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짜깁기 한 후 감정의 과잉 한 큰 술....★★
여섯 조각으로 토막 난 여성의 시체가 금강 하구에서 발견된다. 시체는 술집에서 일을 하는 오은아(조수정)로 밝혀지고, 경찰은 오은아의 애인인 민병도(이정우)를 범인으로 지목한 후 체포해 자백을 받아 내려 한다. 그러나 신참 형사인 민서영(한혜진)은 부검의 강민호(설경구)의 도움을 받아 지역 환경운동가인 이성호(류성범)를 체포, 자백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한편, 미국에서 귀국하는 딸 강혜원(김열)을 기다리던 강민호는 자신의 딸이 이성호에게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성호는 강민호에게 3일 안에 자신을 풀어주지 않으면 딸을 살해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외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고 있는 <아바타>에 대한 지적 중, 가장 많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아바타>가 여러 영화를 연상하게 하는, 또는 여러 영화에서 모티브를 가져 온,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잡탕 내지는 짬뽕영화라는 것이다. 물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처럼 거의 대부분의 영화를 해체시키면 몇 편의 원전에 기대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단지 그 영화가 다른 영화를 연상하게 한다거나 또는 다른 영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하는 것 자체로는 비판이 될 수 없다. 문제는 빌려온 여러 설정들이 새로운 영화 안에서 유기적으로, 동일한 논리에 의해 작동하고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다. 또는 그게 아니라면 닐 마샬 감독의 <둠스데이>처럼 이 영화, 저 영화의 멋진 장면을 스토리 속에서 화끈하게 재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어쨌거나 <용서는 없다>는 한국 스릴러 영화의 집대성 같은 느낌을 준다.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감으로 무식하게 수사하는 시골 경찰과 과학과 이성으로 수사하려는 신참 경찰의 대립까지도), 추격하는 장면과 그 배경 음악에선 <추격자>, 특정 시간 안에 무죄로 방면해야 된다는 점에선 <세븐데이즈>, 증거를 변조한다는 점에선 <시크릿>, 거기에 <올드보이> 식 설정까지 덧붙여진다. 한국 스릴러 영화만이 아니라, 초반 강민호와 한혜진의 관계는 <본 콜렉터>의 덴젤 워싱턴과 안젤리나 졸리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조합의 결과가 그저 짜깁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게 느슨하다는 점이다. <용서는 없다>는 누가 범인인지 알아내는 스릴러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성호가 범인임을 감추지 않으며, 공범의 존재까지 드러낸다. 즉, 이 영화는 ‘왜’에 초점이 맞춰진 스릴러 영화라는 점에서 ‘감정’의 흐름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반전에 대한 욕심은 감정을 흩트리고 헐겁게 하는 부정적 요소로 기능한다. 그러니깐 결말을 정해 놓고는 스토리가 결말로 유도되도록 의도적으로 짜맞춘 듯 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증거를 조작하고 이성호를 무죄로 풀어줘야 하는 강민호는 민서영에게 이성호가 범인이 아닐 수 있음을 은근슬쩍 내비친다. 강민호는 “이성호는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조차 힘든데, 어떻게 여자를 납치해 죽일 수 있었을까?”라고 민서영에게 말한다. 그렇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공범의 존재를 의심해야하는 당연한 상황에서 수사관인 민서영은 대뜸 “그렇다면 이성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라고 반문한다.
또 다른 장면 하나. 사건을 추적하던 강민호는 이성호의 공범 박평식(박상욱)의 자택을 알아내어 (솔직히 딸을 납치해 유력한 공범으로 몰릴 수 있는 박평식의 자택에 두었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뒤지던 중 딸이 있을 것으로 거의 100% 확신할만한 공간을 발견하는데, 바로 그 때 박평식이 집에 들어오는 걸 목격한다. 결국 강민호는 박평식을 추격하기 위해 딸의 존재를 확인할 기회를 놓친다. 누구나 그 상황에서 나름 고민이 생기긴 하겠지만, 커텐 하나만 들춰보면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린다는 건 조금은 무리하다는 느낌이다. 거기에 강민호가 이성호를 면회하려 하자 경찰은 ‘안 되는 건데, 특별히 한 번만 봐드린다’고 10분간 허용했는데, 그 이후로는 수시로 면회하는 장면도 억지스럽다.
이렇듯 <용서는 없다>는 경과들이 쌓이고 쌓여 논리적으로 합당한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오히려 반대로 결론을 위해 설정들이 복무한다고 느껴진다. 사소하지만, 부검의가 사건 현장에 나타나거나, 살해 용의자가 유치장에 지팡이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 그리고 중요한 증거들이 우연으로 획득된다는 것도 좀 어설프다. 그런데 이 영화의 반전 내지는 결론에 대해서는 괜찮은 평가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의 반전이나 결론 부분도 딱히 좋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단서들이 드러날 때마다 대충,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재빨리 범인을 제압하고 검거해야 할 민서영이 그저 빤히 두 남자의 설전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에서 약간의 짜증이 밀려왔을 뿐이다.
※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일직선으로 우직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에서 나름 재미있게 관람할 여지는 있다. 사실 내가 관람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윤종강(성지루) 형사의 시종일관 이어지는 민서영에 대한 성적 욕설과 태도였다. 여군 하사관이 군 장성을 성희롱으로 고소하고, 모든 공공기관과 회사가 정기적으로 성차별, 성희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무슨 쌍팔년도 느낌의 형사란 말인가? 혹시 감독은 시골 형사는 그러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는 건 아닐까? 거기에 덧붙여 특히 이성호가 내뱉는 말들은 ‘언어’라기보다는 그저 멋있게 보이려는 치기에 가깝게 느껴져, 조금 간지럽다.(허세쩐다)
※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너무나 전형적인 음악의 사용. 식상할 정도.
※ <용서는 없다>를 보고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문제다. 가끔 전문가들의 영화 평론에 대해 편파적이라거나 치우쳐져 있다고 비판하는 반응을 접할 때가 많다. 난 기본적으로 진정 중립적인 학문은 없으며, 오히려 중립적으로 보이는 것이야말로 사기이고 기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문과학의 경우엔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찰자의 가치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하면 자연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을까? 물론 실험실의 수치 자체는 중립적일 수 있다. 문제는 그 수치를 해석하는 건 어쨌거나 연구자이고 그 과정에 연구자의 가치관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자연과학도 엄밀히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누가 돈을 대고, 누가 의뢰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연구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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