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은, 대사는 시나리오를 다 쓰고 맨 나중에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진 감독의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대사는 시나리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묵직한 비중이다. 그것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구상된, 아니 시나리오 구상의 씨앗이자 열매가 아닐까 싶다. 그 많은 대사 가운데 절반은 재치와 웃음을 자아내는 데 쓰인다. 장진의 코미디는 아주 난처한 상황 속에서 웃음을 건져내려는 시도임을 확인하게 된다.
<박수칠 때…>는 히치콕식의 서스펜스물이다. 9군데를 난자당한 채 호텔방에서 발견된 미모의 여인 정유정이 있다. 그리고 히치콕식의 살인자 누명을 쓴 남자 김영훈(신하균)이 있다. 김영훈은 사건 발생 뒤 한 시간 만에 호텔 지하주차장에서 발견된 유력한 용의자다. 김영훈은 정말 범인인가? 또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사람인가? 이 질문은 장진 감독 작품 가운데 가장 강렬한 극적 긴장감을 자아낸다.
장진 감독은 기이하게도, 누명을 쓰고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웃음을 길어내려 하고 있다. 웃음이 터져나오는 곳은 두 군데인데, 하나는 이 수사극이 전국에 생방송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의자를 좁혀나가는 와중에 삽화처럼 끼어드는 군상의 면면이다. 장진사단이라 불리는 연극배우 출신을 비롯해 다양한 얼굴들이 장진식 화법으로 객석을 향해 기습적인 웃음을 날린다.
아마 LG아트센터의 중극장 규모 연극무대라면 최민식 주연의 2000년 동명 연극 못지않은 재미를 안겨줬을 작품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웃음을 전달하는 차승원은 최연기 검사 역을 맡아 수사극, 판타지와 굿판을 넘나드는 <박수칠 때…>의 리듬을 이끌며 극의 중심을 잡아준다. 김영훈을 비롯해 라이벌 검사 성준(류승룡), 동료 검사 유진주(장영남) 등 주요 인물과 나누는 리액션은 그가 코미디뿐 아니라 훌륭한 정극 연기에 있어서도 큰 잠재력이 있는 배우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중심을 잡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영화의 주요 감정선은 여인을 숨지게 한 범인을 어떻게 잡아낼 것인가 하는 최연기 검사의 간절한 염원과, 최연기 검사의 판타지 속에 아스라하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여인의 이미지에 있다. 영화의 재미를 이끄는 요소는 여느 영화보다 훨씬 길고 엉뚱한 코믹한 대사들에 있다. 그리고 영화의 뼈대는 용의선상의 범인을 압축해가는 수사극이다. 여기에 <식스 센스>에서나 봤음직한 어리고 영험한 무당의 딸(김지선)까지 등장한다. 도대체 누가 이런 다양한 장르를 한데 어울리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이종적인 요소들로 극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극중 대사로 말하자면, 다양한 게 좋다는 게 이 영화의 믿음이다.
만약 연극무대였다면 그의 믿음은 관객에게 큰 박수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차승원이 장진식 말놀이의 선두에 서서 꼭두쇠 노릇을 하고 이른바 장진사단이라 불리는 신하균, 정재영, 장영남 등 젊은 배우들이 섬세하면서도 정교하게 계산한 대사를 늘렸다 줄였다 하는 이 즐거운 무대를 누가 마다할 수 있을 것인가. 최연기 검사가 용의자 김영훈에게 목적어를 빼고 주어와 동사만으로 진술할 것을 명령하는 도입부만으로도 관객은 벌써 장진식의 리얼리티를 전적으로 수긍하는 박수를 보내게 될 것이다. 최연기 검사가 느닷없이 생방송을 진행하는 PD에게 몰아붙이는 대목은 연극 같으면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오고 객석이 뒤집어질 지점이다.
그런데 드넓은 스크린 속에서 오히려 그런 대사들은 군살처럼 늘어져 영화의 속도를 늦춘다. 한 박자 더 빠르게 진행됐으면 싶은 대사의 속도도 답답하게 들린다. 5년 전이었으면 신선했을 48시간 수사 생방송의 허술함이 스크린에 무방비로 드러난다. 48시간 동안 잠을 자지도 않고 옷을 바꿔 입지도 않으며 연극적인 용모와 발성을 고집하고 있는 아나운서와 패널들은 영세한 케이블방송을 연상케 한다. 극의 전개와 맞물리지 않는 대사들도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9번 찌를 때는 거꾸로 셈을 하면서 찌른다는 청송교도소의 죄수, 장황하게 김영훈의 의심가는 대목을 말하는 주유소 직원, 왜 빌딩엔 4층을 F로 표시하느냐며 집요하게 물어보는 일본인 관광객은 연극무대에선 활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나 영화에서는 지루함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돋보이는 것은 수십명에 달하는 배우들이 순간순간 찰나처럼 빛을 뿜을 때다. 특히, 마약범으로 나오는 정재영이 특별출연해 장진사단의 잠재력을 과시하는 순간은 단연 돋보인다. 잠깐 등장하지만 극을 서정적으로 이끄는 김지수의 눈매와 차승원의 균형감각도 눈여겨볼 만하다. 장진의 영화엔 적어도 배우들을 조금씩 성장시키는 요소들이 숨어 있는 듯하다.
묘하다. <웰컴 투 동막골>의 원작자 장진과 <박수칠 때 떠나라>의 작가 장진은 한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 이미지도 일치하지 않는다. 마치 <어댑테이션>의 찰리 카우프만과 도널드 카우프만 쌍둥이 형제가 따로따로 내놓은 전혀 다른 작품 같다. 장진이 <웰컴 투 동막골>을 연출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그 작품으로 정면승부를 걸어야 했던 것 아닐까. <박수칠 때…>는 장진이 왜 동세대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문화기획자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그가 가장 뛰어난 연출자군에 속한다는 걸 입증하는 작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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