불구했다. 신교인 위그노들의 지도자 '콜리니 제독'을 결혼식날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
그 러한 계획을 모른채 결혼식은 진행되고, 사람들은 신교와 구교의 화합을 통해 프랑스의 평화를 꿈꾼다. 이 축하연에서 우리는 잠시 이 시대의 사회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인외에 정부를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으며, 심지어 근친상간마저도 아무런 일도 아니었던 시대인 것이다. 신을 믿고 섬기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모든 죄가 씻겨질 것이라 믿었던 걸까? 아니면 그 시대에선 그러한 행위가 모든 당연하기 짝이없었던 것일까?
마 고는 심지어 새벽에 가면을 쓴채 거리로 나가 처음 만난 신교의 남자와 거리낌없이 관계를 맺기도 한다. 물론 그때의 그 남자는 후에 마고의 절실한 사랑이자, 영화속 하나의 화합의 인물로 남는 '라볼르' 다. 물론 현 시대에서 보자면 마고는 추잡한 창녀로밖엔 안보일것이다만 그 시대적 상황에서 영화를 봐야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하 여간 콜리니에 대한 암살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샤를로9세는 자신이 죽이려 했던 자가 콜로니 이었음을 알고 자신의 행위에 회의와 두려움을 느낀채 어머니 '까뜨린느'의 사주대로 위그노들에 대한 학살을 허용하고 만다. 이 대 학살은 자신들의 행각이 탈로날 것을 염려해서 하게된것이지만, 결국 샤를로9세의 이 명은 1572년 8월 24일 바돌로뮤 축제일 밤에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결혼 축하 예배에 참석한 위그노들에 대한 잔인하기 그지없는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로 남게된것이다.
영화에서는 이 학살이 하룻밤의 악몽처럼 지나가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마고를 향해서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니?"
라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구교와 신교간의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또 구교의 신교에 대한 생각도 엿볼 수 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신교인 자신의 남편의 목숨이 염려된 마고는 남편에게 가서 어서 배를 타고 이곳을 떠나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그는 그에 응하지 않고, 결국 밀려들어온 구교에게 끌려가게 된다.
한편 상처입은채 마고집에 피신했다 다시 도망나왔던 라볼르는 자신을 끈질기게 쫓아온 신교의 '꼬꼬나스 아니발' 과 결투를 하게되고, 기력이 빠진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 잡은채 쓰러지고야 만다.
상처 입은 두 존재의 만남. 이는 나약하고, 왕위를 노리는 동생들에게 항상 시달리는 샤를로9세와 나바르와의 만남에서도 있게된다.
실 제 샤를로9세는 일찍 죽게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폴란드에 가있던 앙리3세가 귀국해 그 뒤를 잇지만 많은 실정을 계속하게되고, 로마 교황청에서 파견한 광신적인 '도미닉' 수도사가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역시 죽고 마고의 남편인 나바르가 왕위에 올라 앙리4세가 되게된다. 영화에서는 샤를로9세가 죽게되는것까지만 나오지만 아무튼 신교와 구교의 종교내란 속에서 왕위 다툼이 있고, 또 그 끝에는 신교의 나바르가 구교로 개종하면서 왕위를 이어받아 낭트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들에게 어느정도의 자유를 주게까지 되는 것이다.
아 무튼 나바르는 강제적으로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을 하게된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마음은 변함이 없어도 거짓으로 개종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마고의 설득이 한 몫을 하게된 부분이다. 배신을 배웠다는 나바르에게 마고는 말했었다.
"그럼 거짓도 배우세요"
마고와 나바르는 협정을 맺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조금씩 화해를 청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덕분에 나바르는 일단 목숨을 유지하게된다.
그 러던 어느날 샤를로9세는 어머니의 사주로 인하여 또다시 어머니의 뜻대로 나바르를 암살하는 것을 허락하고만다. 그리고 나바르와 함께 사냥에 떠난 샤를로9세는 그 나약함 그대로 멧돼지 사냥도중 낙마하고 만다. 시중들이 도우러 가는 것을 앙리3세는 말을 탄채 가로막는다.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존재하는 왕위 계승에 대한 집착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모두에게서 버림받은체, 말에 깔린채로 멧돼지에게 습격당하는 샤를로9세를 나바르는 칼을 빼들고 멧돼지를 죽임으로써 구하게된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있다하여도 인간과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서로 통하는것인가보다. 종교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이다. 그것을 인간의 존엄성까지 미치는 것은 너무도 미개한 광신도적 행위라고 밖에는 볼수없게 되버리는 장면이다.
