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녀의 우정과 사랑을 죽음과 연결시켜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던 <연애소설>의 이한 감독은 전작보다 더 많은 것을 이번 영화에 담아내려 한다. 영화의 틀은 뻔한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청춘의 꿈을 심어놓고 요리저리 가지 치는 진행방식은 흥미롭지만 감정이입은 자꾸만 차단된다. 그렇다고 대중적 ‘재미’가 <청춘만화>에 결여됐다는 말이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감독이 의도한 삶의 다양한 코드들이 주인공을 기점으로 도처에 포진해 있어 지환과 달래의 우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몰입하기 힘들어서다.
툭하면 플래시백으로 지환과 달래의 과거로 넘어가 그들이 꿈이 원대하지는 않지만 얼마나 청춘다운 것인가를 말해주는 대목은 여러 번 반복되다보니 지루함을 넘어 식상함으로 다가온다. 액션배우를 꿈꾸는 지환의 우상이 이소룡이 아닌 성룡이란 설정은 변화된 신세대의 감성을 대변하지만 톡톡 튀는 시선을 갖춘 연출의 힘은 부족하다.
중후반 급작스런 이야기 진행방식의 전환은, 보이는 얘기꺼리만 풍성하게 만들 뿐, 청춘에 관한 최소한의 정의조차 내리지 않고 있다. 뭔가 있는 듯한, 상징과 의도들 또한 구태의연한 절차 속에서 청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나열로 전락해 버린다. 결국 이한 감독의 청춘영화는 글자 그대로 靑春에만 의존해 보는 이의 아쉬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극적인 순간을 신파로 몰지 않는 권상우의 낙천적인 대사는 긍정적인 ‘청춘’의 모델을 제시하려는 영화의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감성의 집합체인 이 시대 청춘들을 영화, <청춘만화>에선 찾지 못하겠다. 막 건저올린 물고기마냥 신선한 권상우의 연기는 영화의 재미를 보장하고 오랜만에 웃통 까주는 그의 육체적 서비스는 청춘의 대표격 이미지로 각인되지만 단지 버라이어티하게 영화 안에서 소비될 뿐 결론은 ‘열려 있다’. 여기서 열려 있다의 뜻은 관객 스스로 자기암시를 걸어 영화의 서툰 만듦새를 포용하게끔 만드는 영화의 무책임한 태도를 꼬집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