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무섭다. 정말 무섭다. 이제까지 내가 봤던 재난 영화 중에 이렇게 무서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단테스 피크>정도?)
단테스 피크 (Dante's Peak, 1997)
가족영화의 탈을 쓴 재난 공포 영화 ㄷㄷㄷ
특히나 피할 곳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섭다. 정말 조금의 인정도 없이 다 부숴버린다. 물론 우리의 등장인물들은 간발의 차이로 살아나지만 정말 의심의 여지 없이 다 죽는다. 게다가 이전의 재난 영화들에서 사람들의 대규모 몰살을 간접적으로 암시만 했던 것에서 탈피했다는 점이 무섭다. 이 영화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한발자국 더 나간다. 딱 한발자국 더 나갔는데 효과는 엄청나다.
사람들 위를 순식간에 뒤덮는 바티칸 성당, 갈라진 땅 사이로 쏟아지는 사람과 자동차들.
눈앞에 펼쳐지는 생지옥은 이제껏 본적없는 끔찍한 광경이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게 무너진다.
초현실적 크기의 화산폭발 장면도 극장 스크린이 더해져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고 공포는 배가된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그 사이즈가 가늠하기 힘든 정도가 되버려서 충격은 옅어지지만 분명 재난 영화의 한 획을 긋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야말로 재난급 영화만 계속 만들던 감독이 경지에 오른 듯 하다.
10,000 B.C (2008) The Day After Tomorrow (2004) Godzilla (1998) Independence Day (1996) Stargate (1994)
하지만 결국 영화는 딱 놀이기구 수준에서 멈춘다.
어느 재난 영화들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와 갈라지는 땅은 아슬아슬하게 주인공을 쫓는다. 주인공이 가는 길은 장애물들 투성이이고, 순간순간의 미션을 위해 주인공은 위험천만한 시도를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해피엔딩. 롤러코스터는 무사히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지구를 지켜라!>같이 화끈하게 멸망하는 헐리웃 영화는 불가능한건가)
지구를 지켜라! (2003)
결국 이 영화도 '재난'을 '오락'으로써 소비한다. 땅이 꺼지고 있는 와중에도 영화는 농담을 걸어온다. 재난이 너무 리얼해진만큼 그런 농담은 훨씬 더 불쾌해진다. 웃음이 나오니? 지금?
더 나아가 영화의 태도는 재난을 반기는 눈치다.
정신병자처럼 재난을 반기던 '찰리'(우디 해럴슨)처럼 말이다.
Woody Harrelson 찰리 프로스트 역
지나친 말이라고?
이 영화는 결국 가부장적 권위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일에만 빠져있다가 이혼당한 남자. 두 아이는 아내와 함께 산다. 아들은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지도 않고 무시한다. 부인은 성형외과 의사와 재혼했다. 그는 포르쉐를 몰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다. 아들은 그를 더 좋아한다. 남자 자신은 쓰레기같은 소설을 쓴다고 무시당하고 작가일외에 리무진 기사 노릇을 하며 궁상맡게 혼자 산다.
관객에게 감정이입을 호소하는 조건부터가 가부장적이다. 가족을 빼앗긴 가장. 특히 아들과 부인.
여자의 새로운 남편은 여자를 더듬으며 아기를 만들자고 능글맞게 말한다. 뭐 어쩌라고. 관객이 화를 내야하는 부분인건가?
(왜 땅은 그 둘 사이로 갈라질까)
결국 재난은 가부장의 권위를 되찾아준다. 결과적으로 새남편은 죽고, 부인과 아들은 자기품으로 돌아오고, 다시 가족은 제자리(?)를 찾는다. 재난의 연속 속에서 주인공 남자 없이는 다 죽는다. 남자 혼자 다 살려낸다. 재난 속에서야 비로소 원초적인 가장의 위치는 보장 받는다. 그래서 영화는 재난을 반기는 것이다. (얼마전에도 이런걸 본적 있다. <테이큰>!!!)
Taken (2008)
말만한 딸년이 아빠말 안듣고 프랑스 갔다가 인신매매 당해서 팔려갈뻔한걸 아빠가 구해주는 무시무시한 영화
방주(ark)에 탄 '노아'를 구해내는 건 아버지다. 그가 지킨건 결국 인종(human species)이다. 번식을 계속할 수 있다. 짝짝짝. 이 시대에 아빠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원시적인 것 뿐인가 보다. 종족의 보존. (그래서 마지막은 아프리카로 돌아간 것인가) 자랑스럽기도 하지.
아버지의 권위 뿐이 아니다. 재난으로 대통령은 권위를 되찾을 기회를 얻는다. 미국은 다시 경찰 국가로서의 권위를 되찾는다. 예술품과 서적들은 다시 그 권위를 되찾는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땅이 꺼지고 물바다, 불바다가 되지 않으면 권위를 세울 수 없는 세상에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을 지 모른다. '이런 X같은 세상, 차라리 다 뒤집어 엎어져라!'
그런 못난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이 바로 <2012>다. 우리는 다시 그 영화를 보며 쾌감을 얻고 위안을 얻고 만족감은 얻고 집으로 돌아간다. 어차피 10억 유로가 없어서 죽을 처지란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재밌게, 기꺼이 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상업 영화의 상술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훌륭한 영화다.
돈벌어먹기 참 더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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