이 일로 샤를로9세는 나바르를 믿고 의지하게된다. 그리하여 암살자들이 있는 방에 가려는 나바르를 향해 샤를로9세는 가지말고 어서 따라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샤를로9세는 숨겨둔 자신의 여인을 나바르에게 소개하기에 이른다.
한편 시체더미속에서 건져진 꼬꼬나스는 라볼르에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해달라하며 자신을 구해줬음을 더없이 감사해한다.
"배고프나? 배고파? 내가 요리해 줄까? 먹을 수 있나?"
꼬 꼬나스의 이 말은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로 죽이기 위해 칼을 맞대던 그들이, 신교와 구교로서 절대 융합할수없을거라 믿어온 그들이 다른 것도 아닌 다른 교인, 자신이 죽이려했던이가 살아있음에 기뻐하는 이 현실 속에서 그들은 즐겁게 마주앉아 음식을 먹기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음 식은 인간에게 있어선 필수적인 것이다. 또 음식의 섭취는 죽은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살아서 음식을 먹는 그 순간은 기쁘고 중요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꼬꼬나스의 말은 종교를 뛰어넘어 한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화해의 요청이라 할 수 있겠다.
허나 현실은 냉혹하다. 나바르를 암살하기위해 준비된 독묻은 책은 샤를르9세에게 넘어가고 만다. 그리고 샤를르9세는 독으로 인해 천천히 죽어가게 된다.
또한 라볼르와 꼬꼬나스는 마고를 데려오기 위해 성으로 갔다가 잡혀서 처형당하게 되고만다.
샤를르9세는 피를 토하며 죽을 때 마고를 불렀다. 자신이 의지하던 나바르를 살리기 위해 떠나보냈던 샤를르9세가 이제 기댈곳은 마고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고는 그와중에도 라볼르의 사면을 간청하나 샤를르9세는 늦었다고 말한다.
라 볼르와 꼬꼬나스는 끌려가면서도 서로를 맞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었다. 이보다 더 감동적인 슬픔이 또 있을까! 그들이 서로에게 내밀던 검은 어느새 우정과 화해속에서 녹아 하나로 융합되어 심장한쪽에서 서로를 인지하며 뛰고있었던 것이다. 시대의 이상이나 신념따위는 사랑과 화해속에서 거추장한 옷가지에 지나지 않게되 버린다.
어머니의 욕심으로 죽음에 이르게된 샤를르9세나 라볼르와 꼬꼬나스. 그리고 죽은 라볼르의 머리만을 갖고 나바르에게 떠나는 마고 모두 시대의 피해자 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 여왕 마고' 라는 영화는 결코 마고에게만 모든 것을 비추지 않는다. 또 필자로서도 마고만을 쳐다보고 있을순없었다. 이 시대의 여성의 정략적 존재로서만의 가치나, 마치 하나의 예쁜 장신구마냥 같은 가족임에도 겁탈하려는 장면들은 육체적 약자로서 남자들에게 굴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었다. 물론 나약한 왕 위에서 군림하던 까뜨린느와 같은 여성도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여성들에 대한 문제는 시대속에서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을 가엾게 보고있게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보다 육체적 쾌락과 사치, 사랑에 목 매달던 여성들의 모습을 보자면 한심스럽기도 하다.
필 자는 샤를르9세의 나약함이 불러오는 외로움과 죽음에서 벗어난 꼬꼬나스의 우정에 오히려 더 눈이 갔다. 순간적으로 피어올라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하고 죽어버리는 성냥불 처럼 샤를르9세와 나바르의 우정과 화해. 꼬꼬나스와 라볼르의 관계. 그리고 사랑함에도 서로를 가슴속에 완전히 담기도 전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라볼르와 마고의 모습을 보면 어리석은 이상과 신념이 빚어내는 비극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같다.
화려한 의상과 음악. 그리고 잘 융합된 현실과 소설의 이야기는 결코 한명에게 치우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실존했던 현실마저도 외면치 않는 훌륭한 명화를 만들어냈다.
끝으로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우정과 화해'가 어리석은 이상과 신념. 그리고 더 나아가 허물어지지 않을것만 같던 벽마저 허물어버리는 모습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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