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해 미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뉴욕은 미국이라는 거대 영미권 국가를 대표하는 하나의 명징한 아이콘에 가까울 것이다. 100층이 넘는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있는 맨해튼, 밤에도 수많은 간판들과 차들로 북적이는 브로드웨이, 연령대를 초월한 별별 일상들이 존재하는 센트럴 파크의 모습은 흔히 미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들이자 모두 뉴욕에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뚜렷한 결과물이라 할 만한 이 도시의 이미지는 트렌드의 최전선, 잠시도 멈춰 있으면 안될 듯한 분주한 거리다. 화려하되, 한편으론 정신없을 것 같다는 뜻이다. 이런 뉴욕의 이미지를 가지고 할리우드에서 옴니버스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기대만큼 걱정이 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랑해, 파리>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시 파리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짚어내 달달한 로맨스로 만들어냈듯이, 뉴욕을 소재로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같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말이다. 눈은 즐겁되 보고 나선 허할 것 같은 그런 영화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결과물인 <뉴욕, 아이 러브 유>는 그런 영화만은 아니었다. 제목과 컨셉트에 걸맞게 뉴욕이라는 도시와 사랑이라는 주제에 꾸준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나, 그 색깔이 생각보다 다양하다. 가벼운 것에서부터 진지한 것까지, 어두운 것에서부터 밝은 것까지, 경쾌한 웃음을 자아내는 것에서부터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것까지, 뉴욕의 그 많은 인구만큼이나 여러 가지 맛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나의 굵은 줄거리는 없고, 여러 남녀의 가지각색 사랑이야기들이 곳곳에서 펼쳐진다. 벤(헤이든 크리스텐슨)은 바에서 마음에 드는 여인 몰리(레이첼 빌슨)를 만나지만 그녀에겐 아버지뻘의 애인 게리(앤디 가르시아)가 있다. 독실한 유대교도와의 결혼을 앞둔 리프카(나탈리 포트먼)은 삭발까지 감당해야 하는 착잡한 심경을 절친한 보석감정사 맨숙바이(이르판 칸)에게 털어놓는다. 영화음악가 데이빗(올랜도 블룸)은 채팅을 통해서만 만난 얼굴도 모르는 여인 까미유(크리스티나 리치)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쌓아간다. 댄스 파티를 앞둔 소년(안톤 옐친)은 다른 파트너가 생긴 예전 여자친구(블레이크 라이블리)를 뒤로 하고 동네 약국 아저씨(제임스 칸)의 딸(올리비아 썰비)을 파트너로 데려가지만 그녀는 휠체어 신세다. 뉴욕 호텔에 온 프랑스 여가수 이자벨(줄리 크리스티)에게 몸은 불편하지만 대단히 친절한 젊은 벨보이 제이콥(샤이아 라보프)이 찾아온다. 거스(브래들리 쿠퍼)와 리디아(드레아 드 마테오)는 충동적인 하룻밤을 보낸 서로에 대해 여전히 감정이 남아있는 듯 복잡한 고민을 한다. 거리의 작업남(에단 호크)은 매력적인 동양 여인(매기 큐)에게 작업을 걸지만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다. 무뚝뚝한 중년남 알렉스(크리스 쿠퍼)에겐 매력적인 여인 애나(로빈 라이트)가 적극적으로 접근한다. 어느 화가는 약국의 젊은 점원(서기)을 짝사랑하며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는 한 남자는 딸뻘 되는 여자아이에게 유독 다정하게 대하며 함께 공원 나들이 시간을 보낸다. 한편에선 몸이 맘같지 않은 할아버지와 수다쟁이 할머니 부부가 서로 티격태격하며 길을 걷는다. 일일이 다 얘기하기도 힘드네, 아무튼 이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뉴욕이라는 한 도시 속에서 펼쳐진다.
일단 눈에 띄는 것은 상당히 다채로운 감독들의 조합이다. 여러 감독과 여러 배우가 함께 한 옴니버스 영화이긴 하나 매 편마다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터라 오히려 <러브 액츄얼리> 식의 다중 에피소드식 구성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런 점에서 브랫 래트너와 같은 할리우드 액션영화 감독에서부터 <미치고 싶을 때>의 도발적이고 어두운 스타일로 알려진 파티 아킨, 일본 멜로의 선두주자 이와이 슈운지, <귀신이 온다>와 같은 대담한 메시지로 알려진 지앙 웬 등 감독 각자의 스타일이 워낙에 뚜렷해서 이들이 한 영화 안에서 그것도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만났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조합이 꽤 자연스러웠다. 에피소드별로 확실한 구분이 없음에도 극과 극이라 할 만한 감독들의 색깔이 무지개처럼 자연스럽게 각각의 에피소드들로 옮겨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자연스런 톤의 변화를 추구하다보니, 영화의 전체적인 전개는 처음엔 밝고 달달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무겁고 진지해지는 방향으로 가는 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보기 전에 예상했던 마냥 달고 닭살 돋는 데이트 무비만은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관객들에게는 세대와 국경을 막론한 다채로운 캐스팅이 매력적일 만하다. 올랜도 블룸, 나탈리 포트먼, 에단 호크, 샤이아 라보프, 헤이든 크리스텐슨, 브래들리 쿠퍼, 크리스티나 리치, 안톤 옐친, 올리비아 썰비, 블레이크 라이블리 등 젊은 배우들부터 크리스 쿠퍼, 줄리 크리스티, 앤디 가르시아, 제임스 칸, 로빈 라이트 등 중견배우들의 활약도 돋보이고, 매기 큐, 서기 등 동양권 배우들도 인상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워낙 많은 에피소드들이 집결해 있는 터라 이들이 등장하는 시간도 많지는 않지만, 짧은 시간동안 대부분의 배우들이 예상보다 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나 샤이아 라보프와 줄리 크리스티가 그들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주는 절제되고 고급스런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앞서 얘기했듯, 워낙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에피소드 별로 어느 정도 편차는 있게 마련이다. 확실히 기억에 남는 잘 빠진 에피소드가 있는가 하면 결국 요점이 뭔지 잘 알 수 없는 밍숭맹숭한 에피소드도 있다. 개인적으로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를 꼽자면 앞에서도 언급한 샤이아 라보프와 줄리 크리스티 에피소드가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 싶을 정도 이 에피소드는 이른바 '격조 있다'. <엘리자베스>의 셰카르 카푸르 감독이 연출하고,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앤소니 밍겔라 감독이 각본을 쓴 이 에피소드는 뉴욕에 온 프랑스 여가수가 젊은 벨보이와 단순히 사랑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어떤 애잔한 교감을 나눈다는 내용인데, 미장센과 음악,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까지 우아함으로 가득차 있다. 뿐만 아니라 타국에 머물게 된 이방인이 느끼게 되는 필연적인 외로움과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일종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교감을 통해 낯설고도 가까운 도시 뉴욕의 이미지를 잘 살려내고 있기도 하다. 이 에피소드에서 줄리 크리스티가 던지는 대사인 '그래서 전 뉴욕이 좋아요. 모두가 어딘가로부터 온 사람들이죠.'라는 말 역시 뉴욕의 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후반부에 등장하는 노부부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몇번의 웃음과 함께 애틋함으로 끝맺는 이 이야기는, 가장 별말 하지 않는 듯 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깊은 말을 하는 듯하는 에피소드다.
