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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기의 중요성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jimmani 2010-03-05 오전 1:13:15 975   [1]
 
팀 버튼만큼 판타지의 진심을 철석같이 믿는 감독도 보기 드물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판타지를 풀어내는 그는 판타지를 현실과 분리해놓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롤러코스터 수준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처음엔 놀라운 체험이다가도 결국은 그것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과 연결된다. 비현실적인 상상들이 펼쳐짐에도 그 속에 담긴 목소리에는 조용한 힘이 들어가 있다. 언제나 희한한 상상과 공감할 만한 목소리를 함께 담아왔기에 그의 영화는 나올 때마다 대작 대접을 받아왔고, 많은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런 그가 상상이 유기체와 같이 움직이는 이야기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영화로 만든다니 어찌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역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를 잘 알려진 동화의 복사본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가 오롯이 담긴 강렬한 영화로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다. 왜 이 영화는 포스터나 예고편에서 앨리스보다 그녀를 안내하는 정신나간 모자장수를 앞세울까. 앨리스의 호기심 어린 눈빛보다 모자장수의 똘끼 어린 눈빛이 왜 강조됐을까. 영화를 보고 나니까 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풍부한 상상력과 모험심을 지닌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지 역시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 앨리스 킹슬리(미아 바시코브스카)는 19세가 되자 주변으로부터 이제 조숙한 숙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무언의 압박에 시달린다. 아버지가 있었다면 편을 들어줬겠지만 그만 세상을 떠나 앨리스는 더욱 외롭다. 급기야 앨리스는 어느 귀족 집안의 파티에 갔다가 알고 지내던 남자로부터 공개 청혼을 받기에 이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은 결혼이 무리수인 것 같은 앨리스는 자리를 피하고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토끼를 따라 어느 구멍으로 들어간다. 끝도 없이 들어가는 구멍을 통과한 끝에 그녀가 도착한 곳은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듯한 이상한 나라. 그곳에서 만나는 이들마다 그녀더러 앨리스냐고 아는 척을 한다. '내가 여기 와 본 적이 있던가?' 앨리스는 의문에 시달린다. 그런 그녀가 만나게 된 이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모자장수(조니 뎁). 그는 앨리스에게 사악한 붉은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의 지배로 황폐해진 나라를 구해 선량한 하얀 여왕(앤 해서웨이)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렇게 나이 스물을 앞두고 앨리스에게 예기치 못한 모험이 시작된다.
 
조니 뎁, 앤 해서웨이, 헬레나 본햄 카터 등 쟁쟁한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들은 사실 주연이 아니다. 물론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강한 인상을 남겨주지만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하는 주인공은 당연히 앨리스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신인인 앨리스 역의 미아 바시코브스카(많은 곳에 '와시코우스카'라고 되어 있던데 사실은 '바시코브스카'가 맞는 발음이다)는 그만큼 신선한 이미지로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자그맣고 동그란 얼굴과 가녀린 몸매는 연약한 소녀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끊임없는 궁금증을 품은 듯한 표정은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으로 상황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가녀린 소녀와 적극적인 여인의 중간에 서 있는 듯한 이미지로서 앨리스 역에 매우 적합한 듯 보인다.
 
 
한편 영화가 지니는 핵심적인 재미나 의미를 품고 있는 인물들은 앨리스의 주변인물들인 이상한 나라 속 사람들이다. 팀 버튼과 일곱 작품을 함께 했지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페르소나도 없을 것 같기에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그는 이 영화에서도 변화무쌍한 연기를 펼친다. 강렬한 색조 화장부터 범상치 않은 그의 캐릭터는 조울증을 품은 듯 극도의 밝음과 극도의 광기와 극도의 우울함을 겸비한 다중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본연의 모습은 온전히 버린 듯 광대처럼 과장된 그의 연기는 역시 매력적이다. 더불어 그는 앨리스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면서 이렇게 정상적이지 못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이것은 곧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붉은 여왕 역의 헬레나 본햄 카터를 두고 넘어가면 또 섭섭하다. 역시 팀 버튼과 부부의 연을 맺은 이후로 영화적 동반자가 된 그녀는 생각보다 강력한 코믹 연기로 영화에서 웃음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부풀어 오를 것만 같은 크기의 머리를 지닌 채 세상의 온갖 멀쩡한 것들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광기어리긴 했지만 만화적이기 이를 데 없어서 피식피식 웃음을 유발한다.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굴지만 표정 자체에 비춰지는 빈곤한 마음은 붉은 여왕을 단순한 악역이 아닌, 그저 대립되는 캐릭터일 뿐 어느 정도 애정이 가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든다. 하얀 여왕 역의 앤 해서웨이도 희극적인 연기를 곧잘 펼쳐 보인다. 행동 하나하나를 마치 발레단 무용수마냥 나풀나풀거리다가도 틈틈이 그 가식(?)을 벗어던지는 그녀의 모습은 우악스러운 듯 은근 연약한 내면을 지닌 붉은 여왕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확실한 캐릭터를 형성한다.
 
