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적인 의문에 답을 하지 않는다.....★★
5살 된 딸 혜린(김소현)을 유괴 당한 목사 주영수(김명민)와 아내 민경(박주미)은 범인에게 돈을 전달하려다 경찰이 있음을 눈치 챈 범인이 도망가면서 끝내 아이를 찾지 못한다. 그로부터 8년 후, 영수는 목사직을 포기하고 의료기기를 판매하며 생활을 이어가고, 민경은 혜린이 죽지 않았다며 여전히 혜린을 찾아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줄 알았던 혜린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고, 유괴범 병철(엄기준)은 새로운 거래를 제안한다.
언제부터인지 많은 한국 스릴러 영화가 어린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아, 피폐된 아버지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부권이 소멸되어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란 진단도 있을 듯한데, 어쨌거나 이런 차원에서 <파괴된 사나이>는 최근 한국 스릴러 영화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긍정적 차원이든 부정적 차원이든 간에.
<파괴된 사나이>는 거의 볼 생각이 없었던 영화였다. 시놉시스라든가 특히 김명민 같은 배우가 출연한다는 점에서 궁금증이 일기도 했지만, 여러 영화 관련 잡지나 전문가 또는 네티즌의 평이 그다지 좋질 않아 나로선 관람 희망 순위 자체에 들어있질 않았다. 이 영화를 보게 건 오직 하나, 토요일에 친구와 약속을 하고는 여차저차 다른 일이 생기면서 약속장소에 상당히 이른 시간에 도착하게 되었고, 하필 약속 장소가 극장 앞이었으며, <파괴된 사나이>가 빈 시간을 정확히 때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근 PC방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 또는 극장 내부의 휴식공간에서 책을 읽거나 아이폰으로 노는 게 영화를 보는 것보단 나았을 것 같다.
나에게 이 영화의 시놉시스가 흥미로웠던 건 다름이 아니라 ‘왜 아이를 8년 동안이나 살려두었는가?’란 점이었다. 이는 일반적인 유괴범의 심리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유괴 당하고 난 후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사실상 아이를 찾기 힘들다고 한다. 이는 유괴범이 바라는 돈을 건네주거나 건네주지 않거나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은 아무리 범인이 협박을 해도 아이를 유괴 당했을 때에는 바로 경찰에 신고하는 게 그나마 아이를 찾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라 얘기한다. 왜냐면 유괴범에게 진정한 목적은 돈이고 아이의 안위가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아이의 생존은 유괴범에게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괴범 중에 아이를 돌려주지도 않고 살려두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유괴의 목적이 아이 자체인 경우에 그렇다. 비뚤어진 부성이나 모성이 원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아동성애자의 경우나 그도 아니면 앵벌이를 시키기 위해 납치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병철은 8년 동안이나 혜린을 살려두었다. 왜? 주영수 목사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아니면 아동성애자? 그도 아니면 아이에 대한 집착? 그런데 <파괴된 사나이>는 이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사실 난 연출자가 이 부분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왜냐면 이 의문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절대로 이렇게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철은 스스로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라고 얘기한다. 그렇다. 유괴범이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 아이로 인해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에도 병철은 8년 동안이나 아이를 키우며, 그 사이에 유괴한 많은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살해했다. 왜? 유독 혜린이 말을 잘 들어서?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8년이 지나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으면 이제 혜린의 필요성은 감소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병철은 혜린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집착을 보인다. 영화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심리적 상태다.
감독이 이 부분을 그다지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두 번째 이유는 8년 만에 병철이 영수에게 연락하게 된 이유가 단지 우연히 주차문제로 만났기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스릴러 영화에서 모든 게 계획되고 의도된 것일 수만은 없다. 우연이라는 요소도 분명히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8년이라는 시간 후에 우연히 마주치면서 병철이 혜린을 미끼로 다시 돈을 요구한다는 설정은 왠지 정밀하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이렇다보니 병철의 캐릭터는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상당히 이성적인 살인마 같다가도, 어느 순간 감성적으로 돌변해 버린다. 물론 미친놈이니깐 그렇다고 얘기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영화 속 병철의 캐릭터라면 앰프를 사기 위해 들렀던 집에서 돌발적인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집을 나왔다가 다시 찾아가서 죽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범죄를 저지르기에 그 토록 많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하나의 단서도 남기지 않았는데, 앰프를 사기 위해 남긴 수많은 흔적들과 살인이 일어난 시간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다? 트집을 잡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 자체에서 많은 논리적 충돌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듯 영화의 장면 자체로만 보면 때깔도 괜찮은 편이고 나름 스타일리시한 면도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장면들이 합쳐져서 화학적 결합에 의한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면들만 모아서 이어 놓은 것 같이 느슨하고 허술하다. 출연배우들, 특히 김명민이나 엄기준의 연기가 나름 좋았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 영화를 관람하기엔 너무 버겁다.
※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데 무심코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 영화 쪽에서 일하는 후배인데, 아마 <파괴된 사나이>의 스텝으로 참여했었나 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감명 깊은 순간이 후배의 이름을 엔딩 타이틀에서 발견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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