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남녀에게는 이상형이 있다. 이런 사람이어야지 내가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 그러나 실제로 사랑의 결실을 보는 대상이 이상형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상형에 한참 못미치거나 전혀 다른 방향의 이성과 사랑을 이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이상형이 말그대로 단지 우리가 바라는 이성의 '이상적인 형태'일 뿐이기 때문이리라.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아름답고 동화같은 사랑에 관한 환상을 품지만 현실은 대개의 경우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우스갯소리는, 그만큼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환상이 현실을 배려할 만큼의 설득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뜻일 거다.
이런 환상을 갖고 있기에 남자와 여자는 끊임없이 사랑하다가도 다툰다. 흔히 남녀가 처음 만나 사랑을 일구어 갈 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처음부터 상대에게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고, 어느 정도 상대의 마음에 들도록 치장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이 무르익어가면서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에 관한 진실을 하나둘씩 보여주면, 감동해서 더욱 사랑이 깊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급격히 실망해서 다투거나 헤어지는 경우도 많다. 사랑에 있어서 서로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건 정말 못난 일일까? 영화 <어글리 트루스>는 이와 같은 남녀 관계의 영원한 숙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하지만, '사실 당신들 이렇잖아?'하며 낄낄거리면서 못드러냈던 속내를 까발리는 재미는 꽤나 쏠쏠하다.
새크라멘토 공중파 방송국 PD인 애비(캐서린 헤이글)는 맡고 있는 뉴스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바닥을 기어 걱정이다. 방송국의 압박도 만만치 않게 들어오는 가운데 방송국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인물은 바로 연애학 박사 마이크 채드웨이(제라드 버틀러). 마이크는 케이블 채널의 '어글리 트루스'라는 프로그램에서 남녀관계의 속사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일전에 TV를 통해 마이크를 접하게 된 애비는 그가 여성 혐오증에 사로잡힌 마초라는 판단 하에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방송국의 막무가내 계약으로 결국 둘은 내키지 않지만 한솥밥을 먹게 된다. 역시 마이크는 아침 뉴스와는 전혀 맞지 않는 적나라한 표현으로 애비를 기겁하게 하지만, 그 결과가 급격한 시청률 반등으로 돌아오면서 애비도 어쩔 수 없게 된다. 남녀간의 섹스를 원숭이에 빗댈 만큼 매우 원초적인 사고관을 지닌 마이크가 애비는 영 탐탁치 않지만, 그러면서도 희한하게 연애에 대해서 귀신같은 통찰력을 갖고 있다. 매우 이상적인 이상형을 갖고 있는 애비가 어느날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조언대로 순서를 밟아나가자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이다. 그동안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조신함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애비는 이 귀신같은 남자 마이크를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일까.
다른 건 몰라도 이 영화를 만든 로버트 루케틱 감독은 출연하는 배우들의 숨겨진 매력을 매우 잘 끄집어내는 감독인 듯 하다. <금발이 너무해>에서의 리즈 위더스푼이 그랬고,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에서 케이트 보스워스와 토퍼 그레이스가 그랬고, <퍼펙트 웨딩>에서 제인 폰다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 영화에선 상당히 어색한 조합으로 보였던 캐서린 헤이글과 제라드 버틀러를 끌어들여, 의외의 변신을 통해 생각보다 꽤 폭발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이름 그대로 이지적이었던 <그레이 아나토미>의 '이지'로 잘 알려진 캐서린 헤이글은 <어글리 트루스>에서 다혈질 PD로 분해 'F'단어를 심심치 않게 내뱉는 데다 몸개그와 막춤까지 심심치 않게 펼쳐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만만치 않은 상대 때문에 조신하고 싶어도 수시로 성질이 뻗치다가도, 이상형의 남자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막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닭살 돋지 않는 인간적인 귀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그녀를 차세대 로맨틱 코미디 여왕으로 불러도 될 듯 하다. 여러 영화에서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제라드 버틀러는 그라면 왠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로맨틱 코미디 성향의 이 영화에 등장해 자신의 기존 이미지를 살짝 우스꽝스럽게 비튼다. 남녀의 사랑은 알고보면 응큼한 것 투성이라며 호탕하게 외치는 그의 모습은 <300>에서 천하를 호령할 듯 했던 그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300>에서 적의 심장을 노리던 그 눈빛은 이제 여자한테 수작 걸 타이밍을 노리는 눈빛으로 변해 있다.) 이렇게 이미지 변신을 꾀한 두 배우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내뿜는 화학작용은 생각보다 꽤 강력해 큰 웃음을 꽤 여러번 가져다 주었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로맨틱 코미디의 틀을 하고 있지만 닭살 돋거나 예쁘게 포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가 여전히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르이긴 하지만, 그 겉모양이 워낙에 달콤하고 낭만적으로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없지 않아서, 극장으로 향할 때 커플이 아니면 살짝 머뭇거리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알콩달콩 커플들만 만족시킬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남녀 관계와 심리에 대해 극중 인물들이 적잖이 던지는 꽤 수위 높은 대사나 상황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마치 알고는 있지만 쉽게 말로 꺼내지 못했던 부분이 자극 받은 듯 불쑥 웃음이 터진다. 예쁘장한 상황에 '호호호' 웃는 것이 아니라 다소 적나라한 상황에서 남들 눈치 살짝 보면서 '낄낄낄' 웃는 재미랄까. 그렇다고 화장실 유머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급기야 민망함을 일으키기보다는, 적당히 애교 수준에서 멈춘다는 점에서 얼굴 붉어질 일은 별로 없을 듯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임에도 동성 친구들끼리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아니 오히려 더 맞장구치면서 볼 만한 영화다.