영화의 스케일부터가 좀 큰 편이긴 하지만 캐릭터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정성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이상한 나라 전체를 뒤덮고 있는 이상한 존재들은 그 코믹한 기괴함이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머리가 너무 커 비현실적인 붉은 여왕과는 반대로 몸이 너무 길어 비현실적인 호위무사 하트 잭(크리스핀 글로버), 은근 고지식한 말하는 토끼(마이클 쉰 목소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거대아기 '보우'를 연상시키는, 괴상한 듯 하지만 꽤 귀여운 쌍둥이 트위들덤 & 트위들디(맷 루카스), 담배연기에 둘러싸여 사는 골초 애벌레 압솔렘(앨런 릭맨), 중후한 목소리로 공중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히스테리컬한 외모의 고양이 체셔(스티븐 프라이 목소리)까지 관객까지 이상한 환상에 휩싸이게 하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지닌 캐릭터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영화의 빛깔을 풍성하게 만든다.
 
 
이 영화가 주목받은 중요한 이유로 아이맥스 3D 상영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이 영화를 아이맥스 3D로 봤는데, <아바타>가 워낙에 아이맥스 3D 버전을 통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터라 많은 관객들이 <앨리스> 또한 그런 면에서 기대를 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의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아바타>가 아이맥스 3D 체험을 영화 속 판도라 세계를 직접 보여주는 듯한 창의 역할로 차용했다면 <앨리스>는 그보다 좀 다른 방식으로 아이맥스 3D 방식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앨리스>의 아이맥스 3D는 손에 잡힐 듯한 실제감과는 좀 거리가 있다. 오히려 창이 코 앞으로 향한다거나 체셔 고양이가 둥둥 뜬 채로 서서히 다가오는 등 3D 영화가 줄 수 있는 말초적 경험에 어느 정도 충실하다. 대신 <앨리스>는 영화가 품고 있는 꿈같은 환상의 세계를 옮겨오는 데 아이맥스 3D를 충실히 활용한다. 아이맥스의 '쩌는' 화질 덕분에 이상한 나라의 오색찬란한 면면이 눈을 호강하게 하고, 간간이 등장하는 박진감 있는 액션 장면은 그 속에서 3D 영화 특유의 스릴감을 더해준다. (특히 초반부 앨리스가 구멍에 빠져들어가는 장면은 백미다.) 이와 함께 영화는 여러 장면에서 약간 몽롱한 분위기의 색감을 구사하기도 하는데, 3D를 통해 이것이 입체적으로 다가오면서 이상한 나라가 자아내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 잘 느낄 수 있게 한다. 다만 아이맥스 3D가 아닌 일반 디지털 3D는 상영관에 따라서 오히려 일반 2D 버전보다 색감이 덜 두드러져 보일 수도 있다.
 
이렇게 <앨리스>는 독특한 캐릭터와 화려한 색감에 3D 체험까지 더해 대중적인 오락영화로도 일단은 손색이 없다. 하지만 팀 버튼은 대중적이기만 한 오락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매 작품마다 그의 취향이나 고유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놓는데, <앨리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동화를 원작으로 했고 화려한 특수효과가 더해졌기에 좀 덜하겠거니 싶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앨리스>는 팀 버튼의 취향의 어느 한 단면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그는 영화를 통해 때론 감성을 애틋하게 자극하고(<가위손>, <빅 피쉬>), 때론 간담을 서늘케 하기도 하고(<슬리피 할로우>, <스위니 토드>), 때론 히스테리컬한 재치를 과시하기도 한다(<화성침공>, <찰리와 초콜릿 공장>). <앨리스>는 세번째 경우, 히스테리컬한 재치 과시에 해당하는데, 그가 영화 속에 펼쳐놓은 이상한 나라의 풍경과 그 속에서 노니는 캐릭터들을 지켜 보자면 그 느낌이 제법 묘하다. 월트 디즈니와 손잡고, 디지털 3D라는 최첨단 기술까지 가져다 만든 블록버스터인데 이렇게 영화 내내 어딘가 똘끼가 충만해 있다니. 뭔가 신선한 쾌감이다.
 
