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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의 미실이 나타났다 오펀 : 천사의 비밀
jimmani 2009-08-22 오전 2:45:44 14378   [3]

 

악역이 제 기능을 하는 건 의외로 쉽지 않다. 배우의 연기에 따라서 '정말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은 무서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럽고 치사해서 접근하지 않는 지긋지긋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영화는 관객에게 효과적인 긴장감을 안겨줄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긴장감은 둘째치고 스트레스와 불쾌함을 안겨줄 수도 있다. 더구나 악역이 단순히 주인공의 상대역이 아닌 이야기 흐름의 중심축이 될 때는 더 그 중요성이 뚜렷해진다. 결과가 잘 나오면, 그 영화는 다른 부분을 굳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악역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칭찬을 받을 근거를 얻게 되기도 한다. 최근의 그런 긍정적인 사례가 영화 중에는 <다크 나이트>가 있었고, 드라마 중에는 <선덕여왕>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 작품들이 악역 캐릭터 이외에는 매력이 없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악역 캐릭터가 특별히 돋보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제 여름도 다 끝나가려 하는 마당에 예상치 못한 영화에서 <선덕여왕> 속 '미실'과 대적할 만한 인물이 등장했다. <오펀:천사의 비밀>(이하 <오펀>)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헐리웃에서 나온 몇몇의 '사이코패스 어린이' 소재 영화들에서도 알 수 있듯,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가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는 사실 자체가 섬뜩하게 다가오지만, <오펀>에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그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매력이 있다. 시종일관 관객의 주의가 흐트러질 틈을 주지 않는 이 아이를 데리고, <오펀>은 절대 서두르지 않으면서 결국에는 대뇌 피질을 박박 긁을 정도로 압박적인 공포를 선사하고야 만다.

 

셋째 아이를 사산한 충격으로 내내 악몽을 꾸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케이트(베라 파미가)는 남편 존(피터 사스가드)의 추천으로 그 못다한 사랑을 쏟아 줄 아이를 입양하기로 한다. 고아원 '천사의 집'에서 고심 끝에 찾은 아이는 러시아에서 왔다는 이국적인 외모의 9살 소녀 에스터(이사벨 퍼먼)를 입양하기로 결정한다. 그림에 소질 있고 총명한 데다 예의까지 바른 에스터는 집에 오자마자 아들 대니얼(지미 베넷), 딸 맥스(아리아나 엔지니어) 등 가족들과 곧잘 적응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이상한 일들이 거듭 생기기 시작한다. 에스터를 못살게 굴었던 같은 반 여자아이가 놀이터 미끄럼틀에서 실족사고를 당하고, 곁에 있던 에스터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이 소식을 듣고 이상한 낌새를 느껴 부부의 집을 찾은 고아원 원장수녀는 돌아가는 길에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에스터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섬뜩한 사건들에 케이트는 의심을 품고, 이런 눈빛을 느꼈는지 에스터는 케이트가 사사건건 충돌을 빚는다. 이내 에스터의 수상한 기운이 아이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이트는 이를 존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만, 너무나 해맑고 순수해 보이는 에스터의 모습에 현혹된 사람들은 케이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과연 에스터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왜 에스터는 이런 일들을 저지르는 것일까.

 

 

