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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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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23 오후 6:1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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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를 하다가 티비에서 흘러 나오는 '게릴라 콘서트'라는 걸 보게 되었다. 엠비쑤 일요일 일요일 밤엔가 하는 프로프램의 한 코너로 방영되는 것인데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거였다.
그게 꽤 인기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식당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이 티비에 쏠려 있었고 같이 식사를 하던 친구도 식사하는 내내 그리고 식사를 다 마치고 그 코너가 끝날 때까지 티비 이외의 다른 곳으로 한눈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게릴라 콘서트'란, 콘서트가 그날 아침에 결정되어서 예정된 시간(보통 한시간 정도) 만큼만 홍보를 해서 관객들이 5000명 이상 콘서트를 보러 오면 공연을 계속 하고 그 이하면 공연은 하지 않고 와 준거 고맙다며 얼굴만 보고 마는 그런 거였다. 물론 짜고 치는 고스톱이겠지만, 어쨌든 티비에서 보이는 바에 따르면 콘서트가 어디서 열리는지는 그날 아침에 결정되고 그 콘서트의 주인공인 '뮤지션'은 거의 발로 뛰당기면서 자신의 콘서트를 홍보해야 한다.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콘서트를 홍보해야 하기 땜에 주인공은 5000명 이상의 군중들이 몰려 들게 하기 위해 정해져 있는 시간인 (지난번에 보니깐 어떤 '뮤지션'의 경우엔 신인이라는 이유로 하루라는 시간을 주기도 했지만) 한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홍보해야 하는데, 그 시간 동안 그 '뮤지션'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게 공연을 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느라 티비 카메라는 똥줄이 빠지게 그 '뮤지션'을 쫓아 다녀야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홍보로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고 콘서트를 시작할 시간이 오면 그 '뮤지션'은 심판받는 심정으로 안대까지 하고 무대 위에 올라가서 관중들이 몇 명이나 왔을지를 질문받는 가운데 과연 콘서트를 할 수 있을 것이냐 아니냐의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그리고 티비 화면은 몰려든 관중들의 숫자가 몇 명인지를 좀체로 쉽게 알려 주지 않고 중간에 다음 코너의 예고까지 낑궈 넣는 알뜰함을 과시한 다음 몰려든 사람들의 수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토록 애타게 만들던 숫자에 대한 강박증은, 막상 그 숫자가 공개되자 마자 사라져 버리고 이제 5000명이 넘든 안 넘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관객이 몇 명이 왔든지 그 주인공 '뮤지션'을 보러 온 팬들에게 그 주인공 '뮤지션'은 감동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격해 하고 그 감격이 거기에 몰려든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감정이입되느냐에 따라 그 프로의 시청률은 결정될 것이다. 이번에 주인공이었던 '뮤지션'은 N세대 탤런트라는 차태현이라는 넘이었다. 018 CF에서 코믹한 캐릭터로 단숨에 CF계의 기린아가 되더니 이후 몇 편의 드라마를 통해서 아이돌 스타로서의 발판을 굳건히 마련한 그 차태현이 이제 '뮤지션'으로 데뷔하겠다면서 곧 있을 음반 발매에 맞춰 '게릴라 콘서트'를 연 것이었다. 음반 발매전에 팬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먼저 콘서트를 통해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뭐, 차태현이가 그동안 자신의 음악적 숨은 재능이 엄청나게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탤런트로서만 알려진 것이 못마땅해서 '뮤지션' 데뷔를 선언한 것인지도 모르고, 5000명 이상 모으기가 전에 볼 때는 무지 어렵더만 이번에는 단숨에 만명이 넘은 관중들이 몰려든 그 '게릴라 콘서트'에서 정작 차태현이 공연을 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아서 그가 어떻게 공연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의 음악적 역량을 내가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그 '게릴라 콘서트'라는 것이 진행되는 내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음식들이 모래알처럼 느껴지면서 아랫배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절라 아니꼽고 오장이 배배 꼬이는 역겨움을 참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도대체 이 넘들은 콘서트라는 걸, 음악에 있어서의 공연이라는 걸 뭘로 아는 것일까? 이 시방새들은 음악에 목숨을 걸고 평생을 음악 하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수많은 뮤지션들의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통을 개구리 코털에 묻은 콧물 만큼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뮤지션들이 오늘도 공연할 장소는 고사하고 그날 하루의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지 상상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이 개쉐이들은 왜 이다지도 음악을 모독하는가?
이것은 죄악에 다름 아니다. 정당한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댓가가 주어지지 않는 방정맞은 사회 속에서 그래도 어딘가에는 희망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조또 없으며 그들이 믿고 있는 건 몽조리 개소리이고 그들의 허접스런 머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시방새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이러한 숫자놀음으로 우매한 대중들에게 싸구려 감동을 던져줌으로써 희망 자체를 산산히 부숴버리는 죄악이다.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그 죄악의 무시무시함에 전신을 파들파들 떨면서 안식을 구하려고 찾아든 극장에서 마티유 카쇼비츠는 나에게 크로스 펀치를 날려 버렸다.
