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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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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 오후 8:2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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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 사회의 기본가치인 사회구성원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그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사회의 책임은 점차 방기되어 가고 있다. 이런 무책임한 사회에 대한 말로는 결국 분노와 보복만이 일상화된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지닌 공동체일 것이다. 이런 비참한 사회의 모습은 담은 영화가 바로 [모범시민]이다. [모범시민]이란 영화는 반어적이게도 사회의 기본적 책무를 다하는 공무원도 없고, 타인의 생명을 인정해주는 시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속엔 언제부터인가 사회를 지키기 위한 사회적 노력과 행위는 사라지고 성과에만 골몰하는 직업적 공무원들만 남게 됐다. 아니 직장인만 남게 된 것이다. 이 직장인들 속엔 사회를 지키는 보루인 검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피해에 대해 둔감하게 됐고, 사회적 정의와 소속감을 높이려는 행위보단 문제를 대충 무마하는 선에서 모든 것을 종결 짓는 냉정하고 무정한 행위만 남발하게 됐다. 어느덧 직장에서의 성공만을 추구하는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사회가 되어 있었다. 특히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 곳조차도 그러기에 영화 속의 현실은 관객을 슬프게만 한다.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인 ‘클라이드 쉘튼(제라드 버틀러)’은 분노했다. 자신의 딸과 아내가 무참히 살해된 것에 대한 분노는 물론, 그런 범죄에 대해 사회적 정의를 세우려는 자들이 거의 없었던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단순히 지켜달라고만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의 억울함으로 해소하고, 자신의 가족에게 불어 닥친 명백하면서도 슬픈 진실을 제대로 파헤치고 제대로 된 판결과 응징을 요구했지만 관료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대충 끝내려고만 하는 사회적 제도의 허약함을 보고 그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분이었다.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지 않은 관객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공분. 무서운 일이다. 영화 저편에 있는 현대인들의 냉정함이 무서웠고 타인의 피해와 억울함에 등돌린 현대사회의 냉정함이 무서웠다. 현대인들은 분명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쁘고, 평범하게 살아가게 된 자신들의 모습을 보라고. 현대인의 책임을 지키기엔 너무 작아져 버린 자신들에 대한 자책이 있을 수 있고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바쁘게만 살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타인은 그냥 타인일 뿐이라고. ‘닉 라이스(제이미 폭스)’ 검사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에서 관객들은 충분히 볼 수 있었고 그런 삶이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사회 파수꾼에게도 예외는 아님을. 그래서 안타깝다. 책임과 책무는 사라지고 직업과 직장만 살아 숨쉬는 그런 냉혹한 구조 속에 현대인들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복을 일삼는 자에 대한 처벌은 사실 남의 이야기이며 자기가 책임지는 한에서 책임만 지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냉혹한 지도 모르겠다. 결국 사회는 그에 대한 가해만 했을 뿐 행복을 주지 못했고, 더욱이 행복을 주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빼앗아갔고, 그것을 다시 찾아주는데도 인색했다. 그래서 보복 당했다. 사건이 발생한지 10년 후 가족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본 자와 검사는 다시 만난다. 그러나 한 쪽은 피의자로서, 다른 한 쪽은 검사로서 말이다. 그들간에 주고 받는 대화는 단순한 거래를 담은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의미한다. 사회에 대한 조소와 냉소, 그리고 칼 같은 비판이 숨어 있다. 마지막엔 한 쪽은 결국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이 무슨 공정한 법을 집행해서도 아닌, 사적인 폭력에 의해 죽은 것이다. 영화는 한 개인의 가혹한 불행만을 담았다. 어쩌면 그런 보복에 의해 죽은 자들에 대해 당연한 처벌일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원인제거에 무관심한 사회의 마지막 역시 그렇게 우아하지 못할 것임을 영화는 강력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위험에 우린 모두가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우리 것에 너무 무관심할 때 우린 그런 폭력의 직접적, 간접적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관심은 분명 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회 자신이 낳은 살인마가 죽어가는 모습을 통해 대충 마무리한다. 그러나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가 얼마나 무서운 주제인지 보는 사람들은 모두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분노를 그런 식으로 푼 주인공에게 그 방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심정적인 면에서 동조하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에서 사회의 징벌제도의 순수한 목적으로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단순히 숫자 놀음이 아닌, 대충 타협을 보고 시간을 줄이기 보다, 제도와 징벌, 그리고 개선의 순수한 목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직업적 편이에 의해 무너져선 안 되는 것 역시 무척 중요하다. 언제나 기본적인 원인이 충족되지 못하고 잊혀질 때, 모든 것은 끝나게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영화는 슬프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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