 
애초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이상한 나라에는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영화는 이를 팀 버튼의 방식으로 더 희한하게 구체화시킨다. 이름부터가 기존의 '원더랜드'가 아니라 '언더랜드'인 이 세상에서, 앞뒤 안 맞는 말로 서로 티격태격 싸우다 급화해하기를 반복하는 트위들디 & 트위들덤 쌍둥이, 쉼없이 뭔가를 깨부수고 자기가 뭘 들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는 토끼 등 조연 캐릭터들부터가 정상이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역시 '즐복한', '좋마운', '날뜩한' 등 여러 단어가 마구 뒤섞여 있어 혼란스럽다. 그리고 이런 혼란스런 비정상의 분위기는 주연급 캐릭터들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자신의 광기를 제어할 수 없어서 누군가 이름을 불러줘야지 가까스로 멈추고, 그럴 때마다 '갈가마귀와 책상이 왜 같은가'와 같은 뜻모를 질문을 반복하는, 도대체 본래 정신은 어디에 놓았는지 궁금한 모자장수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큰머리 컴플렉스 때문인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머리를 베어버리겠다고 하고, 자신처럼 특정 신체부위가 큰 사람을 곁에 두길 좋아하는 붉은 여왕이 있다. 정상이 아닌 이들로 가득찬 세상을 시종일관 보여주는데, 영화는 이런 분위기를 오히려 긍정적이고 즐거운 분위기로 독려한다. 그리고 앨리스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놀랍게도 성장해간다. 뭘 배울 게 있어서?
 
영화는 어느새 '순수하게 미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눈치 보지 않고 앞뒤 재지 않고 미친 듯이 생각에 빠져보는 것. 이것은 사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아버지의 상상력이 앨리스에게 고스란히 유전처럼 이어지면서 드러나는 부분이다. 앨리스는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들은 '멋진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라는 말을 이후 삶의 이정표처럼 가슴에 품는다.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를 긋지 말고 미친 듯이 상상에 빠지다 보면 마침내는 불가능한 일이 눈 앞에서 펼쳐질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앨리스는 결국 이상한 나라에서 벌이는 모험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이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이다. 눈 앞에서 그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을 꿈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범함.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상상을 펼친다고 해서 남들에게 미친 사람 소리 들을까 몸을 사리지 않고 당당히 '그래 나 미쳤다'고 웃으며 인정할 줄 아는 자신감. 결국 멋진 생각은 이 미친 듯한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기에,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시원하게 미칠 줄 아는 용기를 말이다.
 
 
이처럼 <앨리스>가 일련의 제정신 아닌 캐릭터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어느 베스트셀러 책의 제목처럼 '미쳐야 미친다'는 내용인 듯 하다. 정신 나가는 게 일상처럼 되어 있던 모자장수마저도 어느 순간 앨리스에게 '나 미친 거 아닐까?'하며 의문을 제기하지만, 과거엔 자신이 위로를 받던 앨리스가 이제는 '미친다는 건 멋진 일'이라면서 위로를 해준다. 현실의 숱한 문제를 앞두고 전전긍긍하던 앨리스는 말도 안되는 일과 말도 안되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현실에 맞설 용기를 얻어간다. 앞뒤 보지 않고 미친 듯이 돌파할 줄 아는 용기 말이다. 대책없는 미침이 때론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모범적인 교훈은 결코 아니지만 팀 버튼의 시각에서 만들어낸 상당히 매력적인 메시지임은 틀림없다. 마냥 미쳐 보이는 모자장수가 앨리스보다 앞서 포스터에 나와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총 2명 참여)
kimshbb
좋은 글이네요   
2010-03-24 14:13
koreanmarc
어린이를 위한 동화가 아닌 성인을 위한 동화죠..

전 캐릭터가 제일 인상 깊었어요...   
2010-03-10 11:01
spitzbz
여느 작품보다 교훈성을 많이 역설한 팀버튼 작품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미치자의 교훈을 꽉 집어내셨네요~ 정상인 서민은 역시 평범한 월급쟁이로 남의일해주다 은퇴하거나 동네가게하며 살다 인생접지만 미친사람들은 (좋은방향으로) 천재소리듣거나 음악예술 분야로 성공해 이름석자 남기는게 증거랄까요.. 뭐 요즘은 돈마니버는게 최고라치는 단순한 세상이라 인정안할 분도 많으시겠지만.. 암튼 미치다의 의미를 영화인의 시각에서 논한점은 무척 감동적이고 교훈적이었습니다.
 
  
2010-03-06 02:26
moviepan
ㅍㄹ   
2010-03-05 21:21
snc1228y
감사   
2010-03-05 09:41
ghkxn
동화의 세계   
2010-03-05 02:13
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 Alice in Wond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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