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머리히가 다시 재난영화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전작들을 통해 도시를 태워버리고(인디펜던스 데이), 큼지막한 괴물을 집어넣고(고질라), 물로 수장시키고 냉동실에 넣어버리듯 꽁꽁 얼어붙게까지(투모로우) 했었죠. 여기까지만 해도 원없이 지구를 자기 멋대로 파괴한 것 같았는데, 2012년에 지구가 종말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어낸 2012를 통해서 그는 전작들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원 없이 지구를 파괴합니다.
2009년, 과학자들이 지구가 머잖아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미국의 대통령을 필두로 한 세계의 정상들이 모여서 대책(?)을 강구합니다. 그리하여 중국에 있는 계곡에(정확한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중국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기억나네요..) 큼지막한 방주를 만들게 되고, 전 세계의 정상들이나 부자들이 10억 유로를 내고 방주 티켓을 사는 거죠.
거의 10분이 조금 넘는 서론이 끝나고 영화의 배경은 제목대로 2012년으로 갑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커티스(존 쿠삭)는 전형적인 재난 영화의 인물입니다. 아내와 이혼하고, 책만 쓰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은 모처럼 자식들과 함께 옐로우스톤 화산으로 놀러갑니다. 제한 구역에서 서성거리다가 군에게 붙잡히게 된 커티스는 일종의 경고를 받게 되죠. 다시 집으로 돌아간 커티스는 위기를 느끼고 전 가족을 데리고 켈리포니아를 탈출하여 중국에 있다는 방주를 향해서 갑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다시 가족과 화해하게 되죠.
커티스를 빼고도 이 영화의 인물들은 죄다 전형적인 재난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인물들입니다. 대통령도 그렇고, 과학자들도 그렇고, 그저 평범한 사람들도 다 우리가 많이 봐왔던 캐릭터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는 희생과 연설,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설명들도 있고 짧은 시간 만에 끊긴 가족 간의 안타까운 전화 등등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괴짜들도 보이죠.
감독은 이러한 전형적인 인물들을 가지고 전형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이 영화에서는 감독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넣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전형적이어도 몇몇 괜찮은 장면들도 눈에 보이지만, 그와 동시에 `이 이야기는 없애도 될 것 같고, 이 이야기는 좀 더 부각시켰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끊임없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온전하게 먹히는 인물들은 별로 없고, 2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을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부족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명백한 것은, 비록 감독과 주연 배우들이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결합되는 방식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에서 감독이 더 공을 들인 건 여전히 특수효과와 스케일이라는 겁니다. 이 영화의 스케일에 대해서는 뭐라 깔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블록버스터 중에서 스케일로만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겁니다. 그 많은 제작비를 어디에다가 넣었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감독은 실로 많은 도시를 파괴합니다. 감독은 켈리포니아를 물속에 수장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서, 옐로우스톤 화산을 터뜨리고, 라스베가스를 화산재로 뒤덮이게 하며, 브라질의 예수상 동상과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무너뜨리고, 하와이를 불태우고, 워싱턴에 거대한 해일을 몰아닥치게 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히말라야를 물에 잠기게 합니다.
확실히 켈리포니아를 파괴하고 물속으로 침몰시키는 장면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고, 옐로우스톤 화산이 폭발하는 것은 엄청난 장관인데, 이 엄청난 장면들이 지나고 나면, 나머지 장면들은 그저 그런 것처럼 느껴질 공산이 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거대한 해일 장면은, 영상은 엄청나지만,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길고 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결국 이 영화는 전형적인 에머리히 영화에서 2배 이상의 재난 장면을 첨가하고 미국 우월주위만 조금 빼고, 그 대신 중국이나 아프리카의 우월함을 좀 더 보여주고, 이야기의 변화 없이 인물들만 1.5배 정도 더 넣은 영화입니다. 스케일이나 재난 장면만을 기대하고 본다면 영화는 압도적이지만, 재난 영화니까 다른 블록버스터와는 다르게 스토리도 어느 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본다면 영화는 실망적으로 다가갈 겁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스토리든 스케일이든 이 영화는 해운대보다는 더 나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고(원래 계획대로 이 영화가 7월 달에 나왔다면 해운대는 간신히 500만 관객을 채웠을 지도 모릅니다.) 거대 예산을 들인 철저한 상업 영화니 망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에머리히의 이전 재난 영화에 비해 영화의 퀄리티가 발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 이 3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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