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우리가 조커라는 캐릭터를 통해 느끼는 감정은 묘하게도 배트맨에게서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우리가 배트맨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가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면 언제 어디라도 홀연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어느샌가 나타나 있고,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예외없이 악당들을 소탕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위험한 사건이 일어나도 긴장하지 않는다. 배트맨이 나타나서 해결시켜 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배트맨이 어떤 일이든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믿음.
헌데 우리가 조커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부분은 그가 어떤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온다. 그가 병원을 폭파 시키겠다면 정말로 폭파 시키는 것이다. 그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공표하면 정말로 그 사람은 죽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다. 죽음처럼 절대적인 영향력.(그의 예측불가능한 행동은 죽음을 닮아있다) 그는 남자 경찰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고, 여자 간호원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도 있다. 우리는 그가 허풍쟁이가 아니라 진짜 미치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불안해 한다. 배트맨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조커의 광기에 압도 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포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영화속의 고담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영화 전반부는 절대적인 배트맨의 이미지가 고담을 압도한다. 모두들 배트맨을 흉내내고, 배트 라이트가 밤하늘에 비추는 날은 마약거래도 꺼린다. 배트맨 앞에서 범죄 조직은 무력하기만 하다. 국경까지 넘어가면서 배트맨은 악당을 몰아세운다. 그리고 악당들의 소탕은 눈앞에 온 것 같다.
하지만 조커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절대자의 순위가 바뀐다. 그는 - 배트맨이 절대적인 선(善)이듯이 - 절대적인 악(惡)이다. 절대적인 선에게서 우리는 지루함을 느끼는 대신 안정감을 얻지만, 절대적인 악에게서는 끝없는 긴장과 공포를 느끼는 대신 쾌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가 재밌어지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부터인건 예정된 사실이다.
이때 고담시민은(이쯤되면 관객도 이미 고담시민의 일부가 되어있다) 조커가 교묘하게 조작하는 어리석은 대중이다. 조커는 어디에나 자신이 나타날 수 있다는, 자신이 무슨 짓이든 벌일 수 있다는 믿음을 이용해서 대중을 기만한다. 누구도 조커를 잡아 죽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배트맨을 잡아들이려하고,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겠다는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다. 조커가 벌여놓은 판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짓인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조커가 원하는 걸 빨리 주고 눈앞의 보장된 안정을 되찾으려고 한다. 모두들 조커라는 공포에 압도당한 것이다. 우리가 수도 없이 봐왔던 집단 히스테리. 조커보다 더 무서운 그것의 등장이다.
조커는 자신의 전능성에 대한 환상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고담시민을(혹은 고담시민으로 대표되는 모든인간을) 자기화(化), 다시말해 조커화(化) 시키려고 한다.
두 척의 배, 두 개의 폭파리모콘. 어리석은 대중을 기만하는 마지막 단계이다.
조커는 승리를 확신한다. 그가 예측한 대로 실험결과가 나오려는 찰나이다.
냉정한 감독은 조커의 손을 들어주다 만다. 대중은 생각보다 악하지 않았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결국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냉정한 이 감독은 조커의 손을 절반은 들어준다. 대중의 영웅이던 하비던트는 투페이스가 된다. 우리는 어쩌면 제대로 뒷통수를 맞은 건지도 모른다.
조커는 잡혔지만, 그가 곧 풀려나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관객은 예상한다.
배트맨은 다시한번 고담시를 구했지만, 그는 스스로 어둠의 기사가 되기를 자처한다.
대중은 악의 이미지에 좀 더 쉽게 압도 당한다는 사실을, 배트맨은 알아챈건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배트맨 자신이 조커에게 압도당하며 그 사실을 알아챈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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