마티유 카쇼비츠.... 내 젊음의 한 쪽을 송두리째 집어 삼켜버린 이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전율을 느낀다. <증오>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심근경색발작증후군같은 쇼킹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영화가 시작되고 그것이 끝날 때까지 침 한번 꼴깍거리지 못하고 넋을 잃은 채 무아의 경지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 만큼 유쾌한 일도 없으리라. 그리고 영화가 끝나가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워서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뒤로 돌려 놓고 싶은 심정이 되는 영화를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함께 마티유 카쇼비츠는 기존의 영화에서 보여지던 구태의연하고 지리멸렬한 진부함에 허구헌날 하품이나 쩍쩍 해대던 나에게 전혀 색다르고 독특하며 감각적이고 놀랄만한 신선함을 던져 주었다.
소수민족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이 갖는 방황, 분노, 저항, 갈등, 소외, 그리고 증오의 문제들이 다큐멘타리같은 흑백화면 속에서 갖가지 영화적 기교로 표현된다. 인물의 행동 선상을 따라 거친 핸드 헬드로 담아내는 샷의 엄청난 롱테이크들은 웬만한 내공의 연출력으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장엄하며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나를 완전히 뻑가게 만든 샷은 도시를 배경으로 다리 위에 서 있던 위베르 일행이 길고도 지리하며 혼란스런 밤이 끝나가고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맞이하면서 주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상황에서 오는 불안과 부조화를 대변하듯 펼쳐진 줌 인 달리 아웃 샷이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화면의 정가운데 놓여 있는 인물은 그대로 있는데 주변의 사물들이 급격하게 굴절되면서 변화되는 장면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런 장면을 만들어 내는 카메라 웍이 줌 인 달리(혹은 트랙이라고도 한다) 아웃이다. 말 그대로 줌으로 당기고 달리는 뒤로 물러 나는 것이다. 거꾸로 줌 아웃 달리 인을 해도 효과는 비슷하게 나타난다.
보통 인물의 급격한 심리적 변화를 표현할 때 이 기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게 간단하게 말로 표현한 것 처럼 쉬운 게 아니다. 달리가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줌을 당기면서 포커스를 맞추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카메라 웍 테크닉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핀트가 나가 버린다거나 화면이 툭툭 끊겨 버리기 십상이다.
개연성을 가지고 적합한 상황에 따라 그것을 얼마나 적절히 활용하느냐에 따라 영화적 기교는 그 가치가 극대화됨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기교 자체가 영화 자체의 완성도로 착각하고 있는 꼴통들이 가끔씩 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줌 인 달리 아웃을 시도하는 넘들 때문에 영화의 쉣스러움이 줌 인 달리 아웃으로 배가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줌 인 달리 아웃 샷 중에서 <증오>에 등장한 것 만큼 완벽하게 그 상황과 어우러지면서 영화적 기교의 의미를 절절히 확인시켜준 것도 없었다. <증오>를 통해서 나를 경악시킨 마티유 카쇼비츠는 <암살자(들)>을 통해서 <증오>가 27살 새파란 애송이의 자기 껍질 벗기기식 관념의 과잉이나 기교의 허풍만이 아니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래서 "내가 블록버스트를 만들지 못할 이유가 무어냐?"라면서 <크림슨 리버>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이며 질시어린 눈초리에 가볍게 콧방귀 뀌어 버리는 카쇼비츠의 믿음직한 눈망울에서 고래힘줄같은 신뢰감을 가졌더랬다.
또한 갖가지 게시판에 도배되고 있는 <크림슨 리버>에 대한 평가절하적 발언들에 대해서도 니덜이 아무리 카쇼비츠를 음해하려 하여도 예술적 완성도는 반드시 음지에서만 이루진다는 편견과 독선으로 똘똘 뭉친 넘들의 헛소리라고 치부해 버렸더랬다.
그런데...
그토록 믿었던 카쇼비츠이건만...
<크림슨 리버>는 헐리웃 블록 버스터의 공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잘 만든 헐리웃 블록 버스터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나은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더구나 세계 시장을 겨냥한 탓인지 영어로 주어 섬기는 대사는 불어의 억양을 그대로 가지고 떼떼거리는 통에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가 그러한 어색함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상시키는 엉뚱함을 불러올 정도로 비극적이다.
영화가 망가지게 되니까 사소한 것까지도 도대체 통제가 안 되는지, 주 조연은 물론이고 엑스트라들까지 생동감이 넘쳐 흐르던 <증오>에서의 치밀한 연출력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크림슨 리버>에서는 엑스트라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의 비중이 있는 조연들까지 꿔다 논 보릿자루가 돼 버린다. 무엇보다도 나를 격노시킨 것은 줌 인 달리 아웃 샷이었다. <크림슨 리버>에서는 줌 인 달리 아웃 샷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그것이 영화적 완성도를 위한 영화적 기교의 적절한 배합이 아니라 카쇼비츠에게 남아 있는 재능은 줌 인 달리 아웃의 영화적 기교 밖에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참담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죄악이다. 얼마나 많은 영화학도가 쿠엔틴 타란티노와 마티유 카쇼비츠의 입지전적 성공에 고무되어 꿈과 희망을 키워 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가 상업성과 반비례하지 않다는 것을 믿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카쇼비츠는 입지전적 성공 뒤에는 퇴락한 재능과 결탁한 탐욕의 혀가 널름거리고 있고, 상업성을 위해서는 예술적 완성도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수 많은 실례 중에 하나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믿음과 희망을 산산히 부숴 버리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차태현이 음악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마티유 카쇼비츠가 블록 버스터를 만들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왜 음악을 모독하는지, 왜 믿음을 배신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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