꽤나 전형적으로 흘러가는 후반부에 이르기 전에 영화 속에서 애비와 마이크가 펼치는 에피소드들은 큰 재미를 주기에 충분하다. 공중파 방송에서 마이크가 보여주는 갖가지 돌발 상황들은 현실적이라기보다(실제라면 저런 일이 용인될 가능성은 0%에 가깝기 때문에) 연극적으로 과장된 희극을 보는 듯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고, 제대로 연애를 해 보고자 하는 애비에게 마이크가 던지는 꽤 세밀한 조언들은 귀가 솔깃할 만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애비가 연애 코치를 받는 과정에서 생기는 갖가지 해프닝도 밋밋하지 않고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에 걸맞게 어느 정도 대담한 면을 갖고 있어서 성인 관객이라면 거리낌없이 박장대소할 만한 부분이 많다.
물론 이 영화는 결국 헐리웃식 로맨틱 코미디의 닳고 닳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포일러랄 것도 없지만, 상극의 성격을 지닌 남녀가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별로라고 여겼던 남자가 알고보니 의외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그래서 그 별로라고 여겼던 남자에게 언제부턴가 마음이 가는 노선을 이 영화도 밟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감독의 전작인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에서도 발견되는 부분이다.) 초중반부에서 신명나게 펼쳐놓았던 19금 유머와 해프닝 한마당이 후반부 본격적인 러브라인으로 들어서면서 밍숭맹숭한 결말로 이어지는 것도 없지 않다. '남자와 여자는 사실 이렇답니다'라면서 악동처럼 펼쳐놓지만 결국 거기에 맞는 인상적인 메시지를 내놓지는 않는, 그렇게까지 건설적인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다. 진실한 감정과 오해의 연속으로 인한 갈등까지 익숙하게 펼쳐지는 후반부는 초중반부 이 영화의 매력을 자칫 빛바래게 할 수 있을 위험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꽤 재미있는 로맨틱 코미디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익숙한 흐름 속에서도 남녀 관계에 대한 꾸밈 없는 시선을 꾸준히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남녀가 서로에 대해 왠만큼 환상을 품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직시하려 하는 데에 이 영화의 매력이 있다. 우아하고 젠틀한 남녀 주인공을 등장시켜서 환상을 충족시키는 대신에, 예쁘고 멋지긴 하나 속은 능구렁이 같은 남녀를 등장시켜 사실은 이런 부분이 있다며 장난스럽게 실체를 까발리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환상을 애초에 배제한 남녀이기에 둘이 펼치는 사건들은 닭살은 한층 사라지고 웃음의 폭발력은 한층 높아진다. 그 과정에서 '현실은 이상형과 다르다'는 전제하에 펼쳐지는 '이상적인 모습에 목매지 말고 상대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외양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뻔한 메시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남녀의 속마음은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현실적 명제를 꾸준히 유지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끝까지 장난기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 말대로 각자의 이상형과는 달리 '현실은 시궁창'이라지만 그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마음같지 않은 현실을 인정하고 최대한 즐길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잊기 위해 더 높은 상상력의 성을 지어 그 안에서 행복을 느낄 것인가. 적어도 <어글리 트루스>는 누구에게나 달콤할 로맨스의 환상에서는 한 걸음 벗어나 있다. 현실이 못나 보여도 그 안의 즐거움은 존재한다는 것을, 다만 그 즐거움을 위해 사람들은 누구나 적잖이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지 않고, 응큼하게 주시하면서 '쟤네들 저러면서 속으로는 딴 맘 먹고 있는지도 몰라' 하며 킥킥거리는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어글리 트루스>는 보다 친밀한 (로맨틱하다기보다는) 러브 코미디다.
+ 엔딩 크레딧에서 누군가가 들으면 좀 찔릴 것 같은 노래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