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보고나서도 뭔가 찝찝함이 계속 남았더랬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나름 리뷰를 작성했고, 시간이 흘렀다. 뭔가 더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그냥 무심코 넘기고 말았다. 그러다 최근 한 평론가의 글을 읽는 순간 내가 찝찝해 했던 게 무엇인지 퍼뜩 되살아나며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 평론가는 글에서 <용서는 없다>가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 좀 더 구체적으로 이성호(류승범)가 벌이는 복수의 요체는 ‘집안의 불명예가 된 집안 여성을 둔 남성의 굴욕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을 본 순간, 내가 무엇을 찝찝해했는지가 명확해졌다. 그건 이성호의 철저하면서도 잔인한 복수의 대상이 왜 강민호(설경구)와 오은아(조수정)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왜 이성호는 강민호와 오은아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건 단순하게는 위증으로 인해 자신의 누이가 더러운 여자가 되었고, 그 때문에 강간범들이 무죄로 풀려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영화를 보면서 뭔가 찝찝하다고 생각한 건 그렇다면 이성호는 실제로 자신의 누이를 강간하고 죽게 만들었으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유유히 무죄로 풀려난 범죄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복수를 감행했는가 이다.
영화에선 이 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간다. 바로 누이를 강간한 세 명의 범죄자는 그저 단순한 사고사로(위장된) 사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누이를 강간하고 죽게 한 범죄자는 단순한 교통사고로 죽이고, 위증을 한 증인에 대해서는 사지를 자르고, 딸의 육체를 탐하게 하는 등의(그래서 결국엔 스스로 죽게 만드는) 잔인한 복수를 할 정도로 증오심이 더 큰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를 보면서 이 부분을 그저 단순히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 그러니깐 강민호라는 증인의 직업을 활용한 복수극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딱히 정답은 아닌 것 같아 유예해 둔 것이다. 난 그 평론가가 얘기한 ‘집안의 불명예가 된 집안 여성을 둔 남성의 굴욕감’이라는 정의가 대단히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성호는 누이가 죽었다는 그 자체보다는 창녀로 비춰졌다는 사실에 대해 더 크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부지불식간에 이성호(또는 남성들) 속에 침투해있는 일종의 가부장적 권력 의지의 외화인 것이다.
이와 함께 <용서는 없다>는 매우 비겁한 영화라는 점에서도 용서하기가 힘들다. 3일이라는 시간을 주며 풀어달라는 이성호의 조건은 <세븐데이즈>를 연상하게 한다. 난 사실 <세븐데이즈>를 그다지 재밌게 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세븐데이즈>는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복수 과정에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몸통을 지목하고 그의 정체를 까발린다. 그러나 <용서는 없다>는 실제로 위증을 하게 만든 거대한 권력, 몸통에 대해선 그 누구도, 심지어 누나의 죽음(이 아니라 누나의 정조가 더럽혀진 것)을 복수하겠다는 이성호조차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왜?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두려워서? 몸통은 놔둔 채 깃털만 살짝 건드린 복수를 가지고는 대단한 복수를 한 것인냥 온갖 폼을 재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정말 용서하기 힘들게 만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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