반면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를 꼽는다면 초반에 등장하는 지앙 웬 감독의 에피소드가 좀 그렇다. 헤이든 크리스텐슨, 레이첼 빌슨, 앤디 가르시아가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는 꽤 인상적인 시작에 비해 끝맺음이 어중간해서 이야기를 하다 만 듯한 느낌을 준다. 한낮의 고즈넉한 바를 배경으로 세 사람 사이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긴장 관계가 인상적이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분명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얼마 뒤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의 엔딩이라 할 만한 부분도 갑작스러웠다.
더불어 호불호와는 별개로 여전히 그 개성이 드러나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이와이 슈운지가 연출하고 올랜도 블룸과 크리스티나 리치가 나오는 에피소드였다. 뉴욕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에피소드는 전반에 일본적 색채를 집어넣고(올랜도 블룸은 애니메이션 <게드전기>의 음악을 작업 중이고, 집안에는 <데스노트>의 포스터도 붙어있다.) 이야기의 분위기도 언뜻 <4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할 만큼 감독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적인 달콤함을 느끼고 싶다면 브랫 래트너가 연출하고 안톤 옐친과 올리비아 썰비가 나오는 댄스 파티 에피소드를 권한다. 의외의 상황과 코믹함, 결말의 반전까지 대중적으로 잘 빠진 에피소드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취향에 따라서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와 들지 않는 에피소드가 제각기 다를테니, 이 의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진 마시기 바란다.
이렇게 다른 명암과 채도, 명도를 지닌 에피소들이 꽤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사랑해, 파리>의 주인공이 파리가 흔히 '낭만과 로맨스'의 이미지로 합쳐지는 데 반해 뉴욕은 그보다 더 복합적인 이미지를 지닌 도시라는 점에서 다르다.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이유로 건너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만큼 사랑이라는 주제를 잡아도 그 형태가 수천 수만가지가 될 수 있다. 미국 젊은이들의 가벼운 일회성 연애도 있는가 하면, 오래된 부부의 이제는 정이 되어버린 사랑도 있고, 너무나 파편화된 일상때문에 화목한 가족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의 가슴아픈 가족애도 있고,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이방인들의 구원과도 같은 사랑도 있다. 이렇게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는 뉴욕의 모습을 극과 극의 감성을 지닌 감독들이 영화로 만든 만큼, 영화는 보기 전에 예상했던 '톱스타 패키지의 밋밋한 옴니버스물', '뉴욕 관광 홍보 영화',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인상을 어느 정도 뛰어넘는다. 예상했던 유쾌함은 물론 있고, 생각지도 못한 절절한 순간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품격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어두움도 존재한다. 아트하우스 영화에 가까운 <도쿄!>처럼 감독들이 매우 실험적인 전개까지 시도한 건 아니지만, 대중영화로서 어느 정도 맞춰야 할 합일점을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와 도시 탐구 영화 사이에서 적절하게 타협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일반명사에 가까운 단어도 있듯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뉴욕이라는 도시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환상과 현실을 함께 보여주는 곳이다. 분주한 도시적 감각 속에서 펼쳐지는 짜릿하고 달콤한 연애도 있고, 쉴틈없는 삶과 지독한 고독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의 아픔도 있다. <뉴욕, 아이 러브 유>는 달달한 환상만을 심어주지 않고 이 양면을 모두 주목했다는 점에서 괜찮은 옴니버스물이다. 여러 에피소드를 관통하면서 이들의 일상을 카메라로 찍고 다니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마지막에 그녀가 작품 발표회에서 자신이 찍었던 영상들을 보여준다. 어떤 건 심장이 절로 쫄깃해질 만큼 낭만적이기도 하고, 어떤 건 지독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뉴욕이라는 이름 아래 우선순위 따위 상관없이 똑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삶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때론 낭만과 대비되는 우울한 현실이 있다해도 그것 또한 뉴욕의 한 모습인 것이다. 이렇게 <뉴욕, 아이 러브 유>는 뉴욕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 영화가 아니라, 뉴욕의 여러 가지 얼굴을 모두 비추는 공평한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뒤에 더 뉴욕에 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