너무 단언하는 감이 없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올해 공포영화계에서 한국에 <불신지옥>이 있다면 헐리웃에는 이 영화가 있다고 얘기하고 싶을 만큼 이 영화는 여러 모로 만족스럽다. 배우들의 연기부터가 심심하지 않다. 영화가 자극적인 영상으로 공포를 주려는 게 아니라 극 전반을 둘러싸는 냉랭한 분위기와 점점 조여오는 불편한 비밀의 그림자를 통해 공포를 주려 노력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휩싸이는 배우들의 연기가 받쳐주지 않으면 쉽게 몰입하기 힘들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력은 모두 안정적이고 때때로 강렬하기까지 해서 쉬운 몰입을 유도한다. 에스터의 비밀을 홀로 캐가는 케이트 역의 베라 파미가는 셋째 아이를 뱃속에서 잃은 일로 인한 슬픔과 불안, 두려움이 고루 섞인 케이트의 다양한 모습을 매우 뚜렷하게 표현해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배우는 따로 있는데, 다름아닌 에스터 역의 이사벨 펄먼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연기는 악마가 들렸다고 얼음장같은 눈빛 한 번 쏴주고, 귀신 들렸다고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대는 수준의 연기가 아니다. 도대체 저 아이의 정신엔 뭐가 들었을까 의심이 들 만큼 어린아이다운 애교와 연쇄살인마같은 무자비함을 모두 갖고 있는 에스터의 모습을 시치미 뚝 떼는 표정연기와 똑 부러지는 대사처리로 훌륭히 소화해냈다. 특히 중간중간에 에스터가 매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장면들도 나오는데, 그런 장면들을 볼 때는 '저 연기를 하고 나서 정신과 치료가 따로 필요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악마적 면모가 잘 살아났다. 이사벨 퍼먼의 출중한 연기 덕에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에스터는 영화 전체를 빛나게 하기에도 충분할 만큼의 포스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를 만든 자움 콜렛 세라 감독의 전작이 슬래셔 호러인 <하우스 오브 왁스>였던 걸 생각하면 이런 상대적으로 얌전한(?) 호러 스릴러는 의외다 싶을 수 있겠지만, 다르게 보면 통하는 구석도 있다. <하우스 오브 왁스>는 젊은 관객들을 타겟으로 한 슬래셔 호러이면서도 밀랍인형 마을, 박물관 등에서 오는 고전적인 풍모가 인상적이었는데, <오펀>은 그런 고전적 이미지가 더욱 뚜렷하게 살아있다. 영화는 절대 자극적인 영상을 낭비하려 들지 않는다. 피로 떡칠된 영상으로 도배해 무섭다기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대신, 영화는 적절한 음악과 때때로 소름돋는 음향효과, 세련되지만 서늘한 영상과 센스 있게 나타나주는 낚시 효과를 더해가며 담백한 공포감을 안겨준다. 관객들을 꽤나 기겁하게 할 케이트의 악몽 장면으로 포문을 여는 영화는, 이후로 웬만해서 관객들의 심리를 편안하게끔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두 시간이 조금 넘는 넉넉한 러닝타임 속에서 에스터를 입양하는 과정, 적응과정과 이상한 낌새, 사건과 갈등의 심화, 갈등의 극대화와 비밀 공개, 결말에 이르기까지 어느 부분에서도 급하게 매듭지으려 하지 않고 차근차근 나아간다. 내내 평화롭다가 특정 장면에서 냅다 놀라게 하는 충격효과를 즐기지도 않는다. 집 안팎을 지배하는 신경 거슬리는 효과음과 어수선한 분위기, 그리고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안좋은 사연들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그렇지 않아도 이들의 집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초조를 일정부분 느끼게 한다. 그런 가운데 갈등을 심화시킴으로써 관객의 심리를 조금씩 조여오다가, 후반부에 가서는 갈등의 극대화와 비밀 공개로 큰 한 방을 터뜨린 뒤 이것으로 결말까지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식이다. 영화 내내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이어지는 이런 상황에선 결국 별것 아닌 효과음도 자꾸 신경쓰이고, 1인칭 시점으로 촬영되는 카메라의 끝에 뭔 일이 생길 것만 같고, 영화가 떡밥식으로 조성한 공포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는다. 관객이 영화 속 공포에 빠졌다 들어갔다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서서히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영화가 효과적인 공포를 안겨줄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은 영화 속 '악의 원천'이라 할 만한 소녀 에스터라 할 수 있겠다. 웬만해선 상상하기 힘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에스터는 거기에 걸맞는 놀라운 위력을 보여준다. 어린아이의 행동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냉혹한 면모와 용의주도한 계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감과 함께 분노까지 선사할 만큼 강력하다. 그녀가 어떤 목적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에스터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까지 불사하고,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까지 마법처럼 해치워버리고, 자신을 둘러싼 주변 상황을 끊임없이 주시한다. 자신은 순수한 아이임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포커페이스처럼 보여주는 총명한 미소와 친절한 말투는 그 뒤에 숨은 어두운 이면때문에 더욱 소름끼치게 다가온다.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그녀의 행동때문에 그녀와 가까이 있는 어른들이라면 누구든지 '빨리 다른 곳으로 피하라'고 말리고 싶을 정도로 에스터는 영화 속 인물들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까지도 그 압박적 공포를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급기야 그녀가 손대지 말아야 할 곳에까지 손을 대고 충돌이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 그 때의 공포스러우면서도 짜릿한 카타르시스는 꽤나 위력 있다.

