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에도 라일락은 피었다. 4월7일부터 꼬박 100일간 하루 1만명씩 죽어가며 흘린 피를 먹고 라일락이 자랐다. 인류가 보낸 가장 혹독한 4월이었다. 시민과 이웃과 동료와 심지어 성직자들까지 10센트짜리 중국산 벌초용 칼과 몽둥이로 한 동네 사는 투치족을 내리쳐 죽였고 라디오에선 같은 동네 사는 투치족 이름을 거명하며 죽일 것을 선동했다. 벨기에의 교활한 식민 통치가 후투-투치족 갈등을 키웠고 벨기에가 물러나자 그동안 차별받은 후투족이 노골적인 종족차별정책으로 앙갚음을 했다. 그날은 평화협정을 맺은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이었다. 후투족은 투치족한테 혐의를 덮어씌워 바로 투치족 살육에 들어갔다. 여성부 장관은 투치족 여성을 마음껏 강간해도 좋다고 부추겼다. 100일 뒤에 투치족 반군이 사태를 평정했고 학살이 끝났다. 총인구 800만명 가운데 100만명이 죽었다. 소수족인 투치족의 거개가 사라졌다. 세계 평화 유지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던 유럽 강국과 미국은 대량학살은 없노라며 외면하거나 후투족을 은밀히 지원했다. 홀로코스트와 코소보 인종청소를 비탄하던 힘있는 서양은 르완다의 4월엔 눈과 귀를 감았다.
<호텔 르완다>는 학살의 전모와 국제사회의 무관심, 그리고 그 후유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진실은 너무 복잡하며 책임 소재는 미궁 속이다. 정의에 대한 감각만으로 르완다의 4월에 관해 힘있는 이야기를 뽑아낼 수는 없다. 이 영화는 대신 1268명을 자신이 일하는 호텔에 숨겨 목숨을 구한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가 겪은 100일의 실화를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너무 소박하며 꾸밈이 없고 전쟁의 스펙터클이나 학살의 참상 따위도 없다. 호텔 안팎에서 폴이 호텔 손님들과 힘겹게 목숨을 구하는 일이 전부다. 그러나 울림은 너무도 강력하여 단 한순간도 귀를 막을 수 없다. 스크린 밖으로 팔을 뻗으며 살려달라는 그들의 절규는 너무나 선명한 이미지로 가슴 깊숙이 와닿는다. 혹시 빈약한 스펙터클, 우중충한 주제, 지루한 설교? 이런 빈약한 선입견은 곧바로 깨지는데 이 영화는 어떻게 하면 이 간절한 탄원에 사람들이 귀를 내줄 것인가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폴처럼 지혜롭다. 폴은 상황윤리에 따라 자신을 잘 지킬 줄 아는 호텔 지배인이다. 실세 장군이 빈 가방을 로비에 맡기면 거기엔 최고급 스카치 몰트 위스키를 넣어야 한다는 걸 알고, 밀 콜린스 호텔에 좋은 맥주를 구비해두려면 아바나에서 날아온 개당 1만프랑짜리 코히바 시가를 뇌물로 바쳐야 한다는 걸 안다. 사소한 감정적 분노에 휩싸여 후투족의 인종청소에 뛰어들거나 투치족인 아내와 헤어지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걸 안다. 투치족과 온건한 후투족에 대한 대학살이 자행되자 그의 사람됨을 알고 이웃과 시민들이 호텔로 몰려든다. 폴은 자신의 처세로 사귄 유엔군 책임자 올리버 대령(닉 놀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올리버는 상부에서 평화조정이 아니라 평화유지를 명령했다며 “(그들에게) 당신네들은 먼지이고 똥”이라고 냉소한다. 열정적인 카메라 기자 잭(와킨 피닉스)도 “(서양은) 끔찍한 일이라며 자기네끼리 수군대곤 하던 식사를 계속할 것 같은데요”라며 절망한다.
먼지처럼 작은 존재인 폴과 난민들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 폴은 자기가 VIP 손님을 사귀는 전술로 그렇게 한다. 제복을 입고 살인을 저지르던 군인도 슈트에 타이 차림의 벨기에 호텔 매니저에게 영접을 받으면 잠시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하이네켄을 마시고 싶어하는 법이니까. 인간의 야만을 지혜롭게 이용하는 폴 덕분에 무거운 인권영화나 칙칙한 다큐멘터리로 떨어지지도 않고 도덕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폴의 운명에 깊고 뚜렷한 명암을 준다. 폴과 폴의 부하직원인 그레고와의 갈등, 그리고 두세 차례 이끌어내는 웃음도 이야기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선과 악의 구도만으로 끌고 가지도 않고 해맑게 춤추며 노는 아이들의 발을 보여주며 사람 사는 곳의 풍경을 펼치고 있는데 그 자세가 꽤 믿음직스럽다. 특히 돈 치들의 연기는 매우 깊은 감명을 주는데 그가 지배인으로 있는 호텔에선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참사현장을 목격한 뒤 분노 속에서도 셔츠와 타이를 갈아입고 근무를 나가는 그의 표정은 잊기 힘들다.
2005년 베를린영화제는 학살의 기억을 다룬 여러 영화를 초대했다. 같은 르완다 학살을 다룬 다른 영화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흔든 건 <호텔 르완다>였다. <호텔 르완다>는 이야기의 힘이 영화의 최종심급이라고 믿는다. 흥분하고 격노하면서 설득력을 잃지도 않고, 소심하게 얼버무리거나 예민한 자의식을 발휘해 관심을 잃지도 않는다. 뭘 어떻게 말하고 언제 눈을 부릅뜨며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폴만큼이나 현명하게 잘 알고 있다.
해외에서 도움을 받을 길도 막막하며 그나마 한줌의 유엔평화유지군조차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어떻게 보여주는가. 후투족 민병대가 집어던진 피 묻은 유엔군 헬멧으로 보여준다. 피 한 방울 안 보여주면서 어떻게 관객을 르완다 학살 현장으로 데려가는가. 후투족 민병대가 아스팔트 바닥을 중국제 벌초용 칼날로 쓸고 가는 소리로 그렇게 데려간다. 무고한 대학살이 있었고 힘있는 자들이 돕지 않았으나 한 의인이 있었고 그의 지혜에 힘입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졌다. 짧고 단순하고 우직하지만 매우 큰 망치가 되어 인류의 둔감한 영혼을 때리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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