 

이렇게 에스터는 영화 속에서 악역이라는 이름의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진정 나쁘게 느껴지고 진정 두렵게 느껴지는 절대적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내가 최근에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이해타산을 따지면서 이중적 태도도 마다하지 않으며 신적인 능력을 행하는 인간인 미실을 보며 느꼈던 감정과 제법 흡사했다. 물론 연령대 비례 행동의 강도를 따지자면 미실보다는 에스터가 정서적으로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는 게 차이점이지만. 원래 같은 악행도 이유가 없을 때 더 무섭듯, 뚜렷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소름끼치는 행동을 일삼는 에스터를 보며 관객들도 굵직한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에스터를 둘러싼 비밀이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순간, 에스터는 단순한 '싸이코패스' 이미지를 넘어서는 상당히 기이한 캐릭터로 진화한다. 영화 전체의 성격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이 반전은 뚜렷한 근거 없이 의문투성이로 연기처럼 둥둥 떠다녔던 관객들의 추리에 충격적 근거를 깔아주는 기능도 하지만, 에스터의 캐릭터를 더욱 더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오프닝 크레딧에 보여지는 희한한 이중적 이미지도 어쩌면 이런 성격을 표현하는 한 부분일 것이다. 암튼 이 영화 곳곳에는 에스터의 비밀에 대한 키워드가 숨겨진 부분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이 덕분에, <오펀> 속 에스터는 최근 헐리웃 영화에서 본 악역 중 가장 강력한 악역 중 한 명이 될 만하다.

 

<오펀>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복합적 성분을 지닌 영화다. 비윤리적 행동들을 저지르는 아이에 대한 공포는 익히 보아 온 헐리웃 호러물의 소재면서 심령스릴러적인 분위기까지 안겨준다. 거기에 에스터의 비밀에 대한 추리를 유도하는 단서들이 곳곳에 숨어 있고, 반전 이후 치닫는 클라이맥스는 영화를 이전까지 생각지 못했던 성격의 것으로 바꿔놓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렇게 복합적 성분을 지닌 캐릭터와 이야기를 영화는 오히려 고전적인 방법으로 전개한다는 점이 놀랍다. 재기발랄한 형식과 충격적이고 화려한 비주얼을 활용하지 않고, 공포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은 웬만큼 다 끌어와 관객의 오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극하며 심장을 차분하게 조여온다. 그리고 그 결과 맞닥뜨리는 이야기의 실체가 주는 폭발력은 그만큼 강력하다. 이 속에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와, 대단히 매력적인 독보적 캐릭터까지 존재한다. 이면에 뭔가 대단한 메시지는 없다 해도, 호러 스릴러 본연으로서의 쾌감은 대단하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 만큼 관객들에게 확실한 쇼크를 선사하는 영화 <오펀>은, 영화의 만듦새만 본다면 올 여름 또 하나의 '슬리퍼 히트'(예상치 못한 성공작) 스릴러다.   


(총 3명 참여)
zoophi
저도 보고싶네요   
2010-01-22 18:33
ccongy
보고싶네요.   
2009-09-03 16:09
hosuk83
야 진짜 이런 배우가 있다니
정말 보면서
소름 끼쳤습니다
어쩜 이럴수가.....   
2009-09-02 17:03
seon2000
음...   
2009-08-30 03:02
monica1383
잘 봤어요   
2009-08-29 10:51
spitzbz
여기서 하나 짚을것.. 분명 올해 최고의 영화이긴하나 옥의티
마지막 그녀가 칼들고 아예 대놓고 악마의 모습을 드러낼때...
어떻게봐도 처음 그 소녀가 아니더군요. 동남아 마사지사? 랄까..
암튼 피부도 다르고 얼굴생김새도 다르더군요. 더욱 사악한 장면연출을
위해서거나, 너무 잔인해서 다른 배역을 쓴듯..
흡싸 골룸같기도 하고.. 하긴 그 어린소녀에게 흉기를 들고 그런 무시무시한 연기를 시키는건 법에 저촉될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08-28 20:18
pinkoki
무서버요   
2009-08-28 11:35
wjswoghd
그녀의 눈 무서워요   
2009-08-27 19:01
shfever
잘 읽었습니다   
2009-08-27 12:59
blue8171
잘 읽었어여   
2009-08-27 11:23
kimjnim
보고싶다   
2009-08-25 23:33
hooper
이야 대단!!   
2009-08-25 17:42
pinkoki
미실과 비교하다니..ㅎㅎ   
2009-08-25 11:05
verite1004
보고 싶네요!   
2009-08-25 09:15
1


오펀 : 천사의 비밀(2009, The Orphan)
제작사 : Warner Bros., Dark Castle Entertainment / 배급사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수입사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 공식홈페이지 : http://